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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로스차일드가 가계도 I. 삼촌들과 조카들 1장 샬로테의 꿈(1849~1858) 정통파와 개혁파|라이오넬의 출마|디즈레일리|의회와 귀족|진정한 승리|케임브리지|런던 만국박람회와 수정궁 2장 이동성의 시대(1849~1858) 두 황제|크레디 모빌리에|골드러시|국가 재정과 크림전쟁|반격 3장 민족주의와 다국적 기업(1859~1863) 통일을 위한 재원|토리노에서 사라고사까지|페리에르의 나폴레옹|영국 중립주의의 기원|남북전쟁 4장 혈과 은(1863~1867) 독일의 통일 : 경제적 배경|최종 리허설 : 폴란드|슐레스비히 홀슈타인|민영화와 외교|비아리츠 회동|쾨니히그래츠로 가는 길|고난 속의 희망 5장 채권과 철(1867~1870) 라틴의 미망|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고립|독일제국의 경제적 기원|러시안 옵션 II. 사촌들 6장 제국, 공화국, 랑트(1870~1873) 페리에르의 비스마르크|책략의 주축 : 배상금|차변과 대변 7장 코카서스계 왕족 증손들|파트너들|귀족 사회의 일원 8장 유대인 문제 반유대주의|대응 9장 제국주의 편에서(1874~1885) 제국의 금융 정치 : 이집트|또 다른 동방문제|투자에서 침략으로 10장 정당 정치 글래드스턴에서 디즈레일리로|벅스(Bucks) 정치|아일랜드 합방론|처칠과 로즈버리|프랑스의 보수주의 11장 제국의 위험과 수익(1885~1902) 비공식 제국의 위험 : 베어링 위기|열렬한 단본위제주의자들|지하 제국|로즈와 로스차일드|공식적 제국의 함정 : 보어전쟁 12장 금융과 동맹(1885~1906) 치르지 않은 전쟁|프랑스-러시아 우호 협약|이탈리아|영국-독일 우호 관계|우호 협약의 명분|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오스트리아 13장 군사-금융 복합체(1906~1914) 로스차일드 경의 분부대로|고삐 풀린 증오 III. 자손들 14장 대홍수(1915~1945) 5대|전쟁의 충격|친애하는 로스차일드 경 : 밸푸어선언|무풍대 한가운데|충돌|범람 에필로그 주석 그림/표 출처 부록 1 부록 2 |
저니얼 퍼거슨
관심작가 알림신청Niall Fergu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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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박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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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 말에 이르면 로스차일드가는 유럽 발군의 정부 대출 기관으로서 그들의 입지를 재확인하게 된다. 영국, 프랑스, 투르크,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모두 하나 혹은 여러 곳의 로스차일드 은행을 통해 공채를 발행했다. 목록에 오른 나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주요 고객 중에는 벨기에(국립은행이 새로 설립되어 과거보다는 사업을 많이 빼앗겼지만), 프랑크푸르트 상사가 어느 정도 독점적으로 재정에 관여하고 있던 헤세나사우 그리고 교황령이 있었다. 교황령의 경우, 로스차일드가는 교황의 로마 귀환에 지원금을 대면 그 답례로 로마 유대인들의 처우를 개선해 주리라는 희망으로 일찌감치 행동에 나섰다. 교황이 제임스에게 유대인 게토를 없애겠다고 별도로 약속해 주기는 했지만, 바티칸에서는 제한적이라도 유대인 해방 조치를 공식 조건으로 하는 차입은 강경히 거부했기 때문에, 협상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게 진행됐다. 금액 문제를 합의하는 일 역시 난관이었다. 칼은 교황의 로마 복귀 이전에 1000만 프랑까지만 선불할 예정이었지만, 교황은 그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원했다. 채권 발행은 교회 토지를 담보로 해야 한다는 칼의 요구마저 거부되었다. ---2장 이동성의 시대(1849~1858)에서
반(!)로스차일드주의는 미국에도 있었다. 경제적 영향력을 비교적 크게 발휘하지 못했던 미국에서도 로스차일드가는 1830년대 이래 정치적 목표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북전쟁 중에 감수해야 했던 비난도 인민당(People’s Party)이 짧은 전성기를 누렸던 1890년대에 퍼부어진 공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민당파, 즉 ‘포퓰리스트’들은 1880년대의 곡물 가격 하락으로 인한 농민들의 불만을 결집시킨, 미국의 금본위제 편입을 근본적으로 반대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의 황금 도박꾼들”과 “국제 황금 동맹이라는 비밀 도당”에 대한 그들의 비판에는 반영국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맹렬한 반유대주의도 개입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미국을 금본위제로 전환시킨 채권 사업에서 런던 로스차일드가가 두드러진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8장 유대인 문제에서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의 자유당 정부가 러시아와 같은 편에서 전장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을 당연히 여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로스차일드가는 영국-러시아 우호 협약 계획에 반대하며 유럽을 “무장 진영”으로 편 가르는 추세에 맞섰다. 1905년의 혁명이 러시아의 영속적인 자유화로 이어졌다면 그들도 다른 태도를 보였을지 모른다. 프랑스 사회당 당수 조레스(Jaur?s)는 “프로이센 왕의 채권자였던 로스차일드가가 왕에게 대부금을 안기고, 그 대가로 주 의회에 예산 통제권을 부여하고 헌법을 승인하게 한 1848년”을 떠올리며, 로스차일드가가 이번에도 그들의 경제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의회주의의 길로 이끌어 주기를 희망했다. 내티도 1906년 1월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혜가 무지를 딛고 일어나 마침내 자유주의 정권이 수립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피력했다. ---12장 금융과 동맹(1885~1906)에서 사실 밸푸어선언은 시오니스트들이 요구하고 동화주의자들이 두려워했던 것만큼 혁명적인 내용이 아니었다. 밸푸어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목적을 달성하고 마침내 유대인 국가를 세울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그의 친유대주의는 로버트 세실 경이 그랬듯이 디즈레일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17년에 썼던 글에서처럼 그가 바라본 유대인들은 “5세기 그리스인들 이래 인류가 보아 온 가장 재능 있는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발표한 선언을 “영국이나 미국 혹은 다른 국가의 보호령”에 대한 구상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선언에 “독립된 유대인 국가를 서둘러 수립해야 한다는 취지가 담긴 것은 아니며, 유대인 국가는 통상적인 정치적 진화 법칙에 따라 점진적으로 이루어 나갈 문제”였다. 1919년 1월에 커즌에게 장담한 것처럼 그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정부”에 대한 그 어떤 계획도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14장 대홍수(1915~1945)에서 |
세계 금융의 지배자 로스차일드가의 8대에 걸친 신화를 낱낱이 파헤친다!
KGB에 의해 은폐되었던 문서까지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은’ 저자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방대한 정치?경제적 네트워크를 최초로 자세히 소개 18~20세기에 걸쳐 전 세계 금융계를 장악한 유대계 최대의 금융 가문 로스차일드는 그 명성만으로도 놀라운 신화이자 전설이다. 1700년대 후반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골동품 중개인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부유한 유대인 중 한 명이 되었고 핵심 사업도 은행업으로 바뀌었다. 그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비롯해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비엔나(빈), 이탈리아 나폴리, 프랑스 파리로 보내 각자 금융기업을 만들게 했다. 이 책은 로스차일드 형제들 중 셋째인 나탄 마이어가 영국에 도착한 1798년부터 1999년까지 로스차일스 가문의 200년사를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바탕으로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근대 유럽의 역사와 함께 끊임없는 부침을 거듭해온 금융 명가 로스차일드의 역사에 대한 저술을 처음으로 니얼 퍼거슨 교수에게 제안한 사람은 N. M. 로스차일드 앤드 선즈의 회장 에벌린 드 로스차일드 경이었다. 그것은 곧 로스차일드 문서보관소를 개방한다는 의미였다. 니얼 퍼거슨은 런던 로스차일드 문서보관소에 있는 모든 자료와 개인 문서 컬렉션까지 자유롭게 인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는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데 초점을 맞췄으며 로스차일드 가족으로부터 초고에 대한 의견도 청취하여 이 책의 최종 원고를 완성했다. 또한 5년에 걸친 엄청난 연구 지원과 문헌 연구, 각종 통계 자료, 일가가 주고받은 편지, 그리고 유대인 역사 등에 대한 깊은 연구와 노력이 뒤따랐다. 이 책은 로스차일드 신화를 역사적 진실로 바꾸기 위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헌 증거를 재구성하기 위해 가능한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까지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최근까지도 로스차일드 가문에 관련된 문서 자료에 접근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 일가의 거대한 문서보관소는 1912년에 대부분 파괴되어 초기에 파리로 보냈던 극소수의 문서만 남았다. 비엔나 일가의 문서보관소는 1938년에 나치에 몰수되었고, 전쟁 후에는 독일 점령 시 체포되었던 프랑스 일가가 갖고 있던 서류들과 함께 소련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자료는 냉전시대에 KGB의 모스크바 ‘전리품’ 보관소에 묻혀 있다가, 1990년 역사문헌보존센터로 이전하여 외부 연구원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부족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 자료가 너무나 방대하여 제대로 다루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런던 문서보관소에는 은행 파트너들이 1812년부터 1898년 사이에 주고받은 ‘사적인 서신’(XI/109 시리즈)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편지만 135상자에 이른다. 이 책은 그중에서 약 5,000통의 편지를 참조했다. 그 당시 편지는 정치 뉴스와 금융 정보, 사업상 질문 및 답변 등 고급 정보가 담겨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개인적인 고민과 푸념까지 털어놓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19세기의 금융 및 외교 역사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차지한 비중을 감안했을 때 가장 주목해야 할 자료는 편지인 셈이다. 세계 최고의 역사학자이자 경영사상가인 하버드 대학교의 니얼 퍼거슨 교수는 이 책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놀라운 경제적 성공 이면에 놓인 비밀들을 밝히고, 이 가문의 방대한 정치적 네트워크를 최초로 자세히 소개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근대 국제 채권 시장을 형성하고 지배했으며, 고속 커뮤니케이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정치?경제적 세력으로서 그들의 엄청난 지배력은 위기의 시대에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은 정부가 거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이 책은 가족 대하소설이기도 하다. 가족의 단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비롯하여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의 비참한 공간에서 자라나 유럽 전역의 억압받는 유대인을 돕는 데에 자신들의 전설적인 부를 이용했던 로스차일드 사람들의 삶에 유대교가 얼마나 강력한 역할을 했는지를 탐구한다. 한 가문을 뛰어넘어 시대의 역사까지 흠잡을 데 없이 서술한 이 책은 2세기에 걸친 신화를 벗겨내고 19세기의 가장 강력하고 흥미로운 가문을 되짚어보는 결정적 전기다. 천문학적인 부를 쌓고 금융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로스차일드 가문을 빼놓고는 유럽의 근대사와 자본주의 경제사를 논하기 어려워 세계를 움직이고 은행과 금융기업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라는 음모론까지 횡행 18세기 이후 인류 역사에서 로스차일드가는 엄청난 힘을 발휘해왔다. 나폴레옹전쟁, 워털루전투, 남북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등 모든 전쟁과 수에즈 운하 건설, 산업혁명, 각국의 중앙은행 설립 등에 이르기까지 로스차일드 가문이 둥지를 틀었던 5개 국가를 뛰어넘어 행사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은 새로운 신화로 기록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물론 오늘날 로스차일드의 명성은 전성기 때보다 퇴색한 듯하지만 아직까지도 여전히 금융의 역사에서, 또는 금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로스차일드의 위상은 건재하다. 아직도 로스차일드 가문이 유럽의 대형 은행을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다는 이야기부터 세계 금융을 장악하려 한다는 음모론까지 로스차일드는 세계인들의 관심권 안에 항상 놓여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모론자 데이비드 아이크(David Icke)에 따르면, 로스차일드 가문은 비밀스럽게 세계를 다스리는 ‘글로벌 엘리트 또는 조합’의 일원이다. 마이어 암셸 시대 이후로 그들은 “여러 나라의 정부를 주무르고 형제애를 발휘하여 전쟁과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테면 그들은 바르부르크, 슈로더, 라자르드같이 잘 알려진 은행들과 영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를 통제하며 J. P. 모건, 록펠러, 쿤 뢰브, 슈파이어, 레만 등과 같은 미국 금융기업을 뒤에서 조종하는 숨겨진 세력이다. 이런 글로벌 파워의 네트워크를 통해 그들은 에이브러햄 링컨 암살, 보어전쟁, 이스라엘 건설(중동의 유전을 통제하려는 작전), 러시아혁명(“로스차일드가 통제하는 글로벌 엘리트의 미국 금융 조직에 의해 러시아에서 발발한 쿠데타”), 히틀러의 자금 조달, 심지어는 닉슨 대통령의 달러화 환율 조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데이비드 아이크는 로스차일드를 비롯해 보수당과 언론에 포진된 그들의 패거리가 전기, 석탄, 가스의 민영화를 통해 전 세계 에너지 공급을 독점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도 로스차일드 가문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혀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탄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워털루전투의 결과에 대한 가짜 정보를 흘려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린 이야기, 디즈레일리 총리가 그토록 탐냈던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매입한 이야기 등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 외에도 로스차일드 가문을 다룬 영화와 연극, 뮤지컬 등이 상연되면서 ‘로스차일드’는 전 세계인의 귀에 익숙한 단어로 자리 잡았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권력이 가진 양면성을 자세히 분석하기도 했다. 그는 로스차일드가 근대적 민주주의를 설립한 가장 위대한 혁명가 중 하나로 보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귀족 정치를 종식시켰을 뿐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유물론을 대표하기도 했다. 물론 이 책은 로스차일드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로스차일드 가문과 당시의 역사, 그리고 어떻게 부를 쌓아 운용해나가는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1815년부터 1914년까지 100년간 로스차일드 은행은 그 규모가 세계 최대였다. 오늘날 국제 은행 중에 가장 큰 은행도 로스차일드 가문이 전성기 때 누렸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어느 누구도 나탄과 제임스가 1820년대 중반부터 1860년대까지 소유했던 만큼 세계적인 부를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천문학적인 부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고는 자본주의 경제사를 논하기란 어렵다. 그들의 전무후무한 성공에는 어떤 ‘비결’이 숨겨져 있었을까? 기업 운영에 관해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출처가 불분명한 격언만 무성할 뿐이다. 그렇다면 로스차일드 가문은 정확히 어떤 사업을 벌인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누린 엄청난 경제적 영향력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이런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19세기의 공공 금융을 이해해야 한다. 로스차일드는 정부 기관에 대출해주거나 국공채에 투기하여 어마어마한 재산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19세기판 메디치가의 영예를 누리며 ‘우리 로열 패밀리’라는 자의식을 갖다! 가족 간의 단합을 중시하며 근친결혼을 통해 경영을 승계하고 부를 집중시켜 굳건하게 유대교를 지키고 유대인 해방에 앞장서다 이 책의 주요 관심사는 현대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특이한 기업인 로스차일드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회사의 역사와 가족의 역사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근친결혼을 선호했다. 그럼으로써 가문의 자본을 지속적으로 결집시키고 ‘외부인’의 권리 주장을 사전에 방지했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로스차일드 사람들은 가장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룬다. 이상한 것은 가족 중에서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것이며, 그런 식으로 관계가 이어져서 훗날 역사가들이 도저히 풀지 못할 복잡한 매듭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당시 유럽의 왕족들도 그토록 밀접하게 족내혼을 하지는 않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여성은 가족의 사업에 관여하지 못했으며, 외부인과 결혼한 경우 그 남편도 처가의 사업에 개입할 수 없었다. 유언장도 한 세대의 소망을 다음 세대에 강요함으로써 사업의 지속과 성장을 보장할 수 있도록 작성되었다. 또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주요 지침 중 첫 번째는 ‘단합’이었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가 다섯 아들에게 남긴 유언도 ‘흔들림 없는 단합’이었다. 그렇다고 형제간에 갈등이 없지는 않았다. 관계 단절로 치달을 뻔한 순간도 많았지만 이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19세기의 대가족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로스차일드 가문이 여러 가지 법적?문화적 제약을 극복하고 귀족과 동등한 신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당시로선 매우 놀랄 만한 일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화려한 대저택과 타운하우스는 3대째에야 이루어졌다. 그리고 로스차일드 가문이 훈장과 작위, 기타 영예를 얻기 위해 애쓴 결과 1885년에는 영국 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사냥과 경마에 열중하고 작가와 음악가, 건축가와 미술가 등을 후원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사람들은 로스차일드가 사람들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방식이자 유대인들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유대교 및 유럽?중동 유대인 사회는 너무나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19세기에 서구로 이주한 수많은 유대인 가족들은 자신들이 정착한 나라에서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하려면 자신들의 신앙인 유대교를 버려야 했다. 아무리 집이 호화롭고 아이들을 잘 교육시켜도 유대인에 대한 대중의 적개심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귀족 및 다른 종교의 은행가들이 내보이는 반유대 정서는 끊임없이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부유한 유대인 가족들은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쪽을 선택했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그러지 않았다. 이들은 굳건하게 유대교를 고수했고, 그들이 회원으로 있는 다양한 유대인 공동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더구나 이들은 초창기부터 여러 국가에 재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곳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법적?정치적 지위를 높이는 데 앞장섰다. 조상의 신앙을 지키고 그들보다 ‘더 가난한 같은 신자들’을 잊지 않음으로써, 로스차일드 가문은 자신들의 행운에 감사를 표하는 동시에 그것을 오래도록 유지했다. 유대인 사회를 대표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할은 1917년의 밸푸어선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재정 적자의 범위뿐만 아니라 금융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국내외 정책까지 결정하는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낼 필요가 있다는 점을 처음부터 알아차렸다. 그리고 정치가들 역시 자신들이 통치하는 국가의 자급 능력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했고, 최신 정치 뉴스를 제공하는 면에서 믿을 만했던 로스차일드 가문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 책은 이러한 관계들도 면밀하게 조명하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은 영국 왕실에까지 미쳤고 존 러셀, 글래드스턴, 디즈레일리, 조지벤팅크, 그리고 랜돌프 처칠, 조지프 체임벌린, 아서 벨푸어 등 19세기를 대표하는 정치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낱낱이 살피고 있는 것이다. 반복되는 전쟁과 시대 변화가 금융 제국의 안위를 위협하다! 실패와 위기 상황을 이겨낸 로스차일드만의 특별한 자산 비범하고도 매혹적인 이야기,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쓴 평전의 완결판 로스차일드 가문을 한 국가를 뛰어넘는 금융 재벌로 만든 계기가 전쟁이었다면, 이제는 그 전쟁으로 위기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크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 반복되는 전쟁은 전 세계에 구축해놓은 로스차일드 제국의 안위를 위협했다. 그 모든 세계적 격변 속에서도 그들의 은행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고 그들의 관심도 금융계 밖으로 팽창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는 데 실패한 것이 가문에 치명타가 되었다. 나탄 마이어는 주요 유럽 국가들의 재정이 정상화되자 더 먼 곳으로 눈을 돌려 신규 고객을 물색했는데 바로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고 미국이었다. 하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치 불안은 로스차일드가에서 발행한 채권에 대한 불이행 사태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당면한 문제는 재정 기관이나 통화 기관들의 분권화였다. 로스차일드가는 연방정부에서 좋은 사업 기회를 얻어내고 미합중국은행을 주미 영국은행 식으로 바꿔놓으리라 기대했지만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고 재정적으로도 신통찮게 운영되면서 자신들의 계획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미국에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실패한 것은 가문의 역사에서 단일 최대의 전략적 실수였다. 한편 철도 사업에 발을 들인 뒤 로스차일드 일가는 대중적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급진주의자들이 로스차일드가를 인민의 착취자로 묘사하기 시작했고, 1840년대에는 부자에 대한 반감이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과 뒤섞여 로스차일드 가문을 향해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1840년대 중반의 경제 불황은 정치 불안을 예고했다. 1848년의 혁명은 로스차일드가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경기 침체로 세수가 감소하면서 정부의 적자 규모가 증대된 것이었다. 단기적으로 이는 로스차일드가 사람들에게 뿌리치기 힘든 새로운 사업 기회였다. 잘로몬과 제임스 모두 내란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대규모 국채 사업을 떠맡았다. 파리를 휩쓴 혁명의 불길이 동쪽을 향해 번져나가자, 잘로몬의 산업 및 철도 채권이며 주식 모두는 말 그대로 매도가 불가능해졌고, 오스트리아 정부와 맺은 계약 의무도 이행하기가 어려워졌다. 갓 수립되어 금융에 관해 경험이 없는 정부와 가장 최근에 맺은 대부 계약을 크게 변경하는 데 합의를 보면서 제임스는 폭풍을 뚫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 사업의 다국적 구조, 막대한 자원과 최상의 정치 인맥 덕분에, 로스차일드가는 1848~1849년의 격동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로스차일드 가문 내부의 극심한 위기와 동시에 벌어졌으며, 그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1905년부터 1918년까지 로스차일드 가족 회사를 지배해온 세대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이는 곧 한 시대의 종언으로 비쳤다. 어쩌면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라는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끝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은행은 여전히 살아남았고 그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니얼 퍼거슨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오늘날까지 장수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로 상대적인 위험 회피 성향이라고 말한다. 즉 로스차일드 가문이 보인 신중함은 가족 기업의 심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같은 관점에서는 현재의 주주들뿐 아니라 미래의 세대들마자도 고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공 비결은 아주 특별하진 않다. 다른 사업으로 진출하지 않고 금융업에만 집중했고, 탁월한 정보력을 갖추었으며, 가족의 결속력을 무엇보다 중시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전 세계의 금융시장을 200년간 쥐락펴락한 명가의 역사 속에는 우리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흥미롭고 진지하게 펼쳐진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시대의 경제사회정치사를 함께 읽어내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은 한 가문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2세기에 걸친 장대하고도 진지한 역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