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오로지 성적에 의한 경쟁논리로 아이들을 쥐어짜다 보면, 인성이 파괴되고, 그 피해는 결국 우리나라 사람 전체의 인간성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경쟁주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은연 중 가치 없는 사람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 경쟁주의 특징이 승자와 패자를 확실히 나누는 거잖아.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진 사람을 지배해도 좋고, 진 사람은 이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당하고. 이기는 것만 강조하는 경쟁교육은 친구를 보살피거나 도와줘야 할 사람이 아닌 이겨야 할 대상으로 보게 하잖아? 요즘 학교 폭력 문제로 학교가 시끄럽잖아? 여러 가지 원인이 지적되고 해결책이 제시되고 있지만, 문제는 경쟁주의에 있어. 경쟁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학교 폭력 문제는 해결될 수 없어. 폭력이 뭐야?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잖아. --- 본문 중에서
2012년 8월31일 나는 학교를 떠났습니다. 24년 2개월 동안 근무한 학교였습니다. 고등학교에서 4년 중학교에서 20년. 그동안 해직과 숱한 경고 인사조치 등으로 열세 학교를 옮겨 다녔습니다.
명예퇴직으로 학교를 떠나면서 나는 나의 지난날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동안 내 삶을 압축해 표현한다면 다음 세 단어일 것 같았습니다.
‘운동 · 문학 · 청소년’
운동은 제가 교사로서 한 교육운동을 말합니다. 그리고 문학과 내가 만난 아이들.
운동과 문학은 늘 내 안에서 갈등하면서 충돌했습니다. 한때 운동은 문학에게 ‘반역의 언어’가 되도록 충동하기도 했습니다. 시대 상황이 그렇게 강제했던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 시대 문학은 거칠었고 쇳소리가 났으며 불에 그을린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그렇게 10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그러다 운동을 뒤로 하고 문학에만 전념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말을 새로 공부하고 문학다운 문학을 하려고 나름대로 애썼습니다. 운동하면서 몸에 밴 진정성, 인간과 사회 변혁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새벽마다 일어나 글을 썼습니다.
그런 어느 날, 내 안에서 행복한 질적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대립 관계에 있던 운동과 문학이 행복한 만남을 이룬 것입니다. 청소년문학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쌓아 온 경험, 10년 이상 새벽에 일어나 끈질기게 매달려 온 문학적 수련, 그리고 운동하면서 형성된 인간과 사회와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더 이상 돌멩이처럼 덜그럭대지 않고, 내 안에서 고운 모래처럼 청소년문학이라는 한 그릇에 담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하여 첫 작품으로 『이빨 자국』을 썼습니다. 두 번째로 『싸움닭 샤모』를 썼고요. 그리고 이 책 『불량아이들』이 세 번째 써 내는 청소년 소설입니다.
『불량아이들』은 내가 만난 아이들의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나의 학창시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와 내가 만난 아이들. 한 세대를 뛰어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가정도 학교도 사회도 참으로 많은 것들이 아찔할 정도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경쟁 사회라는 것, 학벌 중심 사회라는 것, 점수에 의해 아이들은 등수가 매겨지고, 경쟁 없이는 발전도 없고, 세상은 적자생존이며, 약한 자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살벌한 논리가 예나 지금이나 우리들의 의식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제아라는 아이들도 따지고 보면 입시 경쟁 교육이 낳은 ‘괴물’들인 것입니다. 공교육 붕괴니 학교 폭력이니 하는 문제의 원인으로 여러 진단과 처방이 나오고 있지만, 문제의 핵심은 날로 격화되는 경쟁에 있다는 것, 경쟁 교육과 경쟁 사회가 변화지 않고서는 괴물들의 양산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을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였습니다.
나는 이 소설을 5년 전에 썼습니다. 우리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저 나름대로 작품을 통해 문제재기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쓰고 난 후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교사, 학생, 학부모, 일반 문인 등 15명 이상 분들에게 보여 주면서 소감과 지적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중 두 가지가 생각납니다.
하나는 중학생을 자녀로 둔 학부모(여)의 말입니다.
“어머, 요즘 애들이 정말 이래요? 말로 듣기는 좀 했는데, 정말 이렇구나.”
학부모는 좀처럼 소설 속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막된 세상에 막가는 아이들의 행태 정도로 느끼는 듯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중3 여학생의 말입니다.
“뭐 별거 아니네요. 소설에 나오는 애들이 다 집에서 학교 잘 다니고 있잖아요?‘
나는 여학생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놀든 어쨌든 그래도 집에서 학교 다니면 ‘범생이’라는 말. 그렇다면 이 학생이 말하는 이른바 요즘 ‘날라리’라는 애들은 어떤 식으로 놀까요?
기성세대라 할 학부모와 그 자녀에 해당하는 여학생 간의 시각차가 이렇게 컸습니다.
‘운동 · 문학 · 청소년’
지나온 나의 삶을 새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면, 앞으로 살아갈 삶 역시 이 세 단어의 연장선에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나는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학생을 직접 만나지는 않지만 세상이라는 좀 더 큰 교실에서 청소년을 위한 문학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불량아이들’의 겉모습은 거칠고 되바라지고 반항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열등감에 젖어 있습니다. 그들이 기성세대의 삶을 흉내 내며 눈에 힘을 주고 주먹을 을러대지만, 그들의 자존감은 매우 낮으며 내부에는 그들 나이에 맞는 여리고 섬세한 감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놓치지 말고 이 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결핍과 상처를 안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도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아이들이며, 그들 나름대로 성장의 아픔을 겪으며 하나의 인간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
그런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아이들을 단순히 싸가지 없는 놈이 아닌, ‘한 인간’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