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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민석 | 창비 | 2019년 11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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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462g | 145*210*17mm
ISBN13 9788936438067
ISBN10 8936438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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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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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용돌이치는 모래폭풍 한가운데 앉아 아무 영감 없이 노트북을 바라본다. 노트북이 푸들푸들 거부하는 몸짓으로 내 손을 떠나간다. 어떤 소설가는 자신이 결코 쓸 수 없는 소설을 쓰려고 하기 때문에 신경쇠약에 걸린다.
마침내 영감의 사막에서 음악이 들려오고, 나의 조잡한 세계는 이렇게 무너진다.
--- p. 17

“사랑은 아날로그야.”
나는 도로 한가운데서 넋이 빠져 소동을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사랑이 무서워지면 별수 없다, 두 발로 직접 뛰어서 도망쳐라. 사랑은 이메일이나 하드디스크의 여행 사진처럼 쓱 삭제해버리고 말 일이 아니다.
--- p. 65

스승은 언젠가 ‘자신이 너무 똑똑해서 세계를 운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고 충고했다.
“그런 자들은 세계에 중심이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자꾸 중심을 세우려 들지. 그러고 그 중심에 맞춰 세계의 질서를 세우려 드는 거야. ”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요?” 멍크는 얼굴을 붉혔다.
“주로 남자들이지.” 스승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중심’과 ‘질서’에 공통되게 ‘세운다’라는 동사가 붙잖아.”
“밤낮으로 뭘 자꾸 세우려고 덤비는 사람들이 누구겠니? 남자들이지.” 스승은 속삭이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어쩌다 중심에서 소외되면, 이번엔 중심을 통째로 부정하고 혁명을 일으키자고 부르짖지.”
스승은 다정스레 멍크, 하고 불렀다.
“그런 사람들은 멍크의 음악을 싫어할 거야.”
--- p. 200

삶은 사상자가 속출하는 전장이 됐다. 총성과 비명이 들리지 않는 침묵의 전장. 이번 자본의 전쟁에서 발생한 경제적 사상자의 비율이, 재래식 전쟁의 사상자 비율과 맞먹는다고 한다. 우울증 환자 수와 자살자 수가 전쟁 전보다 두배 반 늘었다는 통계가 어제 나왔다.
다만 자본 전쟁이 재래식 전쟁만큼 끔찍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텔레비전으로 중계할 만큼 쓸 만한 스펙터클이 펼쳐지지 않아서일 뿐이다. 숫자 더미와 그래프 몇줄로는 시청자를 유혹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이 전쟁 상황이고, 우리가 앉아 있는 거실이 바로 전장의한 귀퉁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귀띔해주지 않는 탓이기도 하다.
--- p. 236

“나야 인생을 살 만큼은 살아봤지. 결혼도 해봤고. 하지만 너희는 그저 젊은 채로 끝나겠구나.” 심은 빈 강의실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심은 어쩌면 눈물을 몇방울쯤 흘릴 수도 있었다. 젊어서 종말을 맞이하는 학생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나쁜 미래를 물려줘서 미안한 게 아니라, 아무 미래도 물려줄 수 없어서 슬펐다.

--- p.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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