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주의 시대는 가고 소통의 시대가 오고 있다. 이제는 행정가 혹은 전문가가 전문성을 앞세워 독단적으로 도시 혹은 경관을 만들어가는 시대는 저물어가고 경관 소비자의 적극적 참여가 이루어지는 프로슈밍 시대가 떠오르고 있다. 프로슈밍은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로 생소자(prosumer)의 활동을 말하는 것으로서 소비자가 직접 생산하여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경관의 소비자인 주민이 경관의 생산 즉 경관의 계획·설계·시공에 직접 참여한다는, 혹은 주민의 요구 및 선호를 최대한 반영한다는 뜻이 되겠다. 이용자인 주민이 필요로 하는, 그리고 원하는 경관을 만드는 것이 21세기 경관 만들기의 중심 과제가 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주민의 삶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하므로 인문학적 소양이 필수적이다. 보기만 좋은 경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활발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생태적으로 건강한 경관 만들기, 심미적으로 가치 있는 아름다운 경관 만들기, 지역의 역사와 고유의 특성이 살아있어 의미가 풍부한 경관 만들기, 시민들이 스스로 참여하는 프로슈밍 경관 만들기가 필요하다. 더불어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수준 높은 경관을 향유할 수 있는 경관 복지 사회가 확립되어야겠다.--- p.26
많은 조경 설계가들은 여전히 주어진 공간을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야 직성이 풀리고 ‘뭔가 했구나’하는 자기만족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실제 만들어진 공간에 가보면 이렇게 채워진 공간들이 디자인 의도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용자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예산만 낭비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어느 유명 디자이너는 “좋은 디자인이란 뭔가를 채우려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요소들을 과감히 지워나가는 과정”이라고 하였다. 무언가로 가득찬 그릇은 더 이상 담을 공간이 부족하고 매력이 없으며 오히려 비워져 있는 그릇이 훨씬 쓰임새가 좋은 법이다. 우리 선조들의 전통 한옥 마당에서 이 ‘비움의 미학’을 배울 수 있다. 한옥 마당은 서구의 정원과 달리 대부분 단순한 형태로 텅 비어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다 할 장식적인 요소도 별로 없다. 하지만 평소에는 비워져 있다가도 각종 집안 행사나 농번기에는 그 쓰임새가 아주 다양하게 변한다. 혼례를 치르는 예식장도 되었다가 회갑 잔치를 벌이는 잔치 마당이 되기도 하고 고추나 콩을 말리는 실용적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늦가을 벼를 타작하는 곳 역시 이 마당이다. 아마 한옥 마당만큼 그 쓰임새가 다양하고 정감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일본이나 서양의 정원처럼 장식적인 요소들로 가득 채워지지 않고 비움을 통해 실용의 미를 찾은 우리 선조들의 지혜인 것이다.--- p.37
왜 허접한 도시 경관은 장소를 불문하고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고, 도시민들에 의해 불만 없이 받아들여지는가? 상업공간에서 벌어지는 간판의 무질서와 혼잡함, 장소를 불문하는 획일적 아파트 군락과 연녹색의 펜스, 도시의 진입부나 주요 도시 구조물의 과함과 부조화, 대여섯 개의 개념으로 중무장한 가로등 디자인 등등은 마치 배후에 가이드라인이라도 존재하는 것 마냥 우리 도시 공간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반복, 확산된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도시 경관의 이유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가설에 불과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많은 시민들에게 도시 경관의 퀄리티가 아주 중요한 관심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간판 경관을 예로 들어보자. 공방에서 만들어진 이른바 예술적인 간판이 ‘타이어! 신발보다 싼 곳’이라는 간판보다 디자인 상 우월하다는 점을 판단 못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 도시 경관의 복잡도는 이미 통제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버렸고, 예쁘고 다소곳한 간판도 충분히 인지될 수 있다고 기대하기는 힘들어졌다. 따라서 간판을 설치하려는 이들의 선택은 항상 크고 눈에 잘 띄는 도안일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보다는 생존에 관한 치열함이 훨씬 거대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미 복잡한 도시 경관에 큰 간판 하나 더 얹는다고 해서 예민하게 반응할 시민들도 많지 않을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공공 경관의 시각적 과장과 물리적 점유를 행하는 것을 용인하는 관대한 무관심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소수가 목청 높여서 공공 경관의 개선에 대해서 논의한들 전반적인 경관 가치 불감의 분위기는 바뀌지 않을 듯하다.--- p.91
화려한 외양만을 추구하는 도시, 그 속은 과연 어떨까? 도시의 모습을 이루는 경관은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도시 경관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그 토대와 배경이 되는 생태적 인자들의 상호작용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 인간의 모든 공간적 활동, 즉 문화와 관련된 인위적인 과정이 더해지게 된다. 이렇게 유형, 무형의 요소들로 복잡하게 얽힌 도시를 읽고, 해석하고, 개선하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를 좀 더 친환경적이고, 친인간적이며,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단기간의 경제적 논리에 의해 무분별하게 지어지는 건축물과 각종 구조물,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차량 중심의 도로로 이루어진 도시 구조, 획일적인 계획과 단순한 토지이용으로 구성된 정체성 없는 도시의 모습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점차 병들게 하고, 도시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도시 경관을 건강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과정과 같이 그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각 도시의 특성에 맞는 적절한 처방을 모색해야 한다. 건강한 도시는 결국 도시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의 유기적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는 도시 경관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경관 분석과, 적절한 처방을 위한 경관 계획 및 설계, 그리고 이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일상의 문화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p.125
과거 자본주의 세계는 소품종 대량생산의 체계였으나, 시대적 변화와 함께 이제는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지난 세기가 소품종을 대량으로 생산함으로써 생산비를 낮추는 시대였다면, 이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다양한 품종을 소수의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맞춤형 시대로 변화하였다. 도시도 서서히 모습을 바꾸고 있다. 과거 도시 경관의 목표가 범국가적으로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였다면, 이제는 ‘살고 싶은 도시 만들기’ 나아가 ‘나만의 도시 만들기’와 같은 각기 다른 도시 만들기가 도시 이미지 전략의 목표가 되고 있다. 세계 경쟁의 주체 역시 국가가 아니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개성 있고 경쟁력 있는 도시가 되었으며,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도시의 표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개성 없고 이미지가 불분명한 경쟁력 없는 도시는 앞으로 다른 도시의 부속 도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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