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와 함께 바로크 음악은 전성기를 맞았다. 바흐는 지난 모든 것의 집결체이자 앞으로 다가올 것들의 이정표였다. 바흐는 자신의 음악뿐 아니라 모든 음악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럽 음악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줄줄 꿰고 있는, 아주 박식한 음악가였다. 바흐는 당시에 알려진 모든 고대음악, 동시대 음악을 배우고 완전히 이해하려는 순수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음악학자이거나 음악사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학자처럼 중세음악을 발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증거 같은 것은 없다. 바흐는 그런 데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가 주체하지 못할 만큼,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흥미를 느낀 것은 작곡기법이었다. 다른 작곡가들은 곡을 어떻게 구성하는가? 그들의 음악적 아이디어의 특징은 무엇인가? 바흐는 전문 음악가로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마르지 않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 본문 중에서
베토벤이 이전의 모든 음악가와 달랐던 점은 그의 천재성과 견줄 데 없는 힘은 차치하고라도, 그가 예술가를 자부했으며 예술가로서의 권리를 지켰다는 점이다. 모차르트가 귀족 사회 주변을 맴돌며 열심히 문을 두드렸지만 결국 들어가지 못한 반면, 모차르트보다 불과 열다섯 살 어린 베토벤은 그 문을 걷어차고 당당히 들어가 자신의 자리를 쟁취했다. 베토벤은 예술가이자 창조자였으며, 그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왕이나 귀족보다 우월했다. 베토벤은 사회에 대해서는 혁명적 관점을, 음악에 대해서는 낭만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었다. “내 마음에 있는 것들은 반드시 밖으로 나와야 한다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악보에 적는다네.” 베토벤이 그의 제자 카를 체르니에게 한 말이다. 모차르트라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하이든, 바흐도 마찬가지다.
--- 본문 중에서
세상이 슈베르트의 천재성에 눈을 뜬 건 그가 세상을 떠난 후 40여 년이 지나서다. 19세기 후반 그의 작품이 출판되기 시작하고 널리 퍼지면서 브람스, 드보르자크, 브루크너, 말러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슈베르트는 음악을 논하는 자리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비록 슈베르트가 초기 낭만주의에 미친 영향은 적었지만, 그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낭만주의 음악의 도래를 알렸다. 그를 최초의 낭만주의 작곡가라 칭할 수는 없다. 오히려 후대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친 카를 마리아 폰 베버야말로 본격적인 낭만주의 작곡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슈베르트에게는 최초의 낭만주의 작곡가라는 칭호가 아닌, 어쩌면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이름이 걸맞다. 그는 최초의 ‘음악의 서정시인’이었다.
--- 본문 중에서
추종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2차대전 후 재발견되기 전만 해도 베를리오즈는 음악계의 주변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영국에서 그를 활발히 재조명했다. 기악곡뿐 아니라 오페라까지 무대에 오르면서 크게 호평을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영국만큼 활발하지는 못했지만, 195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보다 이후에 그의 작품이 훨씬 많이 연주됐다. 베를리오즈는 어쩌면 소수 마니아만이 추앙하는 작곡가로 영원히 남을지 모르겠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음악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예외 없이 번뜩이는 천재성이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 매부리코를 거만하게 하늘로 치켜든 채로, 낭만주의 개념을 아주 명확하게 해주는 음색의 장려함과 자기표현의 이상형 속에서 영광을 누리는 베를리오즈가 선명하게 보인다.
--- 본문 중에서
쇼팽의 피아노 연주법은 기존의 연주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쇼팽 덕분에 피아노는 비로소 ‘총체적인 악기’로 성장했다. 노래를 부르는 악기, 무한한 음색과 시상, 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는 악기, 영웅적인 악기, 친밀한 악기가 되었다. 슈만의 피아노 음악도 물론 참신하고 훌륭하지만, 쇼팽에 비하면 둔탁하다. 쇼팽의 음악은 쇼팽 자신이 건반을 다루는 방식을 따라 유려하게 흐른다. 피아니스트로서는 쇼팽은 슈만보다 몇 광년은 앞서 있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