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이 할멈이 보통 할멈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할멈의 주먹은 웬만한 젊은 남자들보다도 훨씬 더 세고 빨랐다. 이 괴상한 할멈은 말 그대로 ‘파이터’였다. 어디서 어떤 훈련을 쌓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틀림없이 오랫동안 단련한 솜씨였다. 그래서 나는 할멈과 맞붙어 싸워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젊은이가 노인을 치는 게 아니다. 이건 ‘배틀’이다. --- p.47
싸움의 리듬을 읽어내는 귀, 남들은 듣지 못하는 리듬을 듣는 나의 귀는 내가 가진 단 하나뿐인 특기다. --- p.48
나는 완전히 집을 떠나려는 것이었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었으며, 그렇다는 이유로 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속속들이 옭아매려는 아버지라는 사람으로부터 확실히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난 길거리 생활이 뭔지 아무것도 모를 만큼 어렸지만, 그 결심만큼은 확고했다. --- p.55
“정신이 나갔어, 완전히 나갔다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아버지는 엄마가 이상한 행동을 보일 때마다 화를 냈다. 그리고 손찌검이 시작되었다.
“이봐,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했지?”
처음엔 마당으로 춤추러 나가려는 엄마를 말리다 뜻대로 안 되니까 때렸다. 나중에는 엄마가 웅얼거리기만 해도 때렸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엄마를 때리는 일이 마치 엄마를 살리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난 알았다. 아버지는 엄마를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창피해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항상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엄마를 절대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미친 여자를 아내로 둔 남자가 되기 싫어서 엄마를 꼭꼭 숨겼다.
손찌검은 곧 내게까지 날아들었다. --- p.98
내가 왜 북 치는 고수가 됐냐고요? 아버지한테 얻어맞다 보니 고수가 됐어요. 아버지가 날 때릴 때마다 리듬을 헤아리며 버텼어요. 얻어맞는 아픔 같은 건 잊어버린 지 오래였어요.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것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냥 그 소리만, 리듬만 들었어요!” --- p.105
네 녀석도 샤먼의 피를 이어받은 게 틀림없네. 피의 리듬, 근육의 리듬까지 들을 수 있다니, 내 여태껏 살면서 그런 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p.106
“우리 아비는 조선 사람, 우리 어매는 코랴크 사람이었네. (...) 난 야생 불곰 같았어.”
“그럼 언제 거길 떠나오신 겁니까?”
등산객이 물었다.
“다섯 살 때 떠나왔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릴 버리고 사라진 조선인 아비를 찾겠다고, 어매가 날 데리고 캄차카를 떠났지. 우린 툰드라를 걷고, 숲을 걷고, 걷고 또 걸어 바다에 다다랐네. 거기서 배를 타고 사할린으로 건너갔지. 조선인 아비가 사할린으로 갔다고 들었거든. 하지만 아비는 찾지 못했네.” --- p.124
비보이 공연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즐거운 흥분에 내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저기 무대에서 구르고 있는 아이들보다 내가 더 흥분했을 게 틀림없었다. 사방에서 리듬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힙합 음악의 빠른 비트, 춤추는 아이들의 몸속에서 생생하게 움직이는 근육의 리듬, 구경하는 사람들이 음악과 춤에 맞춰 질러대는 추임새 소리, 그리고 내 심장으로 피가 들고나는 리듬……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p.144
“다 죽고 혼자만 남으니 어땠을 것 같나? 온 산에 홀로 남겨지니 어땠을 것 같아? 죽고 싶었을까? 먼저 간 어매, 아배를 따라가고 싶었을까? 천만의 말씀! 도리어 간절하게 살고 싶어지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류가 좍좍 흐를 만큼 강렬하게, 처절하게,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다는 생각이 날 후려치고 또 후려치더군. 뭐가 뭔지 암 것도 몰랐지만, 난 살고 싶었어. 산이 무엇이든, 세상이 무엇이든, 내가 무엇이든 그딴 건 상관없었어. 선이고 악이고 필요 없었어. 그냥 단지 살고 싶었어. 미치게 살고 싶었지. 그렇게 난 살아남았다. 에구구, 그게 벌써 육십 년이나 지난 옛일이구나. 그때 내가 아마 고수 네 나이쯤이었지?” --- p.163
“고수야, 사람은 꼭 맞서 싸워야만 할 때가 있다. 길거리에서 못된 놈들을 만나거나 산에서 멧돼지를 만나면 싸워야지! 살아남기 위해선 싸워야만 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이 있으면 맞서 싸워야 하지. 그대로 당하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남으려 애써야 하는 것이거든. 어쩌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매 순간 싸움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싸움에는 언제나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해도 된다는 건 아니야. 혼자만 살겠다고 남을 밟아 뭉개거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짓을 해서는 안 돼. 싸우되, 잘 싸워야 한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니 그래야만 한다. 너도 무술을 배우면 오히려 아무나 마음대로 팰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거다.”--- p.238
“히로!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고수가 진짜 싸움을 시작한다고!”
--- p.2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