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전제들을 향해 질문하도록 도와주려고 합니다.” 그의 목표에 대해 물었을 때 촘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전제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다들 하는 옳은 말 중 아무것이나 붙잡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서 시작해보십시오. 그 자체로 타당한지 검토하십시오.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향해 질문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십시오. 사물을 꿰뚫어보기 위해 스스로 생각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정보는 많습니다. 당신은 이미 판단하고, 평가하고, 다른 것과 견주어 비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사실 당신은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를 믿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뭔가 중요하고 명백한 것이 있다 해도, 덥석 믿지는 마십시오. 더더욱이 무언가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일단 믿지 말아야 합니다. --- p.76
영화와 사진 속에 등장하는 전쟁의 이미지는 대부분 심장이 뛰는 공포, 코를 찌르는 악취,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음, 고통에 찬 비명, 전쟁터의 피로감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전투의 제1요소인 혼란과 무질서를 아름다운 전쟁 서사로 둔갑시킨다. 전쟁을 포르노로 만드는 것이다. 특히 전쟁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는 군인이나 해병들은 맥주를 박스째 사다 놓고, 전쟁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플래툰〉같은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서 묘사되는 강력한 무기들을 논하며 흥겨운 시간을 보낸다. 그렇지만 폭력의 실상은 그와 다르다.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것은 아무 의미도, 쓸모도 없다. 미래조차 없다. 죽음, 고통, 파괴 말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 것이다. 전투 장면과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던 전쟁 기록들이 그 실상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전쟁을 만드는 자들의 하녀인 국가와 언론은 전쟁의 효과를 감추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만약 우리가 진짜 전쟁을 본다면, 전쟁이 젊은이들의 몸과 마음에 무슨 짓을 하는지 본다면, 더는 전쟁을 신화화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으깨어져 죽은 아프가니스탄 소녀 옆에 서서 그 부모가 통곡하는 것을 듣고 있어야 한다면,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떠들어댔던 상투적인 표현들을 다시는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다. --- pp.105~106
세인트루이스 외곽에서는 독일 태생의 광부 로베르트 프래거가 500여 명의 군중에게 둘러싸인 채 폭발물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고 추궁당했다. 그는 해군에 입대하려고 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광부가 된 노동자일 뿐이다. 벌거벗긴 채 미국 국기에 묶여 맨발로 끌려다니다가 길바닥에 나뒹굴었고, 환호하는 군중에게 집단 폭행을 당해 숨졌다. 이 집단 폭행을 주도한 자들에 대해 재판이 열렸는데, 그들은 빨간색, 하얀색, 파란색 리본을 두르고 나왔다. 변호인들은 그 일이 정당한 ‘애국적살인’이라고 주장했다. 배심원들은 무죄 평결을 내렸는데 판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25분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 재판이 “비록 집단 폭행 같은 과도한 모습이 있긴 했지만 그 자체만 보면 나라 전체적으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건강한 일”이라고 보도했다. 프래거가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었던 그 폭탄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 p.146
〈요람은 흔들리리라〉에서사용된 것과 같이 돈줄을 막아버리는 검열은 검열자들이 선호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연방극단프로젝트에 의해 시작된 이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기업 국가가 부상하면서 극단과 공연을 지배하는 데 사용되어왔다. 반면 여타 진보적인 기관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말하거나 쓰지 않는 고분고분한 자들에게는 금전적 보상을 주는 것이다. 4년의 활동 기간에 연방극단프로젝트는 예술을 엘리트들이나 하는 것,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보던 수많은 이들을 끌어들였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롭고 의지할 수 있는 형식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파워 엘리트들이 노동자 계급에 허락하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 있는데 바로 현실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것이었다.---p.168
대학교수, 초·중등학교 교사 또는 공공 부문 종사자들 등에 대한 대규모 해고는 대체로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빨갱이’로 의심되는 이름들은 FBI의 ‘책임 프로그램’ 아래 학교 담당자와 관리자에게 주기적으로 전달되었다. 그 사람의 해고 여부는 전적으로 해당 기관의 손에달려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해직자들은 해고 사유라고 할 만한 것들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상태로 대부분 갑자기 잘려나갔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사실상 자신의 전문 분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슈레커는 이런 식으로 쫓겨난 사람이 1만에서 1만 2,000명가량이라고 추산했다.---p.189
대학과 마찬가지로 언론에서도 현안에 거리를 두고 사는 태도가 필요하다. 언론 또한 대학처럼 현실에 무관심하고 특정 당파를 지지하지 않는 관찰자인 척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남미, 중동, 발칸 반도에서 전쟁을 보도하던 이들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감정을 느끼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회의 시간에 엘살바도르 암살단의 극악무도함에 대한 분노,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의 죽음에 대한 추도의 마음,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병사들이 보여주는 포악함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기자에게 이로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데스크가 정서적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다시 써 오라고 기사를 퇴짜놓거나 아예 다루지 말라고 요구할 것이다. 회의실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은 공정성과 객관성이 모자란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자신의 감정을 속인 채, 아무리 끔찍한 범죄를 보더라도 냉정한 관찰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 그것이 기자의 자세이고 나와 동료 언론인들이 그렇게 지냈다.---p.223
“그들은 여전히 그런 부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보도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하면서 말이죠.” 션버그는 [뉴욕타임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보도해서는 안 될 이야기들이 목록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걸 덮기 위해 돈을 쓴다는 거죠. 주류 언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 있기보다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지만 신문은 냄비 받침으로만 필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신문의 역할은 민주주의의 발전에서 대단히, 대단히 중요합니다.”---p.256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눈에 보이는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저항을 어렵게 한다. 저항은 가시적이고 즉각적이며 실천적인 것에서, 비결정적이고 형태가 없는 것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저항을 멈추는 것은 영혼과 지성의 죽음을 뜻한다. 그것은 전체주의적인 자본주의의 비인간적 이데올로기에 항복하는 것이다. 저항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우리의 존엄을 유지해주고 다른 이들, 우리가 만나본 적도 없는 이들에게 이미 우리가 통과한 불길을 거쳐 갈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 준다. 부가가치세를 거부하는 것이든, 토빈세 도입을 위해 싸우는 것이든, 신고전주의 경제학 패러다임에 맞서는 것이든, 기업의 계율을 뒤엎는 것이든, 인터넷에서 세계인들의 지지 투표를 받는 것이든, 트위터를 이용해 신자유주의 질서에 대항하는 연쇄 작용의 촉매를 던지는 것이든, 그 모든 저항의 행위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우리는 저항해야 하고 그 저항이 가치 있는 행위임을 믿어야만 한다. 우리의 공동체가 우리를 정신적으로 또 물질적으로 유지해줄 것이다. 그것이 저항하는 삶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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