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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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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루 1

: 화륜, 불꽃의 수레바퀴

[ EPUB ]
진해림 | 가하 | 2013년 02월 0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7.5 리뷰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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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2월 01일
이용안내 ?
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4.98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18.8만자, 약 6만 단어, A4 약 118쪽?
ISBN13 9788966475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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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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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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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진해림
인터넷 상에서는 류엘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역사로맨스 홍연, 창연, 흑루, 화인, 적루와 판타지 로맨스 카인의 연인, 마황의 연인을 출간한 작가.

둥지로 여기고 있는 로망띠끄와 줄리엣의 발코니 외에는 절대로 출몰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음. 부모님이 지어주신 본명에 근거하여 만들어낸 필명에 무한한 자부심을 품고 있으며 여덟 번째 소설 연풍(緣風)을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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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그는 알 수 없는 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 밖에서 흘러드는 것이 분명한 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여인의 음성이었다.
노랫소리에 가깝지만 아무런 가사도 없는 그 음성은 기묘한 울림을 품은 채 주변의 사물들과 공명(共鳴)하고 있었다. 여인의 소리가 계속될수록 수면의 흔들림이 깊어져갔고, 천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시끄럽군.’
모처럼의 휴식이건만, 누가 이 빌어먹을 힘으로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엄연히 그의 지배하에 놓인 물까지 건드리고 있다는 것은 대체…….
수면의 파동이 그의 심장에까지 전달된 순간, 천휘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검을 빼들었다. 촤악……! 거친 물보라가 일면서 투명한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에 베인 천 조각이 흘러내리면서 그의 눈 속에 한 여인의 모습이 비쳤다.
“……!”
열아홉, 혹은 스무 살 정도 되었을까. 황망히 얼어붙은 여인의 얼굴은 무척이나 빼어난 미모였다. 유리를 한 겹 입힌 듯 까만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은 흠뻑 젖은 채 가녀린 몸에 달라붙어 있었고, 새하얀 피부는 티 없이 맑았다. 꽃잎을 올려놓은 듯 붉고 고운 입술, 단정한 이마와 또렷한 콧날은 가히 절색이라 부를 만했다.
그러나 천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파르스름한 빛깔이 감도는 그녀의 눈, 그것은 그 어떤 흑옥(黑玉)보다도 맑고 고왔다.
바라보기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느낌, 그리고…… 시선이 마주친 순간부터 그의 오감을 자극하던 청명한 향.
무심히 여인을 응시하던 천휘는 이내 곧 그 향의 정체를 알아차렸고, 서늘한 입매를 비틀었다.
‘감응력(感應力)이군. 물이 동요한 것도 그 때문이었나.’
저가 느끼는 감정과 느낌을 다른 것에 옮겨 가며, 타인이 떠올리는 것을 저 또한 느낄 수 있는 힘. 아마도 눈앞의 여인은 짐작했던 대로 신궁에 속한 계집인 것이 분명했다.
천천히, 여인의 시선이 제 목을 겨누고 있는 천휘의 검으로 옮겨갔다. 그와 동시에 그를 휘어 감던 향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갑작스레 검을 뽑으신 연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거두어주시겠습니까.”
“싫다면?”
가차 없이 흘러나온 그의 답변에 여인의 눈이 다시 한 번 천휘를 향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여인은 자그마한 한숨을 삼켰다. 필경 그녀 또한 눈앞의 사내에게는 제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리라.
“이곳은 신궁의 영역이고 신녀들의 정결 의식을 위한 장소입니다. 수기를 지니신 분께 어울리는 곳은 아니니 그만 나가주세요.”
“과연, 썩어도 준치라더니 신궁의 이름에 그럭저럭 어울리는 짓을 하는군.”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모든 힘을 감추고 있었건만, 거기까지 느껴진 건가. 냉소 어린 표정을 떠올린 천휘는 그대로 검을 거두었다. 철컥, 둔탁한 소음이 흘러나오면서 물에 젖은 여인의 맨 어깨가 보일 듯 말 듯 움찔했다.
그가 무심히 돌아서려는 순간, 낮게 가라앉은 여인의 음성이 천휘의 귓가를 스쳤다.
“……자황지사(紫凰之事)로군요.”
찰랑, 천휘의 몸이 그 자리에 멈춰서면서 수면이 흔들렸다. 그는 얼음조각처럼 차디찬 눈으로 여인을 돌아보았고, 소름끼치도록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 대체 뭐라고 한 거냐.”
“이 눈으로 본 것에 대해 그대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저 또한…… 그 이상은 모릅니다.”
자황지사, 그것은 자색 날개를 지닌 봉황이 어릴 적 사냥꾼으로부터 입은 상처로 인해 다 자란 후에도 스스로 날지 못한다 여기고 땅에 붙어 있음을 일컫는 고사였다.
천천히, 천휘는 여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고, 그는 망설임 없이 여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하늘의 장난질 따위로 얻어진 능력, 함부로 써먹지 마라. 평생토록 귀하게 떠받들어져서 세상을 모르나 본데, 사람은 제 속을 읽는 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을 약하게 만들 수 있는 여지를 지닌 자라면 가차 없이 밟아버리는 것, 그것이 그가 알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기에.
천휘는 여린 새처럼 가늘게 헐떡이는 여인의 숨소리를, 거세게 고동치는 심장의 움직임을 즐기며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청명한 향이 그의 심장을 자극했고, 그는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처음에는 다소 거슬렸건만, 계속 느끼니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향기가 아닌가. 여인에게서 풍기는 체향을 역겨워했던 그였지만 눈앞의 여인이 뿜어내는 향은 제법 맑고 깨끗했다.
“설마, 누가 죽이려 들건 간에 하늘의 뜻이니 얌전히 죽어주겠다는 생각인 건 아닐 테지. 반항하지 않을 건가?”
“정말로 죽이시려면…… 진즉 그 검을 쓰셨을 테니까요. 지금 당신의 눈에는, 살기가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반쯤 숨이 막힌 와중에도 순순히 답하는 여인의 모습은 무척이나 젠장 맞았다. 신궁의 여인다운 고매함이 아니라 본래 타고난 천성이 그러한 거였던가. 좌우지간, 여러모로 눈에 거슬리는 여인이었다.
천휘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 순간, 그녀가 붉은 입술을 느릿느릿 달싹였다.
“감히 말하지만, 저주가 아니라 스스로를 얽어매고 계신 사슬에 불과할 뿐입니다.”
무척이나 크고 찬란한 날개를 지녔건만, 아직도 찢겨진 상처가 그대로인 줄 알고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저어하는 봉황……. 그 자황의 모습이 스스로와 같음을 알고 계시면서, 왜 모른 척 고개를 돌리시는 건가요…….
여인의 가느다란 음성은 고스란히 천휘의 뇌리로 파고들었다. 그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간다 싶은 순간, 차갑게 굳어져 있던 입매가 풀리면서 사내다운 울림을 품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 하하하……!”
어느 틈에 그의 품에서 벗어난 여인은 느닷없이 저 홀로 웃어대는 천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황야를 홀로 헤매는 맹수를 닮은 웃음 속에는, 짙은 공허함이 서려 있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감히 메울 수 없는 고독, 그리고…… 쉴 새 없이 마셔도 목마름을 채울 수 없는 바닷물처럼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
아마도 저 사내는 어떤 보물을 곁에 두어도 만족할 수 없으며, 제아무리 고운 여인을 품어도 결코 지금의 공허함을 떨쳐내지 못하리라.
일순, 천휘는 느닷없이 웃음을 멈추고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차디찬 칼날을 품고 있는 그의 눈은 할 수 있는 모든 비웃음과 잔혹함을 머금고 있었다.
“재미있군. 나조차 모르는 내 속을 읽어내는 자가 있을 줄이야. 그 눈에 보인 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궁금한 걸.”
천휘는 그대로 여인의 허리를 낚아채어 제 품에 끌어당겼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기를 감지한 그녀가 처음으로 몸부림치며 그를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어느 틈에 그의 의지에 동조해버린 물이 여인의 전신을 빈틈없이 에워싸고 있었다. 천휘는 여인이 어찌할 새도 없이 가냘픈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흐윽……!”
반쯤 억눌린 여인의 신음소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고왔다. 천휘는 냉기 가득한 손길로 여인의 매끄러운 몸을 탐하는 한편, 봉긋한 가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난폭하기 그지없는 그 움직임에 여인이 진저리를 치며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었다.
“그만……!”
천휘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던 물이 일시에 정지했다. 움직임을 멈춘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주변을 맴돌던 바람과 미미하게 흔들리던 나뭇가지마저 그대로 멈춰 섰고, 그와 동시에 여인의 몸이 금빛 섬광을 흩뿌리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놓쳤군. 감응력 외에도 또 다른 능력이 있었던 거였나.’
도성 안에서 대기 중인 광운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필경 창룡의 화신이고 나발이고 간에 지나가는 개나 주라며 한껏 그를 비웃으리라. 황제인 그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는 석이라면 마음만 먹는다면 절세가인이든 희대의 요녀든, 죄다 손에 넣을 수 있는 주제에 신력을 지닌 계집 하나 놓쳤다고 빈정거릴 터.
하지만…… 비로소 한운국에서 전리품으로 가져갈 만한 것을 찾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몸속의 피가 서서히 끓어오르는 것 같았고, 이 기분에 취한 채 마음껏 저들을 밟아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천휘는 텅 빈 제 손을 내려다보며 시린 웃음을 지었다.
‘조만간 찾아낼 테니 기다려라. 어디에 있건 간에 이 한운의 땅에 발 딛고 있는 이상, 반드시 찾아낸다.’
네가 본 자황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 한 번 그 빌어먹을 눈으로 확인해라. 나는…… 한 번 노린 사냥감을 결코 놓친 적이 없다.


파앗……! 신궁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궁주의 처소에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처소 안에는 궁주가 정결 의식을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신녀 두 명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녀들은 갑작스레 허공에서 나타난 여인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궁주.”
“잠시 자리를 물려주세요. 혼자 있고 싶군요.”
“하지만…….”
무어라 더 말하려던 신녀들은 궁주의 목에 희미하게나마 붉은 상흔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제야 반쯤 찢겨진 그녀의 옷을, 간헐적으로 떨리는 새하얀 손을 본 신녀들은 다급히 궁주를 향해 다가섰지만, 그녀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나는 분명, 나가라 했습니다. 지금 그대들이 내 명을 어기려는 것입니까.”
“아, 알겠습니다. 하면…… 후에 부르십시오.”
신녀들이 처소를 나간 뒤, 시란은 참고 있던 숨결을 내뱉었다. 이미 그녀 곁에서 멀어진 자건만, 왜 아직도 그 낯선 이국의 사내가 바로 옆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일까.
그녀는 욱신거리는 목덜미를 손끝으로 짚었다. 난생 처음으로 사내의 입술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불꽃에라도 데인 듯 연신 화끈거렸다.
강렬하기 그지없던 그 손길을, 비수처럼 심장에 박혀들었던 사내의 말을 상기한 시란은 눈매를 굳혔다.
‘용의 형상을 띄고 있는 수기…… 설마, 명륜인인 건가.’
얼음을 깎아놓은 듯 수려하고도 차가웠던 얼굴, 그리고…… 기묘한 광기와 섬뜩하기 그지없는 한기를 머금고 있던 눈. 시란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단지 짐작일 뿐이지만 그 정도로 강력한 수기를 지닌 자는 명륜 제국에서도 흔치 않을 터였다. 그녀가 그렇듯 모신의 피를 짙게 이어받은 혈족, 즉 창룡의 후예인 진씨 황족 정도 되는 자라면…….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가 뒤늦게나마 초경을 시작하여 다 자란 여인이 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대한 시기였다.
이제 사흘 후면 만월이 다가올 것이며, 반년에 단 한 번 신을 이 땅에 불러들이기 위한 모든 조건들이 들어맞는 순간이 돌아온다. 그리고 그때, 이 신궁 안에서 홍조의 강림을 위한 의식이 거행되리라.

- 잊지 마십시오, 궁주. 이것은 21년 전, 궁주께서 태어나신 직후부터 예견된 하늘의 뜻입니다. 저희는…… 궁주께서 성장을 마치시어 완전해지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비록 오라비와 누이의 결합으로 탄생된 존재라 하지만, 궁주께서는 그 어떤 역대 궁주들보다도 가장 완벽한 홍조의 혈족이십니다. 하늘이 궁주를 이 한운에 내려 보내신 까닭을 결코 잊지 마셔야 합니다…….
대신녀 유현의 음성을 떠올린 것도 잠시, 시란은 찢어진 옷을 끌어내렸다. 물에 젖은 옷이 흘러내리면서 희고 고운 몸이 드러났다.
같은 여인이 본다면 경외감과 시샘 어린 눈빛을 할 것이요, 사내라면 제아무리 마음이 굳건한 자라 하여도 정욕을 느낄 법한 여인의 알몸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눈처럼 새하얀 가슴과 그 위의 분홍빛 정점, 오목한 아랫배, 깊은 음영을 드리운 다리 사이의 은밀한 계곡이며……. 그러나 거울에 비친 제 몸을 응시하는 시란의 눈 속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닦자마자 궁주의 예복을 걸쳤고, 목덜미의 상흔이 보이지 않도록 잘 감추었다. 시란이 젖은 머리칼을 정돈하는 사이, 처소 밖에서 신녀들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흘러들었다.
“궁주, 대신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잠시 뵙자고 하시어서…….”
“드시라 하세요.”
그녀는 등을 돌린 채 거울 속에 비친 대신녀 유현을 응시했다. 여느 때처럼 궁주 앞에 예를 갖춘 유현은 시란의 표정 없는 옆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죽은 어미를 대신하여 때로는 혈육처럼, 스승처럼 이끌며 가르쳐온 아이였건만, 눈앞의 여인에게는 그 예전의 모습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항시 감정을 죽이고 신궁만을 위해 살아 숨 쉬라고 가르친 것은 그녀 자신이 아니었던가. 대신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시란에게 물었다.
“정결 의식은 잘 마치고 오셨습니까, 궁주.”
“……앞으로 세 번 남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혹여 제가 잊은 것은 아닐까 저어되어 오신 것이라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말의 감정조차 담기지 않은 그 말에, 유현이 천천히 한숨을 흘렸다. 대신녀는 실로 오랜만에 자신과 궁주의 신분을 잊은 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란아.”
“…….”
“네 이미 오래 전부터 의식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였음을 안다. 그렇기에 그 무엇에도 미련을 두지 않고 감정을 품지 않은 것이겠지. 하지만…… 네 엄연히 이 땅의 사람이자 하늘 아래 발 딛고 선 인간이거늘,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 마땅히 네 남은 목숨이 아쉬운 일이니, 그렇듯 애써 굳건한 척은 하지 마라.”
천천히, 시란은 고개를 돌려서 유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흐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슬프지도 않고, 아쉽지도 않습니다, 대신녀님. 제가 아니라면 제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께서도 조건만 맞아떨어지셨으면 기꺼이 하셨을 일이고…… 어차피 저는 탄생의 순간부터 그리 결정된 목숨이었습니다.”
“……그렇구나.”
후, 짧은 숨결을 토해낸 대신녀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시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다 낡은 면경과 곳곳에 녹이 슨 단도였다.
한눈에도 오래된 세월을 간직한 것이 분명한 물건들. 시란은 말간 눈으로 그것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전(前) 궁주였던 네 어미, 그 가여운 율하가 미쳐죽기 전에 품고 있던 물건들이란다.”
“……!”
신궁의 58대 궁주, 서문율하. 신궁 전체가 워낙 쉬쉬하며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려하는 이름이었기에 시란은 어미에 대한 말을 들어본 적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21년 전 해산한 이후 갑작스레 미쳐버렸으며, 차기 궁주의 신력 중 대부분을 봉인해버리고 신궁을 저주하기까지 했다던 여인. 전 궁주만 아니었다면 시란의 신력이 고작 감응력과 공간 이동에만 그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시란은 떨리는 손으로 어미의 유품들을 어루만졌다. 단 한 번도 마음 놓고 그리워하지 못하였으며,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조차 사치였던…… 어머니. 그녀의 무미건조하던 얼굴은 어느 틈에 처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적으로는 섬기는 분이었으되 사적으로는 벗이기도 했기에 내가 간직하고 있었단다. 언제고 간에 네게 전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만…… 그간 내 너를 엄격히 훈육하기에 급급하여 미처 전해주지 못하였구나. 지금이라도 이리 주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감사…… 합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개 숙여 대신녀 앞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어렸던 시란을 감싸 안고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으며, 조금이라도 더 신권을 손에 넣고자 하는 왕실에 대항하여 지금까지 신궁을 이끌어온 사람. 비록 궁주는 그녀였으되, 신궁을 진정으로 다스려온 이는 다름 아닌 대신녀 유현이었다.
엄격하고도 자애로운 보호자의 모습을 지우고 다시 대신녀의 모습으로 돌아간 유현은 시란 앞에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부디 마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궁주. 모든 것은 하늘의 뜻인 터. 궁주께서는 그저 하늘이 예비하신 바를 따르시면 될 것입니다.”
신의 이름을 잊어가며 하늘이 내려주신 도리와 땅의 섭리를 해하는 자들에게, 다시 한 번 모신(母神)을 이 땅으로 불러들인 궁주께서는 고귀한 빛이 되실 것입니다…….
대신녀가 처소를 나간 후, 시란은 오랫동안 전 궁주의 물건들을 응시했다. 지금의 그녀와 매우 흡사했다던 여인, 서문율하의 얼굴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그녀의 아비이자 어미의 오라비이기도 했다던 사내는…….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어미와 아비의 이야기를 떠올린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서로 다른 아비를 두었으되 전전대 궁주의 태를 함께 하였다던 두 아이. 신궁의 관례 때문에 여아는 차기 궁주로서, 남아는 한운의 왕족으로 자라면서, 서로가 제 혈족인 줄 모른 채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했던가.
그러나 남매의 마음은 엄연히 하늘의 섭리를 저버린 것이었고, 단 한 번의 실수로 잉태되었다는 아이 또한 사특한 관계에서 빚어진 죄의 씨앗이었다.
제 자식이자 조카이기도 한 아이가 그 어미의 뱃속에서 자라날수록 괴로워하던 오라비는 결국 스스로 목을 매었다. 정인이자 혈족인 사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누이 또한 아이를 낳은 직후, 미쳐버린 채 딸의 신력을 봉인한 뒤 죽어버리고 말았다.
처참하기 그지없는 사랑, 죽음으로밖에 매듭지을 수 없었던…… 결말. 신궁의 사람들이 소리죽여 수군거렸듯, 어미 아비 사이에 그녀가 생겨난 것은 한편으로는 축복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저주이기도 했다.
피가 비슷한 남매가 결합함으로서 탄생된 가장 완벽한 홍조의 혈족, 그리고…… 뱃속에 잉태된 순간부터 아비를 잡아먹고 그 어미마저 미치게 만든 역천(逆天)의 사생아. 그러나 시란에게만큼은 전자보다 후자의 의미가 더 강했다.
그녀만 아니었다면 그렇듯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으리라. 어그러진 밤의 기억은 한순간의 일탈, 혹은 잠시나마 어긋났던 마음들로 간직된 채 서서히 지워졌을 터.
그리 되었더라면 그녀의 어미는 역대 궁주들 중 가장 강하고도 아름다웠다던 58대 궁주 서문율하로 남아 있었을 것이며, 신궁의 계보에서조차 이름이 지워진 채 역천의 죄인이라는 족쇄를 차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시란은 어미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 곳이 저릿해지는 듯한 느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와 역대 궁주들이 하시지 못한 일을 제 대에서 마무리 지을 거예요. 더 이상은 어머니의 이름이 신궁의 불명예로 남지 않도록, 저로 인해 어머니께서 잃어버리신 것들을 제 손으로 돌려드릴 것입니다.’
시란은 어미가 남기고 간 유품들을 끌어안았다. 비록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비 어미가 그렇듯 불행히 숨이 멎은 것은 엄연히 그녀로 인한 일들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를 제물로 결정지은 운명의 안배였으며…… 하늘 또한 그녀더러 나면서부터 그리 결정된 일들이니, 더는 주저하지도 미련을 갖지도 말라며 말하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니 그녀 또한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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