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절망적으로 다짐한다. 은빛 캔의 유혹을 일거에 떨칠 자신도, 시어머니 앞에서 자꾸 닫히려는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일 자신도 없지만, 내 안의 흙탕물을 가만가만 가라앉힐 수는 있을 것이다. 강물이 더 혼탁해지기 전에, 흐려진 제 몸을 스스로 씻어내려 목숨들을 품어 안는 강물의 사랑으로._「그 집 앞」
죽음을 배울지니라. 그러면 그대는 삶까지도 배울 것이니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열어젖혔던 앞가슴을 여미듯 생을 여며야 한다는 초조함으로 (……) 칼끝 디딘 것 같은 나날을 나는 방에서 책을 읽으며 견뎠다. 비로소, 나는 나를 용서했다._「가을빛」
여자들이 남자보다 많이 우는 건, 몸 안에 빈 곳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_「귀로」
사랑이란, 그런 거란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으면 그 사람과 같이 보고 싶고, 찻집에서 그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자주 화장을 고치고, 그 사림이 오면 이를 안 드러내고 곱게 웃는 거, 그게 사랑이란다._「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덤덤히 흘러가는 물을 오래도록 들여다볼 때, 마침내 흐르는 게 물인지 자신인지 알 수 없어질 정도로 오래 들여다본 물에서 눈을 들어 건너편 강둑의 푸른 나무며 하늘을 볼 때의 서먹한 슬픔 같은 게 형의 목소리에 어려 있었다._「떠나가는 배」
왜 산길을 걷다가 마주 오는 사람에게 길을 물으면 사람들이 그러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가면 돼요. 하지만 정작 걸어보면 그 조금이 한 시간도 되고 한 나절도 되지요. 어차피 걸어야 할 길이라면 희망을 가지고 걸으라는 마음이었겠죠. 길 바깥으로 뛰어내릴 용기도 없으면 그저, 그 길이 끝나면 무언가 다른 풍경이 나오려니 하면서 걸을 수밖에요. 그래도 끝내 다른 무엇이 없으면 그저 그랬나보다, 그러고 마는 거지요._「젖은 골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