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긴 과일들과 칼이 내 앞에 자동으로 놓이자, 나는 스스로 나서서 “제가 과일 깎을게요”라고 했던 것은 잊어버리고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내가 왜 지금 이 집에서 이걸 앞에 두고 있어야 하지? 남편과 시부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저들도 지금 아무 할 일이 없고 그저 텔레비전을 보는 중인데? 나는 왜 종종거리며 하는 일 없이 바쁘고 불편한 마음으로 시모 곁을 따라다녀야 하는 거지? 시모가 부엌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나도 절대 어디로도 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은 뭐지? 과일 접시를 앞에 두고 왜 나는 불편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거지? 거대한 부조리에 갇힌 것만 같았다.
--- p.14-15
여성의 신체에 대한 권리는 본인보다도 그를 ‘소유’한 남자와 남자의 가족, 넓게는 사회에까지 속하는 모양이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 아이를 누구와 언제 어떻게 낳을지를 결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까지 침해한다. 가임기 지도를 만들어 출생률을 높이려는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이가 많으니 하루라도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하는 시가, 임신을 위해 자궁 질병을 당장 치료하거나 치료를 미루라고 하는 시가가 그렇다. 건강상 제왕절개가 필수적인 며느리에게 태아의 지능이 낮아진다는 비과학적인 이유로 자연분만을 고집하는 시부모가 텔레비전에 떡 하니 나오는 지경이다.
--- p.49-50
‘시가 스타트업’은 본질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 도구적 필요에 의한 것이다. 바로 가장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라는 면에서 그렇다. 남성의 집에 남성 혈연을 중심으로 모이고, 이에 부수적으로 묶인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해 노동한다. 많은 수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수록, 많은 수의 친척이 명절에 모일수록 남성은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획득한다. 부엌은 여자들로 북적이고, 방마다 아이들이 모여 놀고, 거실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이 차려낸 음식과 술을 들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어쩌면 모든 가부장의 로망일지도 모른다.
--- p.64
순간 나는 도리며 효라고 불리는 것의 실체를 똑똑히 마주한 기분이었다. 남자가 겉보기에 효자 노릇을 하는데 알고 보면 단지 갈등을 만들기 싫어서, 또는 갈등을 대면하고 처리해야 할 자신의 임무가 피곤하고 번거로워서 아내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 부모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기의 편의가 목적인 비겁함. 부모의 안녕에 전보다 큰 관심이 생겼다기보다 부모를 설득하거나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조금도 쓰지 않은 채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남편의 효였다.
--- p.87
관계에서 더 노력해야 할 사람,
더 적은 노력으로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은
자식보다는 부모, 학생보다 교수, 직원보다 사장,
가부장제에서는 며느리보다 남편과 시가일 것이다.
우리가 노력하라고 외쳐야 할 방향은
아래가 아니라 위라고 믿는다.
약자들은 이미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들의 안녕과 생존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 p.159
나는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며느리가 되겠다고 동의한 적이 없다. 결혼에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니 결혼했으면 책임을 지라고 한다면 결혼으로 따라오는 것 중에 왜 유독 며느리 역할에만 나쁜 것들을 왕창 집어넣어 놓았는지 묻겠다.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고 모두가 한 가족이 된다는 말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가족이 되는 데에 필요한 노력과 희생이 한 사람에게만 과도하게 요구되고 그 요구가 모멸감을 내재한다면 나는 그것을 가족이라 부르기를 거부하겠다. 나는 인생의 동반자로서 한 사람을 선택했을 뿐이다. 내가 선택한 한 사람과의 결합이 결혼의 본질이라고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동반자와의 관계를 보호받는 다른 방법이 있다면 더 자유로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 p.191-192
법적 보호자이자 운명을 나누는 삶의 파트너를 스스로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반드시 여성 1명, 남성 1명의 이성애자 커플이 아니더라도, 혹은 로맨틱하거나 섹슈얼한 관계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꼭 둘씩 짝짓지 않더라도,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법적 보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 국가의 복지 혜택을 받는 범위 안에 들어가는 것. 누구나 ‘정상’ 가족이 될 수 있는 것. 이러한 사회라면 여성이 가부장적 결혼 제도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 p.194-195
사랑하는 이를 마음껏 사랑하기 위해 나는 가부장제가 아닌 다른 게 필요하다. 손잡고 걸어가는 삶의 길 위에서 누구도 착취당하지 않는 방식을 고민한다. 여성이 더 이상 며느리도, 아내도 아닌 세상. 그저 나 자신으로 존재하며, 일상을 함께 꾸리고 싶은 사람의 ‘동반자’라는 이름과 역할로 충분한 세상.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 존중받는 세상. 그리하여 여성이 더 자유롭게 살아가고,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