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덤타운? 귀가 번쩍 뜨였다. 거긴 우리 동네였다. 딜런의 흑인이 거의 다 모여 사는 우리 마을이었다. (……) 그때, 그러니까 1921년에 프리덤타운이라고 부른 곳은 딜런에 속한 우리 구역이었다. 사람 사는 마을에 필요한 것은 두루 다 갖추었다. 흑인 학교와 교회 두 곳에 식료품 가게며 카페며 흑인 진료소에 장의사까지 없는 게 없었다. 프리덤타운이 딜런 한복판에 들어서서 백인이 사방팔방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산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래도 우리 흑인들이 일하러 갈 때만 빼고 우리 구역을 벗어나지 않는 한, 오래도록 아무 탈 없이 잘 살았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랬다.
“그 딱한 검둥이들이야 프리덤타운을 뜰 기회라고 좋아하지 않겠어요? 큰비만 내렸다 하면 샛강이 넘쳐 진창이 되니 지긋지긋할 만도 하잖아요! 우린 그저 거기보다 살기 편한 데로 옮겨 살게 해 주는 것뿐이죠. 하긴 검둥이가 워낙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코흘리개 같으니, 이주하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고 구슬려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라벤더색 드레스를 입은 부인이 말했다.
내 손에 들린 은제 빵 바구니가 파들거렸다. 자기가 뭐라고 프리덤타운 주인들의 이주 문제를 들먹거린단 말인가. 누구를 옮겨? 어디로 옮겨? ---pp. 20~21
벨 씨네 가족이 여행을 떠나자마자 우리는 온 집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와 틸리 이모는 말할 것도 없고 플로라 외숙모와 비니 외숙모까지, 주인집 식구들이 여행을 떠난 사이 집 안팎을 대청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플로라 외숙모가 1년 내내 목요일마다 온 집 안 먼지를 떨어내고 쓸고 닦았지만 그건 대청소에 대면 새 발의 피였다. 비니 외숙모도 청소를 거들러 왔다. 창문마다 안팎을 깨끗이 닦고, 양탄자란 양탄자는 죄다 들어내 탈탈 털고, 바닥은 묵은 왁스를 긁어 낸 다음 새로 광칠을 하고, 목조 부분은 비눗물로 깨끗이 닦아 내고, 커튼은 모조리 뜯어내 깨끗이 빨고 다려서 도로 걸고, 방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바람을 쏘였다. (……) 책장 다른 한쪽 끝에는 좁다란 장롱 같은 게 있었다. 총을 넣어 둔 유리 진열장과 비슷했지만 평범한 나무 문이 달려 있었다. 나는 무심코 놋쇠 손잡이를 돌렸다. 이것도 반짝반짝 광나게 닦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열었다.
텅 비다시피 한 장롱에는 달랑 한 가지만 있었다. 옷걸이에 걸린 길고 하얀 통옷이었다. 나는 옷을 내려서 제발 내가 짐작하는 그 옷이 아니기를 빌면서 살펴보았다. 바로 그다음이었다. 긴 옷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또 다른 옷걸이가 나왔다. 거기 걸린 것은, 끝이 뾰족하고 눈만 보이도록 구멍만 도려 낸, 하얀 복면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pp. 175~177쪽
우리는 서로 바싹 붙어 서서 지켜보았다. 소방대원들이 호스를 꾸려 떠난 뒤에도 우두커니 서서 한참 동안 다 무너진 채 잉걸불처럼 이글거리는 학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리 교회 모블리 목사님과 올리브 산 교회 델버트 목사님이 대표 기도를 했다. 기도가 끝나자 틸리 이모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 마리아여, 울지 마세요. 슬퍼 마세요…….”
다들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모가 내게 늘 말했듯이, ‘우느니 노래 부르는 게 낫고, 노래는 기도나 한가지인’ 그런 노래를, 우리는 부르고 또 불렀다.
나는 울었다.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우리가 사라져 주기를 백인이 얼마나 바랐는지 이제야 비로소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 불이 사고가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둘째는 우리 학교가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스케치북에 학교를 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학교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p. 197
캐서린 제인은 한 손에는 가위를 들고 한 손에는 긴 금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있었다. 방바닥에는 뭉텅뭉텅 잘라 낸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남아 있는 건 목덜미가 훤히 드러난 채 쥐가 파먹은 것 같은 머리뿐이었다.
“캐서린 제인 아기씨, 이게…….”
나는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잘랐어. 보브 단발머리를 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했어. 이제 난 열다섯 살이고, 이건 내 머리야.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 없어. 아무리 엄마라도. 근데…….”
짤막한 웅변을 늘어놓던 캐서린 제인이 갑자기 말을 뚝 끊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두 눈에 절망의 빛이 어렸다.
“오, 로즈 리. 이를 어쩌면 좋아.”
캐서린 제인이 엉엉 울었다.
“글쎄 어쩜 좋대요, 아기씨?”
나는 이 머리 꼴을 보고 벨 부인이 무슨 말을 할지 떠올리며 나직이 대답했다.
“네가 다듬어 줄 수 있지?”
그 말투가 꼭 옷에서 떨어진 단추 좀 집어 달라는 여자아이 같았다. ---pp. 201~202쪽
우리 마을 집들이 한 채 한 채 플래츠로 끌려갔다. 모든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구경할 만큼 그것은 진풍경이었다. 프리덤타운에서 건장한 남자라면 너도나도 팔을 걷고 나섰다. 딜런 주변 도로에 차가 다닐 때를 피해야 했으므로 집을 옮기는 일은 밤에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니 횃불로 길을 밝혀야 했다.
먼저 기중기로 집을 통째로 들어 올린 다음 굴대가 달린 널빤지를 밑에 댔다. 그 굴대발판 밑에 다시 통나무를 밀어 넣고 굴대발판에 노새 몇 마리를 맸다. 딜런 시청에서 약속한 대로 그로버포인트 근처에 산다는 어느 농부에게 세내어 공짜로 빌려 준 노새였다. 노새를 모는 사람이 이랴 하자 노새가 무거운 짐이 실린 반대쪽으로 몸을 숙였다. 드디어 슬슬 구르는 통나무를 타고 집이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운반을 맡은 아저씨들이 잽싸게 뒤로 뛰어가 굴대발판이 지나가자마자 맨 끝에 대놓은 통나무를 들고 다시 부리나케 앞으로 내달려 맨 앞에 끼워 넣었다. 그런 일을 숱하게 되풀이하는 사이 집은 시나브로 조금씩 새로운 터전으로 나아갔다. ---p. 229
1991년 2월 28일, 텍사스 주 덴턴 도시공원에서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나도 그 역사적인 행사에 참석했다. 도시공원이 우리 집에서 가까운 데다 댈러스에서 북쪽으로 65킬로미터쯤 떨어진 매력적인 대학 도시 덴턴으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된 터라 그곳 역사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념비를 세운 곳은 피칸 샛강에 놓인 아름다운 무지개다리 근처였다. 바람이 사납게 불던 그날, 기념비를 씌운 천을 걷자 청동 패가 보였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새겨 있었다.
“이곳은 19세기 말부터 1922년까지 퀘이커타운이 있던 자리이다. 퀘이커타운은 날로 발전해 가는 마을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여기에 정착하여 마을을 이룬 것은 재건 시대(1865~1877)가 끝난 뒤였다. (……) 한창 시절 퀘이커타운에는 살림집 58채, 가게와 식당 두어 곳, 진료소 한 곳, 장례식장 한 곳, 교회 세 곳이 있었다.
1921년 4월에 채권 발행 문제를 두고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 퀘이커타운 주민들은 거세게 반발했으나 투표를 강행, 찬성 367표 반대 240표로 채권 발행안이 가결되었다. 퀘이커타운 주민들은 1923년까지 이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스트덴턴 외에 솔로몬힐과 하이럼으로 옮겨 갔다. 옛 퀘이커타운 주민에 이어 그 후손들은 지금도 꾸준히 덴턴의 공동체 삶에 이바지하고 있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