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서울 가입시더.”
하지만 묵묵부답, 아버지는 먼 산을 바라보셨는데 내가 느닷없는 달리기로 반항을 했던 거다. 서울로 가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찬찬히 돌이켜 보면 그날의 ‘달리기 항거’는 열살 소년의 가슴에 맺혀 있던 응어리를 처음 토해낸, 하나의 ‘성장통’이었다는 생각이다.
--- p.17
동아리에는 멘토들이 있었다. 근데 그들 중에 ‘후원’을 자신의 사익을 위한 ‘과시하기’로 삼는 상류층 어른이 있었다. 그는 학생의 집안 환경에 따라 차별하는 속내도 드러냈다. 나는 그걸 참지 못하고 회장 임기도 끝나기 전에 동아리에서 나와 버렸다. … 어느 학교나 그러지 않았을까. 영화 「친구」에는 교사가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하며 학생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다. 그렇게 괴팍하거나 위선적인 선생이 우리 학교에도 있었다. 동아리에서 후원자를 자처한 그 사람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젊었을 때 모르던 것들
--- p.27
그들은 책에서만 보았던 삶의 고난이 무엇인지를 내게 가르쳐 주었다. 40년이 지난 오늘,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동안 세상을 지배한 흐름으로 보면, 안온한 삶을 누릴 것 같지는 않다.
70년대, 어두운 풍경을 노래했던 김민기의 [강변에서]가 떠오른다.
높다란 철교 위로,
호사한 기차가 지나가면
강물은 일고 일어나,
작은 나룻배 흔들린다.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게 있는가. 오히려 물결은 높아졌고, 작은 나룻배의 흔들림도 심해졌다.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얼굴에 그늘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나는 그의 과거를 읽으려고 한다. 오래된 이 습성은 아마도 군대에서 생겨난 게 아닐까.
--- p.39
신해철은 잠시도 굴레를 쓰는 걸 참지 못했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청년들이 쓰고 있는 굴레도 참지 않았다. 영혼을 팔아버린 세상, 뒤에서 누군가를 모함하고 키득거리는 세상을 향해 그는 돈키호테처럼 돌격했다. 언젠가 괴상한 복장을 하고 방송토론장에 나타났다. ‘그래, 나 이상한 놈이다. 어쩔래.’ 그런 표정이었다.
--- p.58
훗날 부끄러운 아빠 엄마가 되지 않으려는 젊은 방송인의 심정들이 뭉쳐서 놀라운 힘을 일으켰다. 그들 중에는 민주 인사를 간첩으로 모는, 안기부 각본의 특집을 어쩔 수 없이 제작한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속죄의 의식(儀式)이 되기도 했다.
고통스러운 싸움이었지만 우리는 파업의 목표를 성취했다. 사장이 퇴진했고 공정방송을 담보할 장치도 따냈다. 노조원들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울고 있었다. 물론, 그 후로도 파란은 끊이지 않았다.
파업 전야에 내가 쓴 [영점 가장의 넋두리]가 사내에 회자하였다. 어떤 간부는 놀림 삼아 나를 ‘미스터 센티멘털’이라고 불렀다.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성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이란 걸 처음 체득했다.
--- p.84
세 칸이나 지나야 있는 화장실에 거의 다 왔을 때, 건달 같은 청년들이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열차 공안들이 몰려오고, 갑자기 검표를 시작했다. 기차표를 두고 온 나는 꼼짝없이 무임 승차자가 되고 말았다.
동료들 자리는 너무 멀리 있어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검표원은 다짜고짜 나를 승강구로 몰고 갔다. 그러더니 정차해있던 역에 내리라는 손짓을 했다. 사람은커녕 불빛 한 점 없는 한밤중의 벌판, 역 같지도 않은 역에 내리라는 건 그냥 버리고 가겠다는 뜻이다. 버티던 나를 검표원은 난간 계단 아래로 밀쳐내기 시작했고, 출발한 열차는 속도를 내고 있었다.
--- p.90
논현동의 어두운 골목길로 기억한다. 뒤에 탄 손님들이 먼저 내린다면서 차를 세웠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운전사와 손님이란 자들이 한패였다. 운전사가 그때는 대놓고 나한테 그랬다.
“당신, 오늘 잘못 걸려들었어.”
머리가 주뼛 일어섰지만 나는 차분한 척 말했다.
“알았어요, 가진 거 다 드릴게.”
근데 내가 가진 걸 그냥 털어가는 정도가 아니라 신체적 위해를 가할 것 같은 느낌이 왔다. 차 문을 열고,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에 탔던 세 남자가 쫓아왔다. 나는 코너를 돌아서 보이는 어떤 건물로 무조건 뛰어들었다. 3층으로 올라가니 여관이었다. 주인한테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었다. 비어있던 복도 끝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이 방 저 방, 문을 두드리고 거칠게 열었다 닫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밑을 내려다보면서 여차하면 나는 뛰어내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망치기까지 했으니 가만 놔둘 거 같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그들이 들이닥쳤다.
“이 새끼, 너 오늘 죽었어. 어딜 도망가.”
인상이 험해 보이는 자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냈다. 잠깐 사이지만 별생각이 한꺼번에 들었다. 운명이 있다면 나한테 왜 이러는가, 이제 가족들을 못 보는 건가.
--- p.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