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숨어 계신 이유는 우리가 찾는 사람, 길 위를 걷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기를, 길을 떠나 찾아 나서기를 바라십니다. 찾는 사람, 길을 떠나는 사람만이 자유와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며, 그를 통해 하느님과 더 가까운 친교를 맺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 사랑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살아 있는 인격으로 경험하도록 부르십니다. 사랑으로 우리의 인격을 일깨우고자 하십니다. 사랑과 용서로 우리 존재를 흔들어 깨우고, 우리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십니다.
--- p.25~26,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중에서
우리가 종종 잊고 사는 진리가 하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살아 있는 사람, 생각하고 물음을 던지며, 고민하고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사람을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는 길을 계획하고 그 길로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가고 자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 자녀들이 자신의 고유한 삶을 찾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각자를 위한 고유한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걸으며 그 계획을 찾고 실현해 가기를 바라십니다.
--- p.50~51, 「생각하는 신앙」중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도 같은 시련 속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왜 시련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나는 영원히 버려진 걸까? 하느님은 나를 잊으신 걸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때를 기다리는 지혜를 청하라고 합니다. 때가 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시련을 다르게 대합니다. 때를 안다는 것은 하느님의 지혜에 다다르는 길입니다. 때가 있음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시련 속에서 견디어 낼 줄 압니다. 필요한 것은 항구함과 용기와 신뢰입니다. 하느님께서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신다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때 내딛는 단 한 걸음이야말로 우리의 삶에 놀라운 기적을 일구어 내는 위대한 행위입니다.
--- p.72~73, 「오늘을 위한 하느님 나라」중에서
복음서는 말합니다. 우리의 가장 힘든 삶의 현실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곳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삶을 파괴하는 흐름에 맞서 새로운 삶을 살고픈 열망을 발견하고, 다가오시는 주님의 손길에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 때, 분명 내 안에 믿음의 회복이라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쩌면 그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마음을 먹고 그 나라를 향해 마음을 연다면, 곧 그 나라의 놀라운 결실이 맺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완성된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가 내 안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청하는 용기일 것입니다.
--- p.78~79, 「오늘을 위한 하느님 나라」중에서
동반과 식별의 의미로서 양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루카 24,13--- p.35)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길을 걷는데도,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길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그분을 알아봅니다. …… 길의 끝자락에서 그들은 눈이 열려 자신이 살아온 삶, 그들이 따르던 예수님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눈을 갖기 위해 그들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기대와 희망, 좌절과 절망까지도 마주해야 했습니다. 성경 말씀 앞에서 그들이 고대하고 기대해 온 인간적인 구세주상을 산산이 부서뜨려야 했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눈을 뜨는 체험이며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는(루카 24,32) 내적 감동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러한 내면의 변화 과정은 지식 전달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함께 길을 걸어야 하며 함께 삶을 나눌 때 가능합니다.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말씀을 경청하며 빵을 나누는 삶의 공동체에 머무를 때 가능합니다.
--- p.88, 「그리스도인의 양성」중에서
오늘 우리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은 ‘용기’가 아닐까 합니다. 마리아가 놀라움과 두려움, 의구심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용기 말입니다. 믿음이 우리 안에 자라기 위해서는 수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마리아처럼 우리의 믿음 역시 모호함, 두려움, 의구심, 어둠의 시간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믿음이 더 단단해지고 굳건해져야 합니다. 지금 우리 중 누군가가 시련의 시기, 어둠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믿음을 더 자라게 하기 위한 은총의 시간이라 생각하고 다시 힘을 내 봅시다.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걸어간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이 길을 동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 p.113, 「신앙생활의 이모저모」중에서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며, 그분의 신적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무르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보여 주신 사랑의 능력과 힘, 목숨까지 내놓는 사랑의 힘, 죽음까지도 이겨 낸 부활의 힘, 새롭게 창조하는 생명의 힘을 온 삶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 사랑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은총이 만들어 내는 세상입니다. 그 사랑을 접촉한 사람은 모든 것이 그분 사랑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며 선물로 주어짐을 경험합니다.
--- p.156, 「예수님, 내 인생의 주님」중에서
그분의 사랑을 접촉한 사람은, 그 사랑이 애타게 바라는 것, 곧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이 죄의 용서를 통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게 됩니다. 자기 삶에 만족하지 않고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향해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치기’(2코린 5,14)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말씀을 식별하는 최종적 기준은, 내가 ‘가장 작은 이들’에게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마태 25,40).
--- p.178, 「영혼을 깨우는 하느님 말씀」중에서
전례 전체가 예수님의 ‘내어 주시는’ 사랑의 행위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전례에 참여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이 역동적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리며, 하느님과 타인을 향해 나의 삶을 내어놓는 존재로 변화합니다. 벗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이 주님께 큰 기쁨이었듯, 나에게서 벗어나 주님과 타인을 향해 자신을 열고 친교를 나누는 것에서 우리는 큰 기쁨과 자유를 맛봅니다.
--- p.192,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잔치인 전례」중에서
성체성사의 본질은 우리가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와 친교를 이루는 것에,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변화하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영성체(영성체를 의미하는 라틴어 communio는 ‘친교’를 의미함)는 단순한 예식적 절차가 아닌, 우리를 향한 주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완성에 이르게 하는 놀라운 기적의 순간인 것입니다.
--- p.202, 「사랑에 취하신 하느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