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 이지누의 폐사기 답사기 충청편

이지누 | 알마 | 2013년 01월 1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0 리뷰 1건
베스트
역사와 문화 교양서 top100 1주
정가
22,000
판매가
19,800 (10% 할인)
구매 시 참고사항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1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353쪽 | 542g | 164*208*30mm
ISBN13 9788994963662
ISBN10 899496366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1장 보령 성주사터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생활하며, 교사巧詐한 마음을 버리는 것, 이것이 수도하는 사람의 행동에 가까울 것이다. 그 말은 분명하니 그대로 따르고, 그 뜻은 오묘하니 그대로 믿으라. 도道를 부지런히 행할 뿐 갈림길 속의 샛길은 보지 마라.(낭혜화상)_21쪽

그렇게 다섯 시간, 정오가 가까워올 무렵 이윽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곤 눈이 쏟아졌다. 눈보라였다. 그토록 간구하던,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눈보라 말이다. 갑자기 들이닥친 눈보라는 모질었다. 그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건 말건, 사진기 렌즈에 눈이 쌓이건 말건 개의치 않았다. 장갑조차 끼지 않은 손은 떨어져나갈 것처럼 아렸지만 쏜살같이 주춧돌로부터 석등에게로, 석등에게서 탑에게로 그렇게 절터를 쏘다녔다. 바람도 미쳤고 나도 미친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버린 듯 눈보라가 점점 거세질수록 더욱 신이 났다. 몸은 잔뜩 웅크렸을지언정 마음만은 환하게 열렸기 때문이다. 얼굴로 들이닥치는 눈에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절터에 우뚝한 탑들이 재빠르게 스쳐가는 눈발에 에워싸인 모습을 말이다._23~24쪽

낭혜화상의 구도행은 당시 신라 하대를 관통하고 있던 보수와 개혁사상 모두를 두루 섭렵하며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화엄과 북종선 그리고 당나라에 가서 남종선의 홍주종을 익혔으며, 어린 시절에는 유가의 경전까지 읽었으니 이야말로 원융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진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더구나 그는 어느 한 곳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지금 현재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해서 다른 것들을 폄훼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마음에 모두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성주사터는 그런 그가 신라로 돌아와서 중창불사를 일구어 다시 도량을 일으킨 곳이니 그 아니 아름다운 곳이겠는가._35쪽

2장 서산 보원사터
감은사터 3층석탑이 자연을 상대로 농사를 짓느라 잘 다져진 몸매를 가진 시골 농부의 모습이라면 이곳의 5층석탑은 피트니스 클럽을 다니며 가꾼 도시인의 몸매와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몸체에 화려한 사자상이나 팔부신장八部神將까지 새겼으니 그 아니 아름다울 수가 있겠는가. 그는 절터를 찾은 순례자들을 단숨에 자신 앞으로 모이도록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섬세함에 이어 부드러운 포용성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다. 크기 또한 크다. 찰주刹柱로부터 지대석까지 그 높이가 대략 10미터에 달하지만 어디 한 곳 흐트러짐이 없다. 그 기묘한 안정감은 탑을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크기를 인지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탁월한 비례의 구현에서 나오는 것이다._80쪽

살면서 겪어본 바로는, 나와 다른 무엇을 내치거나 외면하는 것은 쉬웠지만 그것을 아우르고 머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욱이 그것에 정치적인 입장이 개입되면 더더군다나 어려운 일이다. 그처럼 쉽지 않은 일을 도모하고 실천에 옮긴 탄문의 생각은 1,000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것이 불교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건 아니면 개인의 삶에서건 말이다. 나와 다른 너가 있기에 세상은 유지되고 발전하며 미처 내가 헤아리지 못하던 것으로까지 확장되는 것이거늘, 돌이켜보면 나는 또다른 너를 인정하기에 인색하기만 했던 것 같다. 부끄러운 일이다._94쪽

3장 당진 안국사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려 당시에도 스님이 되는 과정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요즈음도 한때는 출가에 따른 나이 제한이 있었지만 당시는 아주 어린 나이여야만 했다. 완전하게 스님으로 인정을 하는 구족계를 받는 나이가 대개 20세를 전후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사미의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사미 시절을 3년에서 5년 정도로 보면 15세 전후가 출가를 할 수 있는 한계라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어린 나이에 머리만 깎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공인하는 사원에 들어가 수계를 받아야만 했다. 또한 수계를 받을 수 있는 사원은 관단사원官壇寺院이라고 했으며, 나라 안에 스무 곳 정도가 있었으니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만 스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_126쪽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소금의 관리 자체를 사찰에 맡겼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미 밝혔거니와 이곳은 개경과의 거리가 하루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곳일 뿐더러 소금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곳이었기에 보다 효율적인 관리의 필요성이 요구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생각하는 것이다. 안국사安國社가 소금의 생산과 관리를 감독하는 관청이었거나 그것을 보관하는 창고의 역할을 했던 곳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더불어 그곳이 지금 내가 있는 이곳 안국사터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는 것이다._129쪽

미륵의 하생을 바라던 매향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는 아무래도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어수선한 시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말선초의 역사적 전환기와 맞닥뜨린 민중들은 불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고, 더구나 바닷가에 출몰하던 왜구에 의한 약탈이 잦아져 경제적으로 피폐해지는 것은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을 것이다. 그런 현실에서 민중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미래였을 뿐 현실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미륵은 구세주로서 민중들 속에 자리 잡았으며, 민중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보다 더 나은 미래를 예비하려 매향을 했던 것이지 싶다. 미륵이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와주기를 기원하며 비로소 그가 펼쳐놓을 용화세계에 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토록 지극한 마음을 천년이나 묵어야 침향이 되는 향목으로 표현했으니, 이는 자신의 당대에는 소용없는 일이었지 않은가. 하지만 그 막막한 행위를 하면서라도 현실의 고통을 이겨내려 애를 쓸 수밖에 없었던 절실한 마음, 이 얼마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일인가. _140~141쪽

4장 제천 사자빈신사터
어디인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이곳 사자빈신사터는 내가 비장해두고 삼매에 드는 절터다. 그렇지만 찾을 때마다 내가 들었던 삼매는 화엄삼매이거나 해인삼매 혹은 사자분신삼매와 같이 거룩한 것은 아니었다. … 내가 든 삼매는 그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일 뿐이었다. … 그래도 내 마음 속에 하나 이루고 싶은 삼매는 있었다. 그것은 툭하면 세상과 사람에 대해서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는 나를 스스로 화쟁시킬 수 있을 무쟁삼매였다. 그것은 언제나 그리운 것이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탑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 언저리를 맴돌며 삼매에 젖으려는 까닭이 말이다._157~158쪽

살면서 이렇게 비장해둔 장소 한 곳쯤 가지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더냐. 문득 고개 들어 바라본 절터, 가릉가 숲의 일광동산이 따로 있을까 싶었다. 햇빛 무량하고 무성한 꽃잎 흩날리는 이곳이 바로 그곳 아닐까. 머리에 탑을 이고 있는 네 마리 사자가 가릉가 숲에 있던 사자좌이며, 그 안의 인물상이 비로자나마니왕장사자좌에 앉아 계신 사자빈신비구니로 여기는 것이 확증 없는 나의 심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사 그것이 미술사에 대한 나의 심각한 오류일지라도 엇나간 생각을 바로잡을 마음이 없다. 그는 내가 갈길 잃고 헤매던 시절 이곳에 깃들면, 잊고 있던 길을 일러준 선지식이었다. 그러니 선재동자가 만난 사자빈신비구니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그로부터 길을 구했으며, 삼매로 허튼 망념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고, 분별심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깨우치지 않았는가. 그로부터 나의 모든 숨구멍이 활짝 열리고 편협하지 않은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그윽하게 바라볼 힘을 얻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토록 나의 사자빈신비구니인 것이다._184쪽

5장 제천 월광사터
수선스럽기 짝이 없었다. 새벽녘부터 잠시도 고요함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바람은 뭉툭했고, 계곡물은 거칠게 쏟아져 소란스러웠다. 고즈넉함을 상상하며 송계계곡을 걷기 시작했건만 오히려 심란해지기만 했다. 간밤의 모진 추위를 견디지 못한 나뭇잎들이 맥없이 떨어져 제멋대로 뒹굴고, 간혹 바람이 잦아들어도 나뭇잎들은 제풀에 지친 꽃잎마냥 그렇게 길섶에 떨어져 번잡함을 더했다.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낙엽들의 소리가 시끄러울 수 있다는 것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도시가 아닌 고요한 산속에서 이를 맞닥뜨린 것은 뜻밖이었다. 바짝 마른 낙엽과 태생부터 딱딱하며 건조한 아스팔트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는 도시에 비해 더더욱 날카로웠다. 그 날카로움과 수선스러움이 새벽부터 나의 모든 촉수를 곤두서게 만들어놓았으니 서둘러 산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_192쪽

고려 태조가 선승을 포섭하고 이들을 주지로 파견한 것은 탁월한 국가경영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더욱이 남한강을 중심으로 고려 태조에 의해 주지로 임명된 선승들은 태조와의 관계를 내세우며 주석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곤 왕건의 모든 정책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호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왕건과 선승들이 주고받은 다분히 정치적인 행태가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충주 유씨가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지역은 제쳐두더라도 이곳 월광사를 중심으로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충주 유씨는 고려 전기의 정치권은 물론이거니와 불교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호족세력이다.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유긍달의 딸이 918년, 태조 왕건의 제3왕비인 신명순성왕태후가 됨으로써 강력한 권력을 지닌 지방세력으로 등극하고, 중앙정부의 정책에까지 간섭하는 왕실의 외척세력으로서 성장했던 것이다._201~204쪽

이 숲 속에서 곰곰 생각해보니 소리를 듣는 것인지 아니면 소리를 보는 것인지 스스로도 헛갈린다. 잠시 듣는 소리는 아름답지만 반복되는 소리는 짜증을 동반하고, 잠시 보는 낙엽 떨어지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되풀이되는 모습은 식상해 눈길조차 가지 않는다. 그러나 소리란 오묘한 것이어서 소리를 듣고 바로 돈오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는 이런 사례가 더없이 많지만 우리 스님으로 대표적인 분은 한낮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이루어 오도송을 남긴 청허 휴정(1520~1604)이 있다._208쪽

6장 충주 미륵대원사터
사과나무 밭 속에 고즈넉이 계신 관음원의 반가사유상은 하늘재 마루로부터 내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언제나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앞에 다가가면 그윽한 미소로 맞이해주었으니 홀로 걷는 순례자 또한 그 앞에 서면 절로 미소 머금은 채 눈인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른쪽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에 올려놓은 채 도톰한 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쪽 다리는 왼쪽 무릎께에 올려놓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의 고졸한 자태가 발산하는 매력은 치명적이다. 오늘과 같이 햇빛 무량하게 쏟아지고, 사과꽃 하얗게 피어나는 봄날이면 종일 그 곁을 떠나지 못한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다. 어느 날은 낮잠을 즐기기도 했고, 또다른 날은 종일 그 곁에서 책을 읽었는가 하면, 지인들과 함께한 날은 그곳이 근사한 다실이 되기도 했었으니까 말이다._230쪽

사실 이 고개는 나라 안에서 가장 먼저 뚫린 큰 고갯길이다. 비록 그 높이는 525미터 남짓하지만 신라의 제8대 왕인 아달라왕이 156년 4월에 북진을 위해 개척한 길이다. 아달라왕은 계립령을 개척한 이듬해인 157년에는 충북 단양과 경북 풍기를 잇는 죽령을 개척했으니 이는 다분히 전쟁을 위한 침략로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두 고갯길 모두 경북지방에서 충청지방을 향하고 있으며, 소백산맥을 넘는 길이기에 소백산맥의 남쪽을 고개의 남쪽, 곧 영남한 것이다._234쪽

키 큰 그를 바라보면 볼수록 오히려 낮아 보였을 뿐 높아 보이지는 않았다. 비록 위에서 내려다볼지언정 그것은 눈높이에 불과했다. 그는 도리어 그를 찾아오는 사부대중들과 마음 높이를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넓었다. 물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넓어지지 않던가. 겨우 바늘과 같거나 콩알만 하던 빗방울이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닿으면, 이내 개울을 이뤄 낮은 곳으로 흐르고 강이 되고 이윽고 바다를 이루지 않던가.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미륵부처님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낮아지면 넓어지고, 높아지면 좁아지는 것이 비단 물뿐이겠는가. 마음 또한 그와 다르지 않으니, 낮추면 낮출수록 포용력은 넓어지고 헤아림은 깊어질 터다. 하지만 범부가 그 마음을 갖추기란 만만치 않으니, 오! 미륵이여, 부처여._253쪽

7장 충주 숭선사터
숭선사는 고려의 제4대 왕인 광종이 태조의 세 번째 비인 어머니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954년 4월에 세운 곳이다. 동기야 어찌됐건 또 신분이 왕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절을 짓는다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그것은 절이라는 유형이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식의 마음이 발현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예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부모를 위해 절을 짓기는 하나 양친 모두를 위해 짓는 경우는 드물었다. 더구나 아버지만을 위해 짓는 일은 더욱 희귀하다. 거개의 아들들이 양친을 함께 모시거나 아니면 어머니 혼자만을 위해 절을 지었다._261쪽

광종이 개경에 창건한 봉은사와 불일사 그리고 충주에 창건한 숭선사는 모두 부모를 위한 사찰이며 어머니를 위한 사찰이 불일사와 숭선사 두 곳이나 된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어머니의 원당인 불일사를 창건한 지 불과 3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다시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을 창건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이는 충주 유씨의 힘이 작용했거나 왕실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척으로서 충주 유씨를 무시하지 못한 결과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불일사는 수도인 개경에 세워졌으므로 논외로 하더라도,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숭선사는 주목할 만하다. 숭선사터는 광종 어머니의 고향인 충주로 들어서는 들머리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곳은 충주는 물론 경기도 이천, 장호원, 죽산지역과의 소통 또한 원활한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지역에 사찰을 세웠다는 것은 왕권강화와도 통하는 대목이다. 난립하는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잠재울 수 있는 유효한 방법으로 가장 강력한 호족세력과 연대하는 정책을 폈을 것이기 때문이다._267~268쪽
8장 충주 청룡사터
목은은 환암이 스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존경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며 언제나 예를 갖췄다. 그것이 반드시 환암스님보다 8년 아래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시에서 ‘늙어서 글자를 뒤쫓고 있다’는 것은 늘그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불법에 대해 깨닫게 되어 불경을 읽고 있다는 뜻이다. 그 스스로 대유라고 해도 모자랄 것이 없는 목은이 환암을 향한 시에서 겸양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목은이 환암에게 보내거나 그를 생각하며 쓴 시들은 대개 진한 그리움이 묻어 있으며, 한 줄 문장들이 모두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주눅이 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말이나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근신일 뿐이다.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이야말로 불과 유를 가리지 않는 큰 사람의 모습을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청룡사터는 그곳에 닿기도 전에 이미 아름다운 곳이다. 구태여 석조 유물에서 비롯되는 미술사적 논의를 펼쳐놓지 않더라도 말이다._297~299쪽

그러나 오늘, 내가 비장해둔 나만의 장소에서 청룡사터를 지워버리고 말았다. 몹시 아쉬운 노릇이긴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CCTV 때문이었다. 탑비전에 올랐으니 평소처럼 석등과 탑 그리고 탑비를 어루만지고 파란 철책 안을 서성이다가 탑비전 앞의 상수리나무를 바라봤다. 어딘가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잔인한 눈동자 두 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으며 빤히 쳐다보고 있는 눈은 퉁방울눈보다도 더 컸지만 무서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반경 안에 들어가면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모두 기억하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눈이었다.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이미 나의 몸과 마음에 충만하던 자유는 허물어지고 말았다._307쪽

그때 깨달았다. 사랑이 깊으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그 무엇을 한들 그가 드러나기보다 나 스스로가 드러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일 뿐 결코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이 글 전체에 걸쳐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환암스님과 목은의 우정은 마음속에 침잠해 있는 것일 뿐 결코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목은은 환암의 겉모습에 대해 한 줄도 쓰지 않으면서 오히려 화상 찬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목은이 환암을 생각하거나 환암이 목은을 생각하는 마음이 발효되어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자연스러운 글쓰기였던 셈이다._315쪽

9장 충주 김생사터
새벽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절터 한쪽에 하얀 배꽃이 피었을까 염려스럽기도 하고, 절터를 가로지르던 흉물스러운 고가도로나 강 위로 놓이던 다리는 어느 정도 공사가 진척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부방 의자에서 선뜻 일어서지 못한 채 잠을 설친 까닭은 반드시 그런 걱정 때문만도 아니었다. 날이 밝으면 금강저와도 같이 단단한 글씨를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그 글씨를 썼던 사람이 머물렀던 곳을 거닐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이 가득 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해동신필 혹은 해동서성이라고 불리던 그가 쓴 것일지도 모르는 탁본 한 조각이 공부방 책꽂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으니 밤새 뒤척일 수밖에 없었다. … 허목이 말하는 그는 온갖 칭송을 다해도 모자랄 만큼 뛰어난 솜씨를 지녔던, 왕희지보다 글씨를 잘 쓴 인물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후에 머리를 깎고 불문에 들어선 스님이 되었다고도 전하는 그는 누구일까. 바로 김생(711~791)이다._324~327쪽

여러 많은 이야기들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글씨를 써서 집의 수평을 맞춘 이야기다. 이규보에 따르면 김생이 안양사 편액을 썼는데, 몇 년이 지나자 그 편액을 건 집이 남쪽으로 기울어졌다고 한다. 이에 곧 김생에게 청해 집 북쪽에 글씨를 쓰게 하니 그후 집이 도로 반듯해졌다는 것이다. 또한 한번은 그가 청룡사의 편액을 쓴 뒤 그곳에 구름과 안개가 항시 꼈다고 하니 과연 그는 신필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두 곳, 안양사와 청룡사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막연하다. 김생이 글씨를 썼다면 그의 생존 당시에 이미 번성했던 사찰일 것이다. 안양사는 짐작컨대 금주m f, 곧 지금의 경기도 안양에 있었던 사찰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분명치는 않다._336~337쪽

갑자기 다산에게도 엘리트 의식이 충만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교의 글씨는 꿈틀대는 용처럼 헌걸차고 기세가 있지만, 김생의 글씨는 백성들의 계약서나 써줄 만큼 볼품없는 글씨임에도 헛이름만 난 꼴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다산에게 엘리트 의식이 있었지 싶은 것은 굳이 그의 시에서 원교가 한림학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원교에 비하면 김생은 부모가 미천해 그 세계를 알지 못하는 천민 출신이 아니던가._341~342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1건) 회원리뷰 이동

한줄평 (0건) 한줄평 이동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무료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절판 상태입니다.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