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소년 영주는 ‘죽음 앞에서 무력한 인간이 어떻게 하면 죽음과 삶의 정체를, 그리고 죽음을 넘어서 있다는 마음의 정체를 샅샅이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자꾸만 빠져 들고 있었다. --- p.29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많은 것을 알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이 마음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우주는 꼭 형상 있는 것과 형상 없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영주는 그 수수께끼를 풀고자 하는 자신의 집념이 언제인가 아버지의 책에서 본 ‘운명’이라는 단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운명은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 나직이 말하고 있었다.
--- p.34
이렇게 공부한 영어와 독일어 실력은 같은 또래들의 외국어 수준을 이미 넘어서게 되었다. 훗날 스님이 5개 국어에 능통하다는 소문이 난 것도 청년 시절에 익힌 외국어 공부와 무관하지 않다. --- p.39
어느 날 스님은 명문대학 출신의 한 제자를 불렀다. 제자가 스님께 가보니 스님의 책상 위에는 유명한 시사주간지가 펼쳐진 채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스님은 제자에게 분부했다.
“니 영어 좀 하제? 이것 좀 해석해 보거라.”
제자는 갑자기 닥친 일이라 우물쭈물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해석해 올렸다. 그러나 스님은 제자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이게. 그런 말이가? 니는 공부 좀 했다는 놈이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나.”
제자는 스님의 질타에 머리를 긁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 p.39
성철 스님의 열반 1주년을 앞두고 있던 1994년 10월 5일. 제자들은 새로 발견된 성철 스님의 유품을 공개했다. 이 유품들 가운데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스님이 20세 되던 해인 ‘1932년 12월 2일’에 작성한 독서 목록이다. 이 독서 목록에는 당시까지 청년 영주가 읽었더너 80여 권의 제목이 아담한 서체의 붓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 책들 가운데에는 매우 깊이 있는 사색이 필요로 하는 『철학사전』『민약론』『순수이성비판』『신·구약성서』『장자』『자본론』『하이네시집』『근사론』『벽암록』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이 독서 목록의 한편에는 매우 숙달된 영어 서체의 원서 제목들도 적고 있어서 당시 스님의 외국어 독학에 대한 정열을 느끼게 한다. --- p.41
영주는 난감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저렇게 완강하게 자신의 결혼을 서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 영주는 자신도 피할 수 없는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 고뇌하며 밤을 지샜다.
‘아아, 왜 사람들은 무엇이 가장 큰 행복인가라는 문제를 외면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여 아이를 낳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다가 이내 늙어서 추해지고 덧없이 죽고 만다. 나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 있다면 곧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싶건만.’
그 해 가을 청년 이영주는 장가를 들었다. 신부는 묵곡리에서 멀지 않은 덕산에 사는 전주 이씨 문중의 규수로 스물 한 살 난 이덕명이었다. --- p.49
“여보게, 영주. 유마 거사의 병은 바로 중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긴 병이었다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항상 병을 앓는 것인지도 모르지. 육체의 병이 없다면 마음의 병이 있기 마련이지. 그러니 자네도 유마 거사처럼 중생의 병을 함께 앓으면서 마음 공부를 하도록 하게.
그리고 불교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나? 그것은 자비야. 즉 일체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이지. 항상 자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베풀게. 그것이 깨달음이지. 자비를 베풀면서 살아가면 지금 당장은 깨달음이 없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약속되어 있는 걸세.”
--- p.64
‘불교란 무엇인가? 혹시 부처님이 설했다는 해탈의 진리야말로 내가 찾는 영원한 것에 대한 가르침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길을 가야만 하리라. 하지만 출가하여 스님이 되면 아내와 부모님, 동생들을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하지 않은가? 해봉 스님은 나에게 출가하지 않고서도 깊은 불도의 경지를 이른 유마 거사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세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단 말인가?’ --p.76
지난 일 년 동안의 목숨을 건 고행으로 영주의 몸은 눈에 뜨이게 야위었다. 그러나 두 눈만은 모든 것을 꿰뚫어볼 듯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네. 스님, 뜻을 세웠습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두 사람은 더이상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영주는 머리를 깎고 먹물 들인 승복을 입은 뒤 일생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발원하며 사미계를 받았다. 수계식이 끝나고 동산 스님은 말했다.
“장하구나. 이제 너는 더 이상 이영주가 아니니라. 너는 오늘 성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 태어났으니 이제부터는 사람들이 너를 성철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더욱 정진하여 중생들의 스승이 되길 바란다.” --- p.110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 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내 홀로 걸어나노라. --- p.111
“애, 행자야. 어서 그 손님들을 돌려보내지 못할까?”
스님의 호통에 겁이 난 어린 행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보살님예, 스님은 아무도 만나지 않을라고 하지는가 봅니더. 그냥 돌아가시이소. 한 가시면 제가 혼납니더.”
“아이고, 이 무정한 것아. 니 핏줄이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는단 말이냐? 니는 인제부터 사람도 아니다.” --- p.125
성철 스님의 정진은 실로 불꽃을 튀는 것처럼 매섭고 맹렬했다. 잠은 거의 자지 않았다. 이것이 스님의 유명한 ‘장좌불와’였다. 즉 허리를 바닥에 대지 않고 잠을 자더라도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서 자다가 다시 깨어나 참선하는 수행이었다. 인간의 수면욕이란 한이 없는 것이어서 한번 잠에 빠지면 계속해서 자고 싶은 법이다. 매일 그렇게 수면을 취하다 보면 정신은 더욱 혼미해지고, 깨달음은 더욱 멀어질 뿐이다. 스님은 음식도 정신을 흐리게 한다 하여 채소를 물에 씻어서 소금기가 전혀 없이 그냥 먹는 생식으로 일관하였다. --- p.131
한참 웃고 난 스님은 나직한 음성으로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했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 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그날 이후, 성철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의 정신적 수호자로 우뚝 서게 된다. 이때가 스님의 나이 스물 아홉이었다. 그는 마침내 광활한 마음의 우주를 주파해 버린 것이다. --- p.134
성철 스님은 하루하루 걸으면서 가을걷이를 하는 농부들과 함께 일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쉬운 치치로 전하기도 했고, 밥을 얻어 먹기도 했다. 스님은 농사 짓는 집에서 열심히 일을 한 뒤 약간의 품삯이라도 받게 되면 돈을 다시 돌려주면서 말했다.
“고맙지만 나는 돈하고는 이별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스님은 표표히 마을을 나서곤 했다. 그리고 부유한 집에서 탁발을 하여 얻은 물건들을 가난한 집 문 앞에다가 아무도 모르게 모두 내려놓기도 했다.
스님의 이와 같은 도보 행각은 수행의 연속이었다. --- p.142
“청담 스님,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스님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아무래도 도량을 옮겨서 좀더 부처님 법답게 수행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시국이 혼미한 것으로 보아 일본의 패망은 분명합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그때는 병들어 쓰러진 우리나라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욱 뜻을 굳게 세워서 부처님 법답게 수행하는 풍토를 만들어 가야겠습니다.” --- p.150
스님의 이와 같은 무소유와 평등한 삶은 해인사의 최고 어른인 방장으로 계실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 스님은 평소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를 걸쳤는데, 이 누더기는 스님의 청빈한 생활을 그대로 보여 주는 증거이다. 아무리 사소한 물건이라도 아껴 쓰는 스님의 절약 정신 앞에서는 여러 제자들이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 p.156
“흔히 삼천배라고 하면 ‘나를 만나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 스님들은 부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사림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무엇으로 부처님을 대신하겠나. 그래서 ‘나를 찾지 말고 부처님을 찾으시오’라는 뜻으로 절을 하라는 것이지.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니까 그 기회를 이용해서 부처님께 절을 하라는 것이지. 그래서 삼천 번 절을 시켰는데, 그냥 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절하는 것이다. 그렇게 삼천 번 절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무언가 변화가 오지. 그 변화가 온 뒤로는 자연히 스스로 절을 하게 돼.” --- p.167
“우리가 옛날에 생각했던 불교 정화는 이런 식이 아니었습니다. 참다운 불교 정화는 오직 부처님 법답게 살며 수행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깡패를 아귀다툼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불교가 정화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스님하고 같지만, 방법은 이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p.173
성철 스님은 1955년부터 1965년까지 10년 동안 성전암에서 은둔하여 수도를 시작한 이래 한 번도 산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참선 수행에 전념했다. …이처럼 스스로 절대 고독의 길을 택한 스님은 참선 수행 중에도 우리나라 불교의 바른 길을 모색하면서 실로 많은 경전과 선어록을 읽었다. 이때의 독서는 훗날 스님의 수많은 저서로 결실을 맺게 된다. --- p.176
여름 안거와 겨울 안거에는 반드시 수백 명의 해인사 스님들이 빠짐없이 참석하여 일주일씩 허리를 바닥에 대지 않고 참선하는 용맹정진을 실시하였다. 해인총림의 용맹정진은 일주일 동안 드러눕거나 잠을 자지 않고 24시간 내내 참선하는 매우 고된 수행법이다. 이미 연세가 높으신 성철 스님이었지만 용맹정진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후학들과 함께 참선하면서 그들을 지도하였다. --- p.187
“정진은 일상과 꿈 속과 잠 속에서 한결같이 동일하게 되어야 조금 상응함이 있으니 잠시라도 화두를 중단함이 있으면 안 된다. 정진은 필사의 노력이 필수 여건이니, 등한하고 게으르면 미래 겁이 다하도록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나니 다음의 조항을 엄수해야 한다.
첫째, 하루 네 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둘째, 벙어리같이 지내며 잡담하지 않는다.
셋째, 문자에 집착하지 않는다.
넷째, 포식, 간식을 하지 않는다.
다섯째, 적당한 노동을 한다.” --- p.188
1992년의 어느 봄날, 스님은 평생 자신을 따르며 수행하던 해인사의 원로 스님들을 백련암으로 불렀다. 지금 스님의 뒤를 이어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추대된 혜암 스님, 조계종의 계율을 총괄하는 일타 스님, 1947년 봉암사 결사 당시부터 스님을 모시던 해인사 주지 법전 스님이 스님과 자리를 함께 했다.
“이제는 내가 오라고 부를 때까지 오지 마. 그 소리하려고 불렀어. 이제 그만 가봐.”
그 말씀뿐이었다.
--- p.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