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독자가 이 책을 읽고 '침묵 저편의' 숨죽여 우는 여성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 공감하고 좀 더 배려하게 된다면, 역자로서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 「옮긴이의 말」중에서
그녀의 내면에서 희미하던 어떤 빛이 분명해졌다. 그 빛은 하나의 길을 보여 주었지만, 이는 금지된 길이었다.
처음에는 그 빛이 그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 빛 때문에 에드나는 꿈을 꾸거나 생각에 잠겼고, 어두운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지난번에는 그 고뇌 때문에 한밤중에 펑펑 울다가 겨우 추스르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퐁텔리에 부인은 우주 속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자신이 자기 내면과 주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스물여덟 살 여자의 영혼이 깨닫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지혜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성령이 여성에게 보통 내려 주는 어떤 미덕보다 더 큰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시작, 특히 하나의 세계의 시작은 필연적으로 모호하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우며 극도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가운데 몇 명이나 이러한 시작을 이겨 내고 일어서는가! 얼마나 많은 영혼이 그 격렬한 혼돈 속에 스러지는가!
--- p.31~32
「본질적이지 않은 거라면 나도 포기할 수 있어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돈도 포기할 수 있고, 목숨도 바칠 수 있어요. 하지만 나 자신을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더 또렷하게 설명하긴 어렵군요. 이건 최근에 차츰 이해하고 깨닫기 시작한 거예요.」
--- p.102~103
이유는 모르겠지만, 매우 행복한 시절이었다. 완벽한 어느 남쪽 바닷가에서 보낸 날의 호사스러운 따뜻함과 햇볕, 색깔과 향기가 자신의 존재와 온통 하나가 된 듯하자, 에드나는 살아 숨 쉬는 것에 감사했다. 그럴 때면 혼자서 알지 못하는 낯선 곳을 즐겁게 찾아다녔다. 꿈꾸기 좋은 양지바르고 나른한 구석을 여러 군데 찾아냈다. 그리고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꿈을 꾼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한 날들도 있었다. 그럴 때면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인생이란 기이한 아수라장 같고, 피할 길 없는 종말을 향해 맹목적으로 꿈틀꿈틀 기어가는 벌레와도 같았다. 그런 날이면 에드나는 그림을 그릴 수도 없었고, 맥박이 뛰고 피를 뜨겁게 하는 공상을 할 수도 없었다.
--- p.123~124
「여자가 사랑하는 이유를 알면서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하세요? 사랑할 사람을 고르던가요? 마음속으로 [저 사람한테 가! 저 사람은 대통령이 될 만한 유능한 정치인이니 저 사람이랑 사랑에 빠져야 해]라고 생각하는 줄 아세요? 아니면 [명성이 자자한 이 음악가한테 내 마음을 줄 거야]라거나 [세계 금융 시장을 주무르는 이 금융가가 좋겠어]라거나?」
「일부러 제 말을 왜곡하는군요, ma reine(여왕 마마). 로베르를 사랑하세요?」
「물론이죠.」 에드나가 말했다. 처음으로 이 사실을 인정하자, 에드나의 얼굴이 화끈거리며 군데군데 붉어졌다.
「왜죠?」 그녀의 친구가 물었다.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인데, 왜 그를 사랑하죠?」 에드나가 무릎으로 기어 라이즈 양 앞으로 다가왔다. 라이즈 양은 에드나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왜냐고요? 그 사람 머리카락은 갈색이고, 관자놀이 옆으로 자랐으니까요. 그 사람이 눈을 떴다 감았다 깜빡이고, 코는 약간 삐뚤어져 있으니까요. 입술이 두 개고 사각 턱이며, 어릴 때 야구를 너무 열심히 해서 새끼손가락을 똑바로 펴지도 못하니까요. 왜냐하면…….」
--- p.170~171
「글쎄, 가령 오늘 헤어질 때, 내 날개가 얼마나 튼튼한지 보겠다고 팔로 나를 안고는 어깻죽지를 만져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전통과 편견이라는 평원 위로 날아오르려는 새는 강한 날개를 가져야 해요. 약한 새들이 상처 입고 지쳐 날개를 퍼덕이며 다시 지상으로 낙하하는 모습은 서글픈 광경이에요.]」
--- p.174
에드나는 [비둘기 집]이 좋았다. 편한 가정집 분위기도 있었지만, 에드나가 스스로 그 집에 매력을 더해 집 안이 따뜻한 햇살처럼 환했다. 사회적 지위는 낮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만큼 높아진 기분이었다. 일상의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자기 존재가 더 강해지고 딛고 선 범위도 넓어졌다. 이제는 오로지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삶의 저변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자신의 영혼이 이끄는 대로 살 뿐, [세상의 평판을 의식하며] 사는 데 만족할 수 없었다.
--- p.209
「정말, 정말이지 바보 같은 남자군요. 퐁텔리에 씨가 나를 자유롭게 놔주는 그런 불가능한 일을 꿈꾸며 세월을 낭비하다니! 난 이제 퐁텔리에 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에요. 내 선택에 나 자신을 맡길 거예요. [로베르, 여기 있네. 이 여잘 데려가서 행복하게 살게나. 이제 그 여자는 자네 것일세!]라고 한다면, 당신네 둘 다 비웃을 거예요.」
--- p.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