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처럼 철학에 대해 오해하며 철학의 재미를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했다. 이미 철학의 재미를 경험해본 나로서는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부족하나마 쓰기 시작했다. 일상 속에서 얼마나 쉽게 철학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음식이라는 테마는 우리의 일상 중에서도 가장 가까이 있다. 많고 많은 소재 중에 음식을 통해 철학을 풀어내야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이러한 이유도 포함되었다. 읽는 이가 철학을 최대한 가깝게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를 합쳤다는 개인적인 욕심에서 비롯한 이유도 살짝 포함되어 있다.) 나와 가까운 곳, 매일 마주하는 식탁 위에서 철학을 찾아낼 수 있다면 철학이 삶과 유리되어 있다는 오해는 분명 풀릴 것이다.
--- p.8, 「프롤로그」중에서
그래서 이성은 결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원리에 따라 자연에 물음을 던지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답을 이끌어낼 뿐이다. 따라서 이성이 인식하는 자연은 아무런 변형도 가해지지 않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이성의 틀을 한번 거쳐 들어온 자연이 된다. 마치 붕어빵의 모양 틀처럼, 이성이라는 인간의 인식 능력은 이미 특정한 모양으로 짜인 틀이고,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러한 틀의 모양대로 찍혀진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p.47~48, 「인식 능력이 붕어빵 틀이라면」중에서
로아커, 레돈도, 킷캣으로부터 그것들을 모두 아울러서 설명할 수 있는 상위의 개념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은 세 과자의 공통점만 쏙 골라서 만든 개념이라기보다, 길쭉한 웨이퍼, 막대 형식으로 돌돌 말아진 웨이퍼, 겉에 초콜릿을 코팅한 웨이퍼 등등 다양한 웨이퍼들을 모두 함께 포섭하는 개념이라는 것이 헤겔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보편 개념이란 현실 세계의 사물들과는 동떨어져 완전 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세계의 불완전함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모두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 p.95, 「이성을 공유하는 사이, 나와 세계」중에서
매일 이렇게 쾌락주의적인 식단을 이어갈 수 있다면 다이어트는 순조롭겠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 마음을 다잡아 보고자 여기서 에피쿠로스의 다이어트 구루guru(정신적 스승, 지도자)스러운 면모를 하나 더 살펴보자. 에피쿠로스는 어떤 쾌락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통을 일으킨다면 그 쾌락은 포기하는 것이 좋으며, 지금은 고통일지라도 장기적으로 큰 쾌락을 산출한다면 그 고통은 감내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가, 에피쿠로스의 말이 마치 “지금 먹어서 잠깐 즐겁고 나중에 후회하느니, 차라리 지금 먹고 싶은 걸 꾹 참고 목표로 삼은 다이어트에 성공하는 게 훨씬 낫다”로 바뀌어 들리지 않는가?
--- p.112~113, 「다이어트는 ‘쾌락주의’와 함께」중에서
여기서 내가 “찍먹이랑 부먹이 같이 있으면 으레 이렇게 하는 거지”라는 생각으로 앞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나는 도덕의 주체로서 탈락이다. 이건 그저 주어진 규범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찍먹 친구를 존중하는 마음 하나만으로 앞과 같은 행동을 했다고 해도 공자는 나에게 탈락이라고 말할 것이다. 타인을 존중해주는 것은 물론 도덕적인 행동에 있어 중요하지만, 타인의 감정만을 고려한 채 ‘나의 감정’을 잊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공자는 우선 내가 마주한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떤 기분과 감정을 느끼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자, 나는 뼛속까지 부먹파이니 탕수육이란 자고로 소스를 붓지 않으면 제대로 맛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부어 먹고 싶다. 이렇게 내 감정을 일단 직면하는 과정을 가리켜 직直이라고 한다. 결국 ‘직’하는 과정을 통해 나의 원초적인 욕구와 더불어 내 안에 내재하고 있는 덕 또한 지각할 수 있다고 공자는 설명한다.
--- p.147~149, 「우선 내 감정부터 들여다보기」중에서
내가 감각하는 것들은(내게 감각되어지는 것들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의심해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나의 감각하는 능력은 나의 생각의 일부이고,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확실히 내게 속하는 것이다. 내가 상상해낸 것들과 (나의 상상의 산물과) 나의 상상하는 능력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마트에서 버터를 고르고 있을 때, 내 앞에 있는 버터가 전부 환상이더라도 내가 “버터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참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나’의 존재 또한 의심이 불가능해진다.
--- p.168~169, 「버터를 고르는 순간 당신은 현존한다」중에서
이렇게 덜 익힌 고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고기를 살짝만 데쳐서 먹는 게 미덕인 샤부샤부는 꽤 매력적인 음식이다. 다만 먹는 방법에 있어서는 조금 귀찮은 게 사실이다. 계속해서 불을 조절해야 하고, 재료도 그때그때 넣어가며 먹어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동시에 샤부샤부가 다른 음식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단 한 번도 고정된 상태가 없다고 할까, 냄비 속 육수는 불 덕분에 끊임없이 끓고 있고, 어떤 재료를 어떤 순서로 넣었느냐에 따라서 육수의 맛도 계속해서 변해간다.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참에 고기를 육수에 담갔다 뺐다 하고 있으면 나는 영락없이 헤라클레이토스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유명한 구절의 주인공이다.
--- p.223, 「레어Rare성애자의 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