“루치아 포프.”
“루치아 포프?”
“아이가 노래 부르는 방식이 루치아 포프를 꼭 닮았어.”
“루치아 포프가 누군데요?”
“슬로바키아 출신의 소프라노야. 죽은 지 20년이 지난 옛날 사람이지. 루치아 포프가 데뷔한 곡이 바로 이 노래, 밤의 여왕 아리아야. 한창때는 밤의 여왕 역할을 독식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조금 더 중후한 역할인 파미아 역할도 끝내주게 소화했지. 아직까지도 이 노래를 얘기할 때는 50년 전에 오토 클렘페러의 지휘 아래 루치아 포프가 부른 녹음을 빼놓지 않을 정도니까.”
“얘가 그만큼 잘 부르나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루치아 포프는 맑고 청아하고 기름기를 머금은 목소리인데 이 아이는 아직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못 찾고 있어. 높낮이에 따라서 목소리가 달라지잖아. 발성이 불안정해서 그래. 노래라는 건 간단히 말하면 호흡이거든.”
“그런데 뭐가 비슷하다는 거죠?”
“루치아 포프의 환생인가요?”
“우연이겠지. 아이한테 물어봐 줘. 루치아 포프를 아는지.”
“직접 물어보면 어떨까요?”
“무슨 소리야?”
“제가 다른 동영상을 하나 더 보여 드릴게요.”
민주는 유리가 생방송을 망쳐버리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유리가 비명을 지르는 장면에서 기현은 움찔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왜 이런 거지?”
“그것도 직접 물어보면 어떨까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는 유리를 이대로 놓기 싫어요. 유리의 비밀이, 상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치유해주고 싶어요. 그 방법은 음악이에요. 제 쇼에서 꼭 유리의 재능을 선보이고 싶어요. 그럼 유리의 재능을 꽃피워줄 후원자가 나타날지도 모르죠.”
“만져 봐도 될까요?”
당황해서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유리의 손이 천천히, 거침없이 올라와 그의 뺨을 감쌌다. 눈을 감았다. 작고 보드라운 손은 기현의 머리칼과 이마, 코, 그리고 뺨을 느꼈다. 화상 흉터로 덮인 왼쪽 얼굴에도 손이 닿았다. 멈칫하던 손가락은 패이고 얽힌 소용돌이를 산책하고 머물렀다. 기현은 묻고 싶었다.
눌어붙은 고무 같지? 괴물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니?
유리는 손을 거두었다.
“상처가 있네요.”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전부였다. 기현은 조금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이런 얼굴 만져본 적 없지?”
“처음이에요. 남자 얼굴을 만져본 건.”
유리는 보지 못하는 눈을 반짝이며 기현의 이야기에 몰입했다. 기현도 이야기를 하면서 흥분했다. 그 역시 유리 또래일 때 오페라에 빠져 살았다. 아리아를 들으면서, 오페라보다 더 오페라 같은 작곡가와 가수들의 실제 이야기를 알아가면서 가슴이 뛰었다.
“칼라스는 실제로도 노르마와 비슷한 삶을 살았어.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 자리에 오른 후 그녀는 미국의 선박왕이라는 오나시스라는 사람하고 사랑에 빠져. 엄청 돈이 많은 사람이었지. 칼라스가 오나시스를 얼마나 좋아했냐하면 결혼을 하기 위해 음악도 뒷전으로 미루고 국적까지 바꿀 정도였지. 그런데 오나시스는 칼라스하고 한참 뜨거운 사랑을 하다가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 바로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야. 칼라스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했어. 눈물을 흘리면서 정결한 여신을 부른 뒤 무대를 떠나지. 그 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어.”
유리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노르마하고 비슷하네요.”
“그래서 사람들이 더더욱 칼라스와 노르마를 동일시하는지도 모르지.”
기현은 유리가 따라 불렀다는 CD를 확인했다.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노래는 없었다.
“한 번 들어볼래?”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노래 두 곡을 들려주었다.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 중에서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그리고 유리가 막 부른 「정결한 여신」. 유리는 홀린 표정으로 음악을 들었다.
“어때?”
“열정이 넘쳐흐르는 목소리에요. 이런 목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어요.”
“바로 그거야. 사실 칼라스의 격정적인 음성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어. 고음에서도 지나치게 생소리로 지른다는 거지. 하지만 대부분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비극적인 운명에 처해. 극 중 역할을 생각하면 예쁜 척하지 않고 격정적인 소리로 내지르는 것이 당연해.”
“왜 오페라의 여주인공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죠?”
“나중에 얘기해줄게. 오늘 배울 부분은 아니야.”
“저는 해피엔딩이 좋아요. 선생님은요?”
--- 본문 중에서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94년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예술의 전당에 가자며 저녁에 시간을 비우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저는 ROCK 음악에 빠져 있었지요. 밴드까지 결성해 클럽에서 활동할 정도로 ROCK의 흥분에 취해 살던 소년에게 예술의 전당은 이름만 들어도 하품 나오는 곳이 아니었겠어요?
게다가, 어머니는 제가 매일 입고 다니던 찢어진 청바지 대신 깨끗한 셔츠에 정장 구두를 신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연을 관람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라나요. 대체 무슨 공연이기에! 어머니는 싫다고 난리 치는 저를 반강제로 데려가셨습니다.
마지못해 간 공연이어서 그랬을까요? 공연은 시작부터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끈덕진 졸음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던 와중 갑자기 귀를 잡아끄는 아리아 선율에 눈을 떴습니다. 2중창 「축배의 노래」였습니다. 어 이 음악 들어본 적 있는데 그 뒤로는 졸지 않고 공연을 관람하다가 끝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고 말았지요.
제 인생 최초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돈이 모이는 대로 사들이던 록과 힙합 앨범들 사이에 가끔씩 오페라 아리아 모음집 CD가 섞이곤 했습니다. 로커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그렇게 오페라의 세계로 발을 디뎠던 것입니다.
제 소설 중에서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 여러 편 있지만 처음부터 영화를 생각하고 쓴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구상부터 영화와 뮤지컬, 그리고 어쩌면 오페라로 만들어지는 것까지 생각하고 썼습니다. 스크린과 무대 위에서도 얼굴을 잃은 사내와 눈을 잃은 소녀의 사랑이야기를 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아름다운 아리아 선율도 함께 들으며.
소설을 쓸 때도 음악과 함께 했습니다. 오페라 음반을 들으면서 글을 쓰느라 창작의 고통은 다른 작품보다 훨씬 덜했지요. 여러분도 책을 읽다가 소설에 등장하는 아리아를 찾아 들어보세요.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될 걸요. 스마트폰을 열고 네이버에 아리아 제목만 쳐도 여러 성악가가 부른 동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페라는 이만큼 우리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맹인 소녀에게 성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도움 말씀을 주신 정현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동료 PD들과 몇 달째 진행하고 있는 팟캐스트 방송 「씨네타운 나인틴」의 청취자 ‘문카루소’님께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어요. 어설픈 오페라 지식을 깨알같이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요즘은 왜 메일 안 보내세요? 오페라에 미친 의사 박종호 선생이 펴낸 저서들과 유형종 선생이 저술한 「불멸의 목소리」 시리즈도 큰 도움이 되었음을 밝힙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어머니에게 바칩니다.
당신이 저를 데리고 오페라 극장으로 들어가던 순간, 이 소설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생에서는 최고의 엄마로 사셨지만 다음 생에는 꼭 오페라 가수로 태어나세요.
사랑해요 엄마.
---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