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땅, 금단의 땅, 용산기지가 공원으로 부활하여 우리에게 돌아오고 있다. 공원이라는 선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녹색의 낭만과 평화로 가득한 가나안이 되기에는 용산공원의 어깨가 너무 무겁다. 이 땅만큼 질곡의 역사를 겪은 곳도 드물다. 고려 말에는 몽골군의 병참기지,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보급기지였다. 임오군란 후에는 청군이 주둔했고, 러일전쟁 이후로는 일본군의 본거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는 미군에 의해 굳게 닫힌 한국 속의 미국이다. 굴절된 역사를, 상처 받은 민족정신을 공원으로 치유해야 한다고들 주장한다. 공원이 된다는 이유로, 남산과 한강 사이에 끼어 있다는 이유로, 전문가와 시민 모두 생태라는 이름의 시대적 판타지를 꿈꾼다. 100년 넘는 시간 동안 시스템을 잘 갖춘 군사 ‘도시’였던 이 땅을 ‘생태’ 공원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의견을 모은다. 숲으로 가득한 초록의 별천지가, 남산과 용산을 다시 잇는 녹색 척추가 지상 명령이 된다. 더구나 거대 도시 서울의 한 복판에 있는 용산공원은 도시의 구조, 조직, 문화를 외면할 수 없다. 입지 자체가 던져준 숙명이다. 서울의 중심이지만 소외와 단절의 섬이나 마찬가지였던 공간적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시 구조의 교정, 더 나아가 도시와 공원의 소통을 요청받는다. 거기다 243만㎡(약 80만평)의 면적은 여의도에 육박한다. 대형 공원은 형태는 물론이고 그 기능과 역할이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용산공원은 멀티플레이어야 한다. 한 번에 풀기 힘든 복잡하고 무거운 난제들을 처음부터 짊어졌다. 2012년의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는 이 힘든 귀환의 과정과 과제를 공식화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담론의 영역에서 디자인의 차원으로 용산공원이 옮겨가는 갈래길이다.--- p.14
용산공원이 만들어질 부지에는 시간이라는 바탕 위에 공간을 점유해 나간 방식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공간 구축의 주체가 누가 되었든지 간에, 닫힌 경계 안에서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논리는 ‘실리(實利)’였다. 군영(軍營)은 가장 예민하게 작동하는 현실 공간이다.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멀리하고, 효율과 성능을 우선으로 여긴다. 필요하면 짓고 기능을 상실하면 부순다. 가용지를 찾아 지형의 틈새를 파고들고, 물길을 돌려 가용지를 확보한다. 이러한 논리로 1904년부터 꾸준히 들어서기 시작한 군영 시설들은 지금 그 절정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경계를 넘은 평면적 확장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잠식할 토지도 그 한계를 드러냈다. 대체로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빈 공간에 구축하는 것인데, 용산공원의 경우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도무지 구축할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점유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 경우 공간의 재조직은 소거의 과정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런데 공간 점유 과정의 이해 없이 ‘소거하는 디자인’은 불가능하다. 단순히 필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 용산공원은 먼 과거가 아닌 가까운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p.49
출품작들은 거대한 담론에서 시작하여 미시적 공간 연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지역적 정체성과 한국적 경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종합기본계획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접근 방법에 의한 혁신적인 대안이라기보다는 모범적이고 규범적인 답안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적 경관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은 누구나 수긍이 가능한 보편타당한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을 뿐이다. 더욱이 한국적 경관을 해석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연결고리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동안 전통의 재현에 있어서 음양, 오행, 천지인 등 범아시아적 철학이나 거대 담론을 설계 개념으로 설정하여 과도한 개념들이 실제 설계의 내용으로 발전하지 못하거나 표피적 수준에서 직설적 형태로 표현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이번 공모전을 계기로 그 차이와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설계 방법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외부에서 한국을 보는 방식이 시각적인 면에 치우치지 않았는가 하는 우려도 있다. 한국적 경관의 재현이 단순히 산수의 외형만을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산수를 향유하는 방식과 경관을 조망하는 문화적 전통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공원에 한국성을 부여하기 위한 전략으로 구성 요소의 특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운영되는 프로그램이라는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설계란 좋은 프로그램이 잘 운영되도록 그 토대를 만들고 판을 짜는 과정이다. 그래서 어떤 방법이 그 판짜기에 가장 성공적인지를 현재 상황에서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지역적 정체성의 경관적 재현이 과연 가시적인 산물인지 사회적이고 관념적인 내재적 요소인지에 대해서, 설계 개념과 접근, 전개 방식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를 해야 할 시점이다.--- p.129
성공적인 공원은 공원의 계획과 설계가 좋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좋은 공원은 공원의 그릇을 만드는 일, 그 그릇을 매력적인 내용으로 채우는 일, 그리고 그런 그릇이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시스템을 확립할 때 가능해진다. 참신하고 매력적인 공원의 계획 설계와 이를 잘 실현해 내는 시공이 이루어져 공원의 뼈대를 형성하는 일은 공원 조성의 출발이 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시설과 조화를 이루는 다양하고 흥미로우며 독특한 내용물들로 공원의 콘텐츠를 구축하여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 본다면 공원의 그릇을 만들기 전에 프로그램과 콘텐츠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만큼 공원의 내용물은 그릇을 만드는 일 만큼이나 중요하며 공원의 성패를 좌우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만 이루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공원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운영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세 번째 과제이다. 제도화되고 안정된 구조를 이루지 못하면 앞의 두 조건도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용산공원을 위한 세 가지 조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p.225
용산 미군기지 부지는 지난 100년간 서울이라는 도시와 단절되어 있었던 도시 안의 요새였다. 기억에서, 도시에서, 역사에서, 그리고 자연에서도 잃어버린 땅이었다. 그 동안에도 그 도시는 다른 도시와 계속 연결되어 있었고, 전쟁의 역사와 문화도 그 땅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시계가 멈춘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는 다른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근대화의 시간이 거기에서는 멈춘 것이 아니라 단지 자본주의 도시 발전과는 다른 속도로 발전해 왔던 것이다. 용산 땅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날에도 이 땅에 군사기지는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서울에서 좀 더 먼 곳으로 우리 눈에 잘 안 띄는 곳으로 옮겨갈 뿐이다. 그렇게 용산공원은 세상의 전쟁과 계속 연결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또 땅을 잃어버릴 것이다.
용산공원에는 여러 시간이 혼재한다. 여기에서 느린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속도를 맞추는 일이다. 서울과 공통의 리듬을 회복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용산공원 조성을 둘러싼 사회적 리듬부터 맞춰야 할 것이다. 속도를 맞춘다는 것, 리듬을 맞춘다는 것이 서로 똑같아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용산공원에 고유한 속도를 발전시키고, 도시 서울과 넓은 범위의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예컨대 용산 미군기지 부지는 지금 그 존재만으로도 희소가치가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땅을 방치하더라도 자본주의 도시의 중심에서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로 비칠 것이다.
--- p.2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