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장은 「창세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창세기」를 이해하려면 핵심적인 키워드를 따라가야 합니다. 뭘까요? 「창세기」니까 ‘창조’가 중요한 단어일까요? 아닙니다. 창조는 1장에서 끝납니다. 더 중요한 키워드를 찾아야 합니다. …창조는 창세기 1장에만 있습니다. 그러니 「창세기」 전체의 키워드는 ‘창조’가 아니죠. 1장의 창조는 사람을 지은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사람과 동물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창세기」 전체를 이해하려면 이 단어를 잘 알아야 합니다. ‘생육과 번성.’ 이것이 핵심 키워드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의 처음과 중간, 끝부분에 두루 나오고(창 1:22, 1:28, 8:17, 9:1, 9:7, 17:20, 28:3, 35:11, 47:27, 48:4), 출애굽기의 처음 부분에도 나옵니다(출 1:7).”
--- p.47, 「창세기 : 생육과 번성」중에서
“「열왕기서」라고 할 때 ‘열왕’이란 10명의 왕이란 뜻이 아니라 ‘열왕’(列王), 즉 왕들이 나열되었다는 뜻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부터 호세아까지 19명의 왕들이 명멸했고, 남유다는 르호보암부터 시드기야까지 20명의 왕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솔로몬 이후 「열왕기상」과 「열왕기하」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성경은 왕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나누었습니다. 막강한 국력에 위대한 업적을 쌓아도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 그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리고 나라가 가난해져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선한 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옳고 그른 왕을 구별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떤 왕인지에 따라 나라의 운명도 똑같이 돌아갔습니다. 솔로몬 이후, 성경을 읽다 보면 왕들의 이름이 비슷하기도 하고, 북이스라엘의 왕들과 남유다의 왕들이 섞여 있기 때문에 굉장히 헷갈립니다. 따라서 「도표 12」를 활용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왕과 함께 활약하던 선지자들을 주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왕과 백성들을 권면했던 다양한 선지자들이 등장하는데 엘리야, 엘리사, 호세아, 아모스, 요나 등 기라성 같은 인물이 바로 이 시대에 출현했습니다.”
--- p.113, 「열왕기상하 : 순종하는 왕들과 불순종하는 왕들」중에서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불렀습니다. 왕도 답답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물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대답을 할뿐이었습니다. 실망한 시드기야 왕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근위대 뜰에 예레미야를 연금시킵니다. 마침내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했습니다(시드기야 11년 4월). 왕궁과 민가는 불에 탔고 성벽은 허물어졌습니다. 빈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이거나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남은 자들은 포도원과 농토에 남아서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며 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떻게 됐을까요? 느부갓네살 왕은 예레미야를 풀어주고 적절하게 대우해주었습니다.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지요(렘 39장).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매국노일까요? 예레미야는 포로일 뿐이었습니다. 바벨론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으로 가든지, 남든지 택하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아 있는 동족과 살기 위해 고국을 선택하고 유다 총독 그달리야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왕족 이스마엘이 부하들과 함께 총독을 암살하고 맙니다. 뒤늦게 군대장관들이 이스마엘을 치러 가자 이스마엘은 혼자 암몬으로 망명했습니다(렘 41장).”
--- p.208, 「예레미야 : 다윗의 의로운 가지에서 나올 참된 목자」중에서
“마찬가지로 성경에 나오는 숫자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교회는 숫자를 읽는 순간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가령 1은 하나님, 3은 신성, 4는 세상, 6은 인간, 7은 완전, 10은 많음, 12는 교회 등으로 이해됩니다. 그래서 이런 숫자의 의미들을 확장하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숫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은 어떤 뜻일까요? ‘12’는 교회의 숫자입니다. 12와 12를 곱하면 ‘144’가 됩니다. ‘10’은 많다는 뜻입니다. 10을 3번 곱한 ‘1,000’은 많고, 많고, 많다는 의미가 됩니다. 자, 이제 ‘144’에 ‘1,000’을 곱하면 무엇이 됩니까? 144,000이 나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많고 많고 많은 충분한 숫자의 교회’라는 뜻이 됩니다. 어느 이단이 주장하듯 자기 교회에 속한 사람, 자기들 교회에 나와야만 구원을 받는 사람의 숫자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역사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고작 144,000명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666’은 무슨 의미일까요? 히브리어 단어에 부여된 숫자를 ‘666’에 대응하고, 그것을 헬라어로 바꾸면 ‘nrwnqsr’이 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는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nrwnqsr'에 모음을 붙여 읽으면 ‘Neron Qesar’(네론 케사르), 즉 ‘네로 황제’가 됩니다. 666은 로마의 황제 ‘네로’였습니다.”
--- p.388,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히스토리」중에서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칙령으로 교회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이지만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공인이라는 역사적인 사건 뒤에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 계산이란 무엇일까요?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당시 로마제국의 도시에는 기독교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래봐야 전체 인구의 5%밖에 되지 않았지만 교회는 시민들로부터 각광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어느 계층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을까요? 기독교는 가난한 자라든가 노예, 하류층을 대변하는 종교가 아니라 중산층의 종교였습니다. 당시 교회의 언어와 문체를 분석해보면 학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 교회의 주류임을 알게 됩니다. 장인이나 상인 또는 전문직이 많았습니다. 교인 중에는 부와 명망이 있는 사람도 꽤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중상류층과 결혼해서 그들이 교회에 속하게 된 경우도 있고, 다신교를 진부하게 여기는 식자층, 새로운 문화와 사상에 소양이 있는 기득권층이 기독교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 p.417,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한」중에서
“성지순례는 중세의 유행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이스라엘을 여행하는 것은 인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선두주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였습니다. 고령의 헬레나는 성지순례를 갔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묘와 십자가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기독교인들이 성지순례를 할 때 그녀가 발견한 성묘에 들르는 일은 중요한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이슬람 교도가 이스라엘을 장악하게 된 후에도(638년) 성지순례는 별 문제없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가 성지를 점유하면서 순례는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순례자들은 번번이 박해를 받았고, 성지는 이교도들에 의해서 더럽혀졌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공의회를 통해 십자군을 소환했습니다(1095년). 빼앗긴 성지 탈환이라는 명목으로 십자군 전쟁을 시작한 것이지요. 십자군 전쟁은 8차에 걸쳐서 진행되었지만, 그 결과는 대실패였습니다. 그냥 실패도 아니고 대실패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p.443, 「십자군 전쟁과 아비뇽 유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