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머리털은 덥수룩, 귀는 뾰족
상당하셨다.
한참 묵묵히 계셨다.
어떤 스님이 여쭈었다.
“수많은 여러 조사가 법당에 오르니, 인간과 천상에서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종승(宗乘)이 어둡지 않게 스님께서 가리켜 보여주십시오.”
스님이 말씀하셨다.
“머리털은 덥수룩, 귀는 뾰족.”
그 스님이 말했다.
“일구(一句)가 유통되면 인천이 귀를 쫑긋합니다.”
스님이 말씀하셨다.
“검은 장삼을 햇볕에 쬐는구나.”
또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어느 가문의 노래를 하시며, 종풍은 누구를 이으셨습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반복하여 말해도 전혀 더듬거리지 않는다.”
上堂. 良久. 有僧問: “列祖昇堂, 人天堅請, 不昧宗乘, 乞師指示.” 師云: “頭봉승, 耳卓朔.” 僧云: “一句流通, 人天聳耳.” 師云: “墨참난衫日裏쇄.” 進云: “師唱誰家曲, 宗風嗣阿誰?” 師云: “重言不當吃.”
여쭈었다.
“적수(赤水)에서 보배 구슬을 구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것은 인간세상의 보배일 뿐입니다. 꽃구름을 동반하여 큰 소리로 말한다 하여도 진실로 격외의 말이 아닐 것입니다. 도대체 오늘은 무엇으로 사람에게 보이시겠습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한밤중엔 제삿밥 먹으러 온 귀신이 북 치는 소리를 듣고,
아침에는 여울 가의 노랫소리를 듣는다네.”
問: “赤水求珠, 猶是人間之寶, 和雲唱出, 猶非格外之談. 未審今日
將何示人?” 師云: “夜聞祭鬼鼓, 朝聽上灘歌.”
여쭈었다.
“형상을 초월하여 푸른 하늘 바깥을 말하고, 그윽하고 현묘한 일을
말하면 어떻습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언덕 위의 사람들이 운율을 붙여 노래하면,
고깃배 어부들이 운에 맞춰 노래하지만 잘 맞추질 못한다네.”
말씀드렸다.
“그윽하고 현묘한 일은 어떠합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낚싯바늘은 길고 낚싯줄은 짧다.”
問: “言超象表靑肖外, 出語幽玄事若何?” 師云: “岸上行人聲有韻, 船中漁父和不齊.” 云: “幽玄事若何?” 師云: “구長線短.”
여쭈었다.
“여태껏 전해오는 일을 그 누구도 선뜻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스님께서 얼른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이 말씀하셨다.
“팔십 늙은이는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
問: “從上來事, 未有人當頭道得. 請師當頭道.” 師云: “八十翁翁不주杖.”
여쭈었다.
“듣자니 스님께선 깊은 못에서 미묘한 뜻을 끌어낸다던데, 곧바로 푸른 하늘의 일을 투탈(透脫)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갑기(甲己)의 해에는 병(丙)이 맨 앞에 나온다.”
말씀드렸다.
“오늘 어떠하십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눈이 멎으니 참으로 좋구나!”
問: “聞師引出潭中意, 直透靑肖事若何?” 師云: “甲巳(己)之年丙作首.” 云: “今日事若何?” 師云: “大好雪晴.”
여쭈었다.
“어떤 것이 부처님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셨다.
“삼 서 근.”
問: “如何是佛?” 師云: “麻三斤.”
(중략)
--- p.27~31, 「상당법문」
26. 『십심송(十心頌)』 - 열 가지 마음의 노래
마음은 봄이라
산하와 대지에 널리 비 내려주고
떫고 시고 짜고 싱겁고 달고 쓰게 하여
모두가 봄의 공덕 덕분에 더욱 힘 돋네.
마음은 물이라
그릇의 모나고 둥긂과 넓고 좁음에 따르고
혹은 곧장 사람을 따라 더러워지기도 하니
여러 가지가 모두 다 법왕의 법이라네.
마음은 불이라
뭇삶의 번뇌의 열매를 성숙하게 해주고
가지마다 이파리마다 널리 다 무성하게 하니
핵심에서 한 송이 연꽃 피어나네.
마음은 저울이라
세상의 모든 집에서 함께 사용하여
털끝만치 가볍든 무겁든 스스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니
곧 스스로 은거하지 못함을 당연히 알리라.
마음은 자[尺]라
세상 사람에게 꼿꼿함을 보여주면
설마 눈금 아래를 미루어 헤아리진 않겠지?
지옥 삼도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리라.
마음은 말통[斗]이라
하늘 끝까지 다하도록 재어서 시비하는 입으로
높은 산만큼 쌓아서 심정에 두면
죽은 뒤에 지옥고를 스스로 받으리.
마음은 등불이라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비추어보고
곧장 행하도록 가리켜 주나, 행하지 못하면
반드시 속여서 지옥 갈 원인을 지으리라.
마음은 거울이라
인간의 삿됨과 바름을 환하게 비추니
얼굴 맞대고 이야기하면 흡사 곧은 듯하나
뒷면은 오히려 검기가 옻칠과 같네.
마음은 도라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사니 달빛은 밝으나
다만 시끄러운 곳에서 보리를 증득하여
문득 여래의 참되고 바른 도에 계합한다네.
마음은 스승이라
여섯 도적 잘 붙들어 잠시도 못 벗어나게 하며
때때로 불러다 눈앞에다 두면
문밖을 나서려 하여도 어쩌지 못하리.
『十心頌』
心是春, 普雨山河及大地, 澁酸鹹淡甘與苦, 盡受春功滋助力.
心是水, 任器方圓與寬窄, 或直隨人得濁惡, 諸般皆盡法王法.
心是火, 熱得衆生煩惱果, 枝枝葉葉普皆榮, 開得心蓮花一朶.
心是秤, 萬戶千門同共用, 纖毫輕重自低앙, 便合自知不高穩.
心是尺, 示與世人生條直, 莫敎指下有推那? 地獄三塗難得出.
心是斗, 量盡天涯是非口, 堆山積岳在心思, 死後波咤親自受.
心是燈, 照見人間黑暗心, 指敎直行不能行, 須作欺瞞地獄因.
心是鏡, 照破人間邪與正, 對面言談恰似直, 背後猶來黑似漆.
心是道, 凡聖同居月皓皓, 只於뇨處證菩提, 便合如來眞正道.
心是師, 條貫六賊不暫離, 時時呼喚在目前, 才使出門不柰伊.
--- p.251~254, 「가송」
ㄱ. 짚신이 몇 켤레나 닳았나
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으셨다. “어디서 왔나?”
말씀드렸다. “여주(汝州)에서요.”
스님이 말씀하셨다. “여기서 얼마나 떨어졌지?”
말씀드렸다. “8백 리입니다.”
스님이 말씀하셨다. “짚신이 몇 켤레나 닳았어?”
말씀드렸다. “세 켤레요.”
스님이 말씀하셨다. “어디에서 돈이 나서 샀어?”
말씀드렸다. “삿갓을 만들어서요.”
스님이 말씀하셨다. “큰방에 들어가거라.”
그 스님이 “네!” 하고 대답하고는 갔다.
師問僧: “甚處來?” 云: “汝州.” 師云: “此去多少?” 云: “八百里.” 師云: “踏破幾량草鞋?” 云: “三량.” 師云: “甚處得錢買?” 云: “打笠子.” 師云: “參堂去.” 僧應諾去.
--- p.257, 『동산어록에 나오지 않고 타어록에 나오는 법문』
“어(語) 속에 어(語)가 있음을
사구라고 이름하고,
어(語) 속에 어(語)가 없음을
활구라고 이름한다.
語中有語, 名爲死句, 語中無語, 名爲活句”
동산 수초 스님은 이렇게 최초로 사구와 활구의 정의를 내리신 분이다. 스님은 ‘어중무어(語中無語)’, 곧 명안납자가 근기를 맞이하여 즉석에서 드러내는 줄탁동시의 용(用)인 어구를 활구라고 하였으나, 뒤에는 조사의 남겨진 언구인 공안을 주로 활구라고 하게 되었다. 이는 거량 문답이 활발하던 시대에는 선사들이 직접 학인들을 제접하면서 근기에 따라 맞추어 어중무어의 활구를 들이대었으나, 후세엔 문답하는 일이 드물어지면서 혼자서 수행하는 풍토가 흐르게 되고 여기에 간화선이 유행하면서 활구의 정의도 주로 조사의 공안으로만 국한되어 이르게 된다.
여기 조사선이 점차 박물관으로 들어가고 있는 현금(現今)에는 어중 무어의 흐드러진 활구 꽃밭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하겠다. 선사들의 법맥을 살펴보면 동산(洞山)이라는 호를 가진 선사들이 꽤 많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선사는 우리가 보통 동산 스님이라고 부르는 조동종의 개조 동산 양개[洞山良价(807~869)] 스님을 떠올리는 것이 상식이다. 동산 양개 스님은, 당시에는 균주(筠州)였고 지금은 강서성(江西省)의 의풍현 동북쪽에 있는 동산(洞山)에서 보리원(菩提院)을 열고 거기서 교화를 폈다. 또 한 분의 잘 알려진 동산 스님은 동산 수초 스님으로 당시는 양주(襄州)로 불렸던 지금의 호북성(湖北省) 양양시(襄陽市)의 동산사(洞山寺)에서 법을 펼쳤던 운문종 제2대 선사다.
하지만 동산 수초 스님은 워낙 유명했던 동산 양개 스님에 파묻혀 고작 ‘마삼근(麻三斤)’, ‘동산삼돈(洞山三頓)’, ‘동산오대(洞山五臺)’, ‘동산전사(洞山展事)’ 등의 몇몇 공안으로만 그 존재가 알려졌었다. 그것도 심지어 ‘동산오대(洞山五臺)’ 공안이 『선문염송』에서는 동산 양개 선사 편의 제698칙에 실려 있고, 『선종송고련주통집』 권24에서도 동산 양개 선사편에 실려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동산 수초 스님은 전사(展事)와 투기(投機)라는 용어를 창안하였고, 연밀 스님과 더불어 사구(死句)와 활구(活句) 개념을 처음으로 들고 나와서 심지로(心智路)를 즉각 끊어버리는 경절문(徑截門)의 조사관(祖師關)을 철저히 깨치게 하여 선가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이다.
동산 스님이 운문종의 적자답게 기요(機要)로 사용하는 일구(一句)의 면모를 살펴보면 정교하면서도 간결함이 돋보이며, 활용하는 활구는 압축미가 철철 넘쳐난다. 스님은 대오를 이루고서 바로 그 자리서 “인가가 없는 곳에 암자 하나를 우뚝 세워 놓고서, 한 톨의 쌀도 모아 놓지 않고 채소 한 포기조차 심어 놓지 않고서도 온 천하에서 찾아오는 이들을 접대하여 쇄쇄낙락한 납승으로 만들어 놓겠다.”라고 하였다. 본 어록을 살펴보면 뒤에 동산선원에서 학인들을 제접하면서 그는 이 약속을 충실히 지킨 것으로 보인다. 그 어떤 직위도 지니지 않은 채 인적 드문 곳 자그마하고 소박한 암자에서 아무런 재물도 쌓아 놓지 않고 학인을 맞아들여 이끌어 나가는 진솔한 선사의 모습을 모범으로 실천한 것이다.
“이 동산의 ‘여기’를 따라 보면, 말도 맛이 없고 먹어도 맛이 없으며 법도 맛이 없어서 맛없는 구(句)가 사람들의 입을 완전히 틀어막게 될 것입니다.”
동산 스님의 말씀처럼 이 어록은 말라 비틀어져, 너무나 말라 비틀어져 아무런 맛이 없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지만, 치연(熾然)하게 공부에 매진하는 수행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 2019년 하안거를 보내면서, 영곡 和南
--- 「역자의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