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9년 01월 30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30쪽 | 128*188*30mm |
ISBN13 | 9788933109557 |
ISBN10 | 8933109552 |
발행일 | 2009년 01월 30일 |
---|---|
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330쪽 | 128*188*30mm |
ISBN13 | 9788933109557 |
ISBN10 | 8933109552 |
침묵을 내면서 책머리에 세바스티안 로드리고의 편지 옥중의 로드리고 신부 네덜란드 상인 우나센의 일기에서 맺음말 |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 '사일런스'의 원작 소설이자 내 인식을 바꿔준 문학 중 하나다. 종교인의 고뇌와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깊이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유다라는 인물을 포착한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작중 인물인 로드리고가 고민했듯이 나 또한 비슷한 고민을 했다. 하루는, 종교인이었던 사람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는데 유다는 기능적인 존재냐고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
안타깝지만 그렇다.
당연히 납득할 수 없었다. 예수는 유다에게 가서 네 할 일을 하라. 라고 말했다. 그에게 죄를 범하라고 말한 것이다. 만약 예수가 유다를 증오했다면, 그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제자에게 보복한 것이다. 만약 예수가 유다를 사랑했다면, 어째서 그의 죄를 무시했던 것일까.
하지만 만약 예수가 알고 있던 것이 유다의 죄가 아니라 아픔이었다면? 예수는 유다에게 명령한 게 아니라 그의 아픔을 공감했던 것이라면? 그게 성인이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베풂이라면?
17세기 일본 내에서 농민들의 삶은 비참하다. 과한 부역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에게 하느님을 믿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 비록 그러기 위해서 순교를 해야 된다고 한다면, 그게 이곳에 살아남아 구원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 나은 선택인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기로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문장이 술술 읽혔고 영화가 원작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수회가 열도에 상륙한지 오래, 해외 교역을 위해 가톨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던 일본 정부의 태도가 변했다. 중앙에서 지방 정부를 통제하기 위함이다. 신부와 수사,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최종 추방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굴복하지 않은 신부들은 고문당한 뒤 순교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고위직인 페레이라 신부가 배교했다는 소식이 로마 바티칸에 전해진다. 페레이라 신부 아래 수학했던 젊은 신부 셋이 뭉쳐 진상을 알아보기로 한다. 인도를 거쳐 겨우 중국 마카오에 도착했는데, 이 곳 선교학원 원장 바리냐노 신부는 밀항에 반대한다. 일본의 신자들이 궐기한 시마바라에서 학살이 벌어졌고 포르투갈과의 교역도 중단되어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말라리아에 걸린 호안테 신부를 남기고 로드리고와 가르페 신부는 길잡이 기치지로와 함께 바다를 건넌다.
어부출신인 기치지로는 교활한 눈을 하고 비겁한 행동을 일삼았지만 일본에 대해 모르는 신부들은 그를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기치지로의 인도로 만난 일본의 신자들은 포르투갈어 몇 가지를 사용하며 신부들을 마을에 모신다. 로드리고 신부는 그들의 빈궁하고 비참한 생활에 충격을 받지만 신자들이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신앙을 지키는 모습에 감동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이며 선교가 아니겠는가? 소문을 듣고 옆 마을에서 찾아온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받는다. 그 간절한 빛이 떠오른 얼굴을 보며 로드리고는 문득 불안을 느낀다. 십자가, 메달, 성화 등에 집착하는 모습에서 혹 교리를 잘못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관리들에 의해 신자 셋이 색출되어 수책형에 처해진다. 바다에 기둥을 세워 묶인 뒤 밀물에 의해 서서히 죽어가는 벌이다. 신부를 모셔왔다 으스대던 기치지로는 너무도 쉽게 배교한 뒤 달아난다. 마카오에 있을 때 듣기로, 기치지로는 관리가 위협하는 말만 듣고도 배교했다고 했다.
페레이라 신부를 찾고, 신자들을 찾기 위해 가르페 신부와 헤어진 로드리고 신부는 산길을 헤매며 주님의 침묵에 대해 생각한다. 잔인한 현실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 이런 고통 속에 침묵하는 주님을 떠올리면 마음이 어지럽다. 산길에서 다시 만난 기치지로는 고해를 청하고 신부는 그에게 노여움과 혐오를 느낀다.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날 예수께서 유다에게 가라고 하셨을 때(그가 배신할 것을 알면서) 마음이 이랬을까. 신부를 챙기는 듯하던 기치지로는 그를 관리에 고발한다. 끌려간 오두막에서 만난 신자와의 대화는 로드리고를 놀라게 한다. 가톨릭 수사가 가르치기를 천당에는 영겁과 안락이 있으며 연공도 없고 굶주림이나 병, 노역이 없는 세계라 했다는 것이다. 포르투갈어를 하는 일본인 통역관은 자신을 선교학원 출신이라 소개하며 외국인 신부들이 일본인들을 경멸하고 업신여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진정 하느님이 있다면 천당으로 가는 길이 이토록 고통스럽겠냐고 반문한다.
이후 수령 이노우에와의 대화에서도 드러나는 바이지만, 로드리고 신부가 무지몽매한 일본인들을 계몽하려는 뉘앙스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토착종교를 대체하는 그리스도교의 교리. 어린 양이라 여겨 신자들을 동정하지만 그들의 학식과 생활, 문화 수준을 하등하게 여기는 것도 느껴진다. 일단 선교라는 행위가 그렇지 않나. 진정한 사랑과 이해, 인정으로 포용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권위를 내세워 고압적인 이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계몽하여 원죄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는 의도가 있을 터. 옥사에 갇혔다가 풀려나 관리들과 대화하고 또 배교하지 않은 신자들이 고문받고 순교하는 것을 보면서 로드리고 신부는 회의를 느낀다. 가르페 신부의 죽음도 그를 흔들어 놓는다. 일본에 도착한 뒤 숨어다니는 자신을 예수의 희생과 죽음에 동일시하였지만 자신은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다.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는 로드리고 신부. 그가 배교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는다.
이 나라의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선교사들의 이상은 서구 열강들의 이익과 연관되어 있으며, 결국 원치 않는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노우에의 주장도 어떤 면에서는 옳다. 그리고 로드리고를 배교하라 설득하려는 페레이라 신부의 증언은 결정적이었다. '나는 22년이 지나서야 일본인들이 교리를 그릇되게 받아들였음을 알았다. 이 나라는 늪과 같아서 어떤 나무든 뿌리가 썩어 자랄 수 없다.' 로드리고 신부가 목격한 일본의 교회는 기존의 사찰을 활용한 것이었다. 이 곳에 와 만난 신자들의 태도, 대화를 떠올리면서도 로드리고 신부는 거짓 신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는가 의문한다. 페레이라 신부는 말한다. '내가 배교한 것은 주님이 침묵하셨기 때문이다. 고문도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나 때문에, 배교했음에도 고문당하고 죽임당하는신자들이 있다. 예수가 일본에 계셨다면 그 분도 배교했을 것이다.' 이 말은 로드리고 신부의 번뇌를 꿰뚫는다.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치지로의 존재가 인상적이다. 로드리고 신부를 관에 넘기고 나서 그는 계속해서 신부를 찾아온다. 온갖 모욕을 당하고, 신부가 자기를 꺼리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고해하여 회심(배교했다가 신앙을 다시 찾음)한 뒤 다시 배교하길 반복한다. 관리들에게 신자들의 거취를 고발하면서도 스스로의 약함을 드러내어 울부짖는 존재. 이방의 세계에서 로드리고 신부가 느끼는 두려움과 위협을 상징하고 한편으로는 마음 깊숙이 숨기고 싶은 수치스러운 무엇.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기치지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드리고 신부가 페레이라 신부를 보며 증오와 모멸, 연대감과 자기 연민을 느끼듯이 기치지로의 비겁하고 치졸한 모습 또한 거울 속 자신 안에 있는 것이다. 주의 침묵을 근거로 배교한 것은 타인을 위한 내 믿음을 꺾은 것에 대해 정당화밖에 더 되는가, 로드리고는 조소한다. 결국 내 안의 믿음이 나의 약함에 굴복한 것이다. 기치지로도 나와 같다...
로드리고 신부는 일본 정부의 숱한 검증과 감시 속에서도 마음 속에서 지켜온 믿음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말을 한다. "강한 자도 약한 자도 없다. 강한 자보다 약한 자가 괴로워하지 않았다고 그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329쪽)" 나의 신앙이 이기적이지는 않은지, 내 뜻대로 곡해하여 믿지는 않았는지 또 무엇을 옳다고 여길 기준이나 근거는 어떠한지 생각해 볼 문제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나의 믿음을 전파하려는 행위가 강요이자 폭력이 되어, 절박한 이에게 헛된 희망을 불러일으킨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소설은 결국 믿고 섬기는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겪는 잔인한 현실과 상상할 수 없는 고통들. 성경에 등장하는 욥이 숱한 고난 속에서도 하느님을 한 번도 원망하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욥에게 질문을 던진 악마가 묻고, 로드리고 신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주는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괴로워하고 계신다고. 엔도 슈사쿠의 깊고 오랜 사유가 느껴진 작품이었다.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어 있지만, 불과 200년전만 하더라도 '천주교 4대 박해'가 있을만큼 교회에 대한 큰 박해가 있었다. 이때 약 1만명에 가까운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천주교를 믿는 수많은 신자가 투옥되고 고문을 받으며 참수되는 과정에서 배교와 순교를 오갔다. 배교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끝까지 배교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었다. 순교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목숨까지도 바쳤다.
이웃 나라인 일본 또한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있었고, 투옥과 고문 그리고 참수의 과정에서 배교자와 순교자가 생겨났다. 이 소설은 일본을 배경으로 박해가 한창 극심하던 때, 파견된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소식을 듣고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몰래 일본으로 잠입한 로드리고 신부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무서운 상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안 계시다면 그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만약 그렇다면 말뚝에 묶여 파도에 씻기던 모키치나 이치조의 인생은 그 얼마나 우스운 희극이란 말이냐. 그 먼 바다를 건너 3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이 나라에 당도한 선교사들은 그 얼마나 우스운 환영만을 쫓았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이 산속을 헤메고 있는 나는 또한 얼마나 우스운 짓을 하고 있는 걸까?' 118p
로드리고 신부는 몰래 잠입에 성공했지만, 자신과 동료 신부로 인해 마을에 박해가 시작되자 그곳을 떠나 정처 없이 도망을 간다. 말뚝에 묶여 서서히 죽어간 모키치와 이치조의 모습이 계속 신부를 괴롭혔다. 하느님께 기도하였지만, 그저 침묵하시는 듯 느껴지는 상황에서 신부는 더욱 고뇌한다. 몸과 마음이 극도로 지쳐가자 잠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의심까지 하게 된다.
하느님이 계시는가? 안 계시는가?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유아 때 세례를 받고 지금까지 성당을 다니고 있지만, 하느님의 부재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내가 로드리고 신부가 처한 상황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데도 하느님은 계신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자들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밖에 없을 때, 아무런 응답조차 없는 듯한 하느님의 침묵을 난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무서운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배교한 것은 말이다. 잘 듣게나. 그 뒤 이곳에 갇혀서 들은 저 소리에도 하느님께서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도를 드렸지만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289p
고대했던 페레이라 신부와 만남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그가 예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배교와 함께 페레이라 신부는 너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로드리고 신부가 일본 관리들의 끈질긴 회유와 유혹에도 버티어냈지만, 마지막 최후의 유혹은 어쩌면 페레이라 신부였을지도 모른다. 페레이라 신부는 말한다. 자신이 배교한 이유를. 그도 또한 하느님의 침묵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페레이라 신부라면 배교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내가 배교하면 타인의 목숨들을 살릴 수가 있고, 내가 배교를 거절하면 그들은 목숨을 잃게 되어있다. 내 신앙을 버리는 것도, 타인의 목숨을 버리는 것도 그 어떠한 선택도 못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참 심란하고 아팠다. 몇 일간 계속되는 고민 속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기 위해 지인 신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선택을 더 옳게 보아주실까? 신앙을 지키는 것도, 타인의 목숨을 살리는 것도 어떠한 선택을 하든 '하느님께서는 두 선택 모두 당신의 뜻 안에 두시지 않을까? 인간의 눈으로 배교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뜻과 배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배교란 것도 어쩌면 인간의 판단으로만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밟아도 괜찮다. 너의 발은 지금 아플 테지. 오늘날까지 나의 얼굴을 밟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들의 그 아픔과 고통을 나누어 갖겠다. 그때문에 나는 존재하니까.' '주님,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329p
로드리고 신부는 성화를 밟았다. 배교 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바랐지만 신부는 배교를 택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신부는 자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다. 고문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타인들의 목숨을 구하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신이 가진 약점을 감추지 않게 되었다. 비록 배교라는 형식을 택하게 되었지만, 신부는 그동안 알고 있던 주님과 자신의 주님이 다름을 알게 되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꾸준히 하다 보면 극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로드리고 신부처럼 머리로 배우고 알고 있던 하느님과 실제로 체험하고 만난 하느님이 어느 순간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페레이라 신부는 잊어버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느님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시고 바로바로 응답하시는 모습보다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저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하느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눈에 보이지도 목소리가 들리지도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기 때문에, 다만 오감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의식적으로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것을 순간순간 잊어버릴 뿐이다. 하느님은 침묵하시는 게 아니라 함께 기뻐하시고 함께 슬퍼하신다는 것까지.
이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침묵'이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먼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전부터 꼭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 책과 만남이 항상 그렇듯이 - 때가 되어야 만나나 보다. 영화에서는 원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