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처음 발상한 메소포타미아를 축복받은 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메소포타미아는 바그다드를 기점으로 남북으로 펼쳐진 두 지역이다. 그중에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 둘러싸인 삼각주의 선단부에 있다.
터키 동부에서 시작되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은 터키의 고원과 자그로스 산맥의 눈이 녹으면서 강물이 불어난다. 티그리스 강은 4월에, 유프라테스 강은 5월에 강물 수위가 최고치에 달한다. 강물의 수위는 각각 해발 35미터와 50미터까지 올라간다. 이 지역의 갈수기는 10월로 두 강의 수위는 각각 해발 28미터와 45미터를 기록한다. 최고치와 최저치의 차이가 각각 7미터와 5미터에 달한다. 따라서 물이 불어났을 때의 두 강이 합류하는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매년 홍수의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연간 강수량이 약 150밀리미터밖에 안 되는 심각한 건조 지역이다. 나무라고 할 만한 것이 소택지에 무성한 대나무가 전부였다. 문자 그대로 불모의 땅이다. 게다가 두 강이 몰고 오는 방대한 양의 진흙과 모래가 쌓여 그야말로 진흙 사막이 되었다.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신이 포기한 희망 없는 땅’이라 불렸던 곳이다.
한편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예컨대 티그리스 강 중류 유역에 위치한 해발 230미터인 모술Mosul(바그다드에서 북북서로 400~500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평원은 연간 강수량이 385밀리미터로 빗물을 이용한 건조 농법이 가능했다. 이 평원은 고대 아시리아Assyria의 중심부이자 아시리아의 번영을 가능케 한 비옥한 곡창지대였다. 모술에서 서쪽으로 70~80킬로미터 떨어진 곳의 아르빌Arbil 주변은 지금도 이라크 최대의 밀 산지이다. 고대 아시리아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사르곤Sargon 왕조의 수도인 니네베Nineveh, 니므루드Nimrud, 코르사바드Khorsabad가 전부 모술 평원에 건설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수메르 인은 하필이면 ‘신이 포기한 희망 없는 땅’에 뿌리를 내렸을까. 그리고 남부 메소포타미아는 어떻게 문명의 발상지가 되었고, 이번 이야기의 핵심인 맥주의 발상지가 된 걸까?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은 독선적 행위, 부패, 타락을 불러온다. ‘신앙의 시대’라 불리던 중세 기독교의 정점에 있던 로마 교황도 예외는 아니었다. 또 가톨릭의 지위가 높은 대주교도, 말단 교회를 운영하는 성직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교회가 저지른 부패 중에 최악은 ‘속유장’의 판매였다. 로마 교회에서는 죄를 면해주는 것을 ‘속유 ?’라고 부르는데, 그 증명서가 바로 속유장이다. 사제이자 신학자였던 마틴 루터는 속유장, 즉 면죄부를 돈으로 판매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루터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 명목으로 독일에서 면죄부가 부정 판매된 실태를 알게 되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교회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사실 면죄부 판매의 진짜 목적은, 마인츠의 대주교가 아우크스부르크의 부호 푸거 가家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한 것이었다.
루터가 1517년에 쓴 〈95개조 논제〉는 때마침 실용화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덕분에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효과는 대단했다. 전국 각지에서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는 봉화가 올랐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루터에게 주장 철회를 요구하기 위해 그를 제국회의에 소환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보름스 제국회의의 마틴 루터 심문 사건이다. 1521년 4월 17일의 일이다.
제국회의 당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필두로 각지에서 모인 제후가 나란히 앉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토록 강인한 성품의 루터도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그의 비서였던 청렴한 신교도 부인이 1리터짜리 도기 맥주잔을 들고 왔다. 잔을 받아든 루터는 잔에 든 맥주를 단숨에 비운 뒤, 두 뺨에 홍조를 띈 채 천천히 의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옥토버페스트는 1810년에 바이에른의 시골에서 열린 축제였다. 바이에른의 국왕 막시밀리안 1세의 황태자 루트비히(후에 바이에른 왕국의 제2대 국왕이 되는 루트비히 1세)와 작센에서 온 공주 테레지아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개최한 경마 대회가 시초였다. ‘테레지아 초원 Theresienwiese’이란 왕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딴 목초지를 가리킨다. 지금도 축제는 뮌헨 중앙역에서 서남서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테레지아 초원에서 열린다.
처음 이곳은 맥주와 무관했지만, 지금의 뮌헨은 맥주의 도시이다. 4년 후, 놋쇠 뚜껑이 달린 도기제 맥주잔에 맥주를 담아 판매하는 노점상이 들어섰고, 다시 몇 년이 지나자 테레지아 왕비의 기념 경마 대회가 완전히 맥주 축제로 변신했다고 《The History of German Beer》의 저자 돈부시는 밝힌다.
테레지아의 남편 루트비히 1세는 한 시대를 호령한 국왕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동경해서 뮌헨을 아테네나 피렌체 같은 예술의 도시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왕위를 계승하자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력을 쏟는다. 박물관과 미술관, 극장이 건설되었다. 현재 뮌헨의 아름다운 거리는 모두 루트비히 1세 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본떠 만든 개선문이 특히 유명하다.
20세기 말에 이르면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맥주의 후진국으로 여겨졌던 중국이 미국을 누르고 생산량에서 세계 1위에 오른 것이다.
〈표1〉은 1999년과 2008년의 전 세계 상위 10위권 그룹의 순위다. 1999년도 순위를 보면, 안호이저 부시(이하 AB)가 1위다. AB는 60년대부터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최고 기업이었고, 21세기 초엽까지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런데 1999년에 1위였던 AB와 4위의 암베브, 6위의 밀러와 8위의 스코티시 앤드 뉴캐슬(이하 S&N)은 2008년도 순위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암베브가 2위였던 인터브루와 병합하여 인베브가 되고, 밀러는 5위의 사브에 매수되었으며, S&N은 하이네켄과 칼스버그에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AB는 인베브에 매수되어, 새롭게 안호이저 부시 인베브 AB InBev로 태어났다. AB의 매수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맥주 업계 최대의 매수극이었으며, 세계의 모든 맥주 관계자들을 경악시킨 대사건이었다.
또 하나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화룬쉐화, 칭다오, 옌징의 중국 기업이 상위 10위권 안에 들었다는 점이다. 나는 예전부터 ‘21세기는 아시아의 시대’라고 해왔는데, 내 예상에 딱 맞아 떨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어쩌면 AB의 매수 사건도 20세기 말에 일어난 국제화라는 격류에 휘말려 침몰한, 한 척의 작은 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격변들이 일어날 것이다.
이제 20세기 말부터 세계 맥주 산업을 직격한 세계화는 대체 무엇인지 설명할 시간이 왔다. 다양한 방면에서 맥주 산업의 실정을 파헤쳐보자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