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이런 이야기 따위가 어찌 조선에 개혁을 가져오며 조선을 꿈꿀 수 있게 하겠는가.”
웃음은 이내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겨우 이런 이야기 때문에 형님이 죽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면 모르겠느냐. 너도 정녕 형수님의 일가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형님을 시해한 것으로 보이느냐? 천만의 말씀. 이 나라는 성리학의 나라다. 나라가 망해도 성리학은 살아 있어. 그런데 백성이 왕을 뽑는 나라라니! 대국보다 먼저 달을 점령하는 이야기라니,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성리학이 곧 하늘인 이 나라에서, 형님은 대체, 대체 그 목숨을 놓고 무엇을 하려 했단 말이냐!”
“그 말씀은…….”
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조선이 꿈꾸길 바라지 않는 자가 누구이겠느냐
휘운이 휘청이며 말했다.
“이 세상의 모든 양반은 천것들이 꿈을 꾸면 불안해지지. 봉기라도 일어날까 봐. 당장 아바마마부터 질색하셨을 게다. 그러니 금서령이 떨어진 게지.”
--- p.65-66
“그래서 말인데, 같이 알아보러 가잔 말이지. 심양으로.”
“저를 빼주실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역모죄인인데도?”
“아주 간단해. 지금 나에겐 나와 함께 볼모로 갈 세자빈 역할의 여자가 필요하고, 넌 어떻게든 옥을 빠져나와 심양으로 가고 싶을 테지.”
“청국에서 볼모를 요구했군요.”
짧은 시간에 설이 생각을 정리했다.
“뭐, 이제 내가 세자가 됐다고 말했잖아. 어때, 그렇게라도 가볼 생각 있어?”
적잖게 당황했을 터인데도, 설은 담담하게 물었다.
“선택권은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 이 길이 아니면 망나니 칼날 아래 목을 드리워야 할 테니까.”
그러자 만족스럽다는 듯 설이 답했다.
“선택권이 있다 해도 갔을 겁니다. 하지만 가끔 그 선택이 옳았는지 후회가 들 때,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되어주겠군요.”
“현명한 판단이군. 그럼 거래를 시작해볼까?”
“목의 칼부터 풀어주시지요.”
설이 단호히 말했다
--- p.147-148
“한빈 마마께서는 바쁘신 저하를 대신해 조선인 속환 문제를 담당하셨습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관소에 할당된 농사일과 무역을 직접 담당하시게 되면서 포로 속환을 맡길 사람이 필요했고, 마침 제가 거기 있었습니다.”
한없이 열정적이고, 끈질기며, 낮은 자에 대한 측은지심을 마음에 지닌 사람. 설이 그 일에 맞춤이었을 것이다.
“열이도 그 시장에서 만났습니다. 처음엔 혀도 잘리고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어 살아날 가망이 없다 한 것을, 다섯 냥을 주기로 하고 구한 것이 그 아이입니다. 그렇게 구한 사람들이 열이 되고, 백이 되고, 계속 늘어났지만, 아직도 남 탑 시장에는 조선인 포로들이 가득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 그곳에 가 그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관소에서 자금이 풀리면 포로 중 사정이 가장 딱한 자들의 사연부터 챙기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제가 한성으로 간다 하자…….”
“난리가 났겠군.”
“약속해야 했습니다. 잊지 않겠다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문득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여인,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조국이 지키지 못한 약속을 대신 지키기 위해 그녀는 심양으로 돌아간다. 그들의 원통함을 대신 들어주러, 대신 울어주기 위하여.
--- p.157~158
반년이 지나자, 열의 검 다루는 솜씨는 선찬을 거의 따라잡고 있었다. 열은 검을 다루는 데 있어서만큼은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 내친김에 활 쏘는 법도 가르치려 했지만, 열은 검만 고집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까이서 지키고 싶은 상대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나도 누군가에게 그토록 맹목적일 수 있으면 좋겠구나.’
선찬은 열이 부러웠다.
열은 그새 눈부신 청년으로 장성해 있었다. 처음 선찬에 게 왔을 때만 해도 열의 키는 선찬의 턱밑에서 달랑거렸는데, 반년 만에 그의 키가 훌쩍 커 선찬의 키를 넘어선 것이다. 선찬은 말 못하는 열이 늘 북쪽을 향해 시선을 두고 산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네가 크는 속도를 보니, 그리움도 사람을 성장시키나 보구나.”
선찬이 농을 건넸다.
“돌아가고 싶으냐
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거라. 이제 설이가 널 걱정할 일은 없을 것 같구나.”
열은 눈 폭풍을 뚫고 기어이 다음 날 북쪽으로 출발했다. 설에 대한 애틋함은 그 정도였다.
--- p.341~3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