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글자의 이름은 ‘기역’이다. 기역, 그것은 처음 한글을 배우던 시절 내 기억의 맨 앞자리에 있던 이름이다. 그러니까 기역은 기억의 처음이다. 한강 가에서 보낸 내 유년기 기억의 맨 앞에 기역이 있다. 기역, 초등학교 3학년 때 대구에서 전학 온 기옥이라는 여자아이가 기억난다. 그 아이는 내 짝이 되었다. (…) 4학년이 되어 반이 갈린 뒤에도 나는 기옥이와 가까이 지냈다. 함께 숙제도 하고, 만화도 보고, 스케이트장에도 갔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추억들이 어른이 된 나를 기옥이에게 묶는다. 소설의 외피를 쓰지 않고는 되짚어보기가 겸연쩍은 사소하고 소중한 추억들. 되돌아볼 때마다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소중하고 사소한 기억들. 나는 그 아이 이야기를 언젠가 쓸 수 있을까? 기옥이의 기억에 소설의 외피를 씌울 수 있을까? 모르겠다. --- pp.15-16
ㄱ…… 이 글자의 꼴은 이 글자가 나타내는 소리를 낼 때 혀의 뿌리가 굽어서 목젖 가까이 붙는 옆모양을 본뜬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자들이 예외적인 상상력과 독창성을 지닌 사람들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세상에, 조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글자를 만들다니. 아마 이것은 세계 문자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아니, 후무(後無)까지는 몰라도 전무(前無)한 것은 확실하다. --- p.28
ㄴ은 한글 자모의 둘째 글자다. 첫째 다음의 둘째, 으뜸 다음의 버금…… 둘은 단일성에 흠집을 내는 첫 번째 숫자다. 그러므로 그것은 죄를 상징한다. 둘은 또 분열을 허락하는 첫 번째 숫자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물의 부패를 상징한다. 13세기에 선악이원론을 내걸고 번창한 마니교를 기독교인들이 꺼림칙해했던 것은 이런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둘이라는 수사는 모든 대립을 구현하고 있다. 유럽에서도 그렇고 동양에서도 그렇다. 양과 음, 이(理)와 기(氣), 극락과 지옥, 성과 속, 남과 여, 낮과 밤, 해와 달, 삶과 죽음, 영혼과 육체, 관념과 물질, 좌와 우, 양반과 상놈, 자유민과 노예,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마침내 ㄱ과 ㄴ 등등. ㄴ은 ㄱ의 단일성에 흠집을 내고 분열을 가져왔다. --- pp.48-49
ㄹ 받침을 지닌 말들은 밝고 가벼운 느낌을 준다. 방실방실, 둥실둥실, 몽실몽실, 산들산들, 부풀부풀, 보풀보풀, 재잘재잘, 종알종알, 졸졸, 간질간질, 반질반질, 넘실넘실, 새실새실, 꿈틀꿈틀, 보슬보슬, 흔들흔들, 한들한들, 야들야들, 매끌매끌, 빙글빙글, 싱글벙글, 둥글둥글, 서글서글, 생글생글, 솔솔, 술술, 훨훨, 훌훌, 너울너울, 나울나울, 옹알옹알, 뭉클뭉클, 깔깔, 나풀나풀, 새살새살, 데굴데굴, 까불까불 같은 의성어, 의태어들이 그렇다. 날다, 널다, 달다, 덜다, 털다, 알다, 돌다, 놀다, 걸다, 갈다, 뒹굴다, 여물다, 까불다, 부풀다, 몰다, 풀다, 여물다, 영글다, 거닐다, 노닐다 같은 동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죽다’라는 말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살다’라는 말이 그렇다. 또 ‘닫다’라는 말의 반대편에 있는 ‘열다’라는 말이 그렇다. ㄱ이 죽음의 소리라면 ㄹ은 삶의 소리다. ㄷ이 닫힘의 소리라면 ㄹ은 열림의 소리다. --- pp.93-94
받침소리 ㅁ이 가벼움의 소리, 떠 있는 소리라면, 받침소리 ㅂ은 무거움의 소리, 가라앉은 소리다. 그래서 ㅂ으로 끝나는 말들은 답답하다. 어근이 ㅂ으로 끝나는 답답하다, 갑갑하다, 찹찹하다, 고리탑탑하다, 거무접접하다, 텁텁하다, 꿉꿉하다, 츱츱하다, 추접하다, 구접스럽다 같은 말들이 그 ㅂ 받침의 무거움과 가라앉음을 보여준다. ‘트집’이나 ‘발굽’ 같은 명사도 그렇다. --- pp.118-119
ㅅ 글자의 소리보다 더 되게 나는 소리를 적기 위하여 겹쳐 만든 글자가 ㅆ이다. ㅆ의 이름은 ‘쌍시옷’이다. 북한에서는 ‘된시읏’이라고 한다. 한국어에서 ㅆ은 욕설에 자주 쓰인다. ‘상스럽다’의 센말인 ‘쌍스럽다’나 ‘상소리’의 센말인 ‘쌍소리’에서도 벌써 ㅆ의 ‘쎄기’가 드러난다. ‘쌍말’은 ‘상말’보다도 더 ‘쎄다.’ 그런 ‘쌍말’ 가운데는 ‘쌍’ ‘썅’ 같은 말도 있지만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은 여자 어른의 성기를 이르는 말과 그 말의 복합어들일 것이다. 그 말들은 활자화하기 거북한 금기어들이다. 그러나 내가 끝까지, 이 책이 끝나도록, 그 금기를 지킬 수 있을까?
--- p.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