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회복이란 음악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예배의 방식을 현 시대에 맞추어, 현대적으로 만들어 나간다는 것도 아니다. 문화의 변천에 대한 반응도 아니다. ‘멋있거나’, 현대의 히피 문화나, 시대를 따라가자는 운동이 아니다. 흐릿한 눈빛으로 하나님과 친밀함을 누리자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신학적으로 정확해지자는 것도 아니다.
예배의 회복이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서 우리의 마음가짐을 가다듬어 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함께 들어가 머묾으로써, 그곳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알아 가는 제자들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순결한 예배를 드릴 때 성령님께서 일으켜 주시는 변화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예배의 회복이란 최후에 있을 전쟁에 대해서 준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5장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는 예배 아마 하나님과 선지자들 중에서 우리의 기억에 가장 깊이 남을 만한 만남의 사건은 이사야를 부르시던 때였을 것이다(사 6:1~8을 보라). 죄인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는 부르짖음은 지성적인 분석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전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열정과 어린아이와 같이 활짝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스스로 발견하게 된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사야가 “내가 본즉 주께서”라고 하는 것은 변명이나 거만한 마음으로가 아니라, 받은 강력한 은혜가 그의 교만을 무너뜨리는 순간에 나온 말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같은 책인 이사야서의 뒷부분에 더욱 깊게 확인되고 있다(사 57:15를 보라).
교만이 깨지기 시작하는 지점은 우리가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사야는 유다에서 그가 살던 시대의 문화의 혜택을 받고 교육을 받은 엘리트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런 이사야였지만 그는 전혀 가식이 없이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으로 들어간 사람에게만 나타날 수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과 배우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사야의 부르짖음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형식에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모습에 대해서 완전하게 자신을 내어 드리며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14장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예배] 우리가 예배 가운데서 근본적으로 드리는 것 나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나의 마음이 예배의 심령으로 넘쳐흐르는 축복을 가로막으려고 했던 것은 인간적인 교만이었다.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언제나 방해하려고 찾아오는 것이 바로 이 교만이다. 가인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기대하셨던 대로 이미 정해 주신 방법을 따라 드린 아벨의 제사는 받아 주시고 스스로 만들어 낸 방법으로 드린 자신의 제사를 거절하신 것에 대해서 화를 내다가 저주를 받게 된 이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예배할 것인지, 나의 방법으로 예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궁극적으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우리는 성령님으로 충만한 가운데 성경이 말하는 방법대로 산 제사와 같은 생명력 있는 예배를 드리든지, 아니면 생명력도 없으면서 따라서 성장도 없이 그저 인간적인 지혜를 따라서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든지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예배’라는 단어의 정의는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내려놓다’라는 의미이다. 예배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인 프로스쿠네오(proskuneo)는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얼굴을 땅에 대다’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고 기어가서 구하는 비굴한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와 가치를 인정하여 그분 앞에서 취하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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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너희 몸을 …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하는 예배의 모습은, 바로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가 드려야 마땅하고, 영적이며, 논리적으로도 적합하고, 의롭고 올바른 선택이라고 말해 준다. 또한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권면을 덧붙이고 있다(롬 12:2). 바울의 이러한 권면의 초점은 ‘하나님의 뜻’에로 맞추어져 있으며, 따라서 예배-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의 핵심-와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이신 분께 온전히 합당하게 살아가는 삶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