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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하는 사람

말 못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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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1월 11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294g | 145*210*14mm
ISBN13 9788954658522
ISBN10 8954658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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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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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는 소란한 90년대가 거센 연기와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고 하늘에는 보이지 않는 별과 별 사이에서 차갑고 더러운 눈, 물이 막 걸음을 떼려는 소년들의 이마에 떨어지곤 했다. 눈앞에서 죽은 소년도 있었고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소년도, 떠나지 못한 소년도 있었다.
모두 어른이 되었으리라.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어른이 된다. 어른들은 탐욕과 폭력과 배신으로 자기들의 나라를 만들려 하지만, 언제나 실패한다. 그들은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런 일이 있었다, 서울하고도 신촌에. 언젠가 미국에 그런 일이 있었듯이.
시간도 사람도 포스터도 추억도 모두 사라지고 골조만 앙상한 ‘언젠가는’만 남는다. 그러니 인생이여, 부탁하노니, 즐겁게 춤을 추시다가 그대로 멈출 줄 알지어다!
--- p.40

물은 여전히 흐른다. 흘러 개울을 이루고 연못을 채우며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 이 흐름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담으로 물을 막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흐르는 물을 본다. 사시사철 흐르는 물을 보고 또 본다. 끊임없이, 끊임없이 세게 약하게 거칠게 부드럽게 물은 흐른다. 물이 내 안에 흘러와 마음을 고즈넉이 흘러가도록 버려둔다.
흘러라, 인연이여, 역사여.
거죽뿐인 육신을 더듬거리는 세월이여.
흘러가거라, 달빛이여, 그림자여, 내 마음이여.
그 사람은 없다. 그의 벗들도 없다. 그 마음, 그의 집이 남았다. 담이 남았다. 눈과 겨울이 남았다. 대나무의 푸른빛이 남았다. 가야 할 눈길이 남아 있다, 내게.
--- p.68~69

변두리에서도 얼마든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무진장한 덕분이다. 그 압도적이며 불미스러운 다수파에 의해 아름다운 것의 겨자씨만한 극소수파 주위에 아름다움의 경계가 여기저기 생겨난다. 마치 물방울이 연못에 떨어질 때처럼.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라는 말의 울림처럼 퍼져가는 사랑스러운 동심원들.
--- p.110

말을 더듬는 게 오히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의 깊게 듣게 만들었다. 스스로 힘들게 말함으로 과장과 거짓이 없어 버릴 말이 없었고 허튼 말이 없으니 신뢰를 주었다. 조 사장은 말을 잘 못함으로써 누구보다도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남는 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고금의 ‘말씀 고수’들은 말한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색해진다고. 기왕 말을 할 것이라면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애매모호하게, 사람들이 각자 바라는 대로 해석할 수 있는 말을 남겨야 영향력이 강해진다고. 상대를 깎아내리고 상처 입히는 자기 주장으로는 일시적으로 이긴 것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결국 스스로의 속셈만 드러낼 뿐, 지고 만다고.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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