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는 누구이며, 왜 여기에 있는가? 이것은 늘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질문 중 두 가지이다. 21세기 사회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혹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자들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엄청난 사회적?지리적 기동력 덕분에 우리의 조상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가능성과 기회의 문들이 이 시대에 열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정처 없이 떠돌며 정말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확신하지 못한다. 오늘날엔 노동력 절약장치나 즐길 오락 수단이 무수하다. 인터넷 상에서 빠르게 정보를 얻는가 하면, 언제든지 DVD를 보거나 케이블 TV 채널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이렇게 오락이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안겨 주더라도 어느새 사람들은 불안과 초조감을 감추지 못한 채 사소한 것에 시간을 허비하며, 목적이나 향방 없이 주저앉게 된다.
정체감 부족으로 그들은 이 땅에서 하는 일에 대한 여하한 단서도 없이 이리저리 방황한 채 무력감 속에서 나날을 보내며, 최악의 경우 고질적인 절망의 늪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반면에 자신의 정체와 소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될 경우, 인간은 만족과 성취감을 맛보며 더욱더 큰 발전의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당신이 여기에 무슨 이유로 존재하며, 그 이유가 무엇인가와, 또한 당신이 어떤 존재이며,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누구에게 속하는가를 확실하게 인지할 때, 당신은 더할 나위 없는 안정감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정체감과 목적이란 질문에 대하여 기독교의 중심 사상인 성령 신학 혹은 더 긴(영어 철자상) 이름으로 성령론(pneumatology)의 렌즈를 통하여 그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서문
성경적 숙고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어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가지셨던 동일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바’라는 친숙한 아람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또한 자녀 및 상속인이 되어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누리셨던 그 위치에 서게 되었다. 더 정확하게,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에 의하여 정해진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만이 그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녀 된 것은 예수님이 아들이 되신 것과 유사성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관계는 태생적으로가 아닌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같기 때문이 아닌 선물로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자연적 출생에 의해서가 아닌, 우리를 양자로 삼아 주셨기 때문에 아들과 딸이 되었다. 어떻게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 사이의 관계 속으로 인도되었다는 언어의 표현은 대담한 것이다(다음 장에서 고난에 관련된 의미를 고찰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만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어떠함을 온전히 깨달을 것이다(39절).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는’(롬 6:5) 것이 그리스도인의 출발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임을 반복하여 묘사한다. 이러한 상황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서 사랑과 신뢰를 지적해 준 세례 이야기 다음에 둘 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의 성령의 역사를 더 명확히 볼 수 있을 것이다.---[CHAPTER 1 성령과 정체성]
탕진의 성령, 경험과 연단 탕진의 성령은 하나님의 심장에서 나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 속으로 이끌어 가신다. 그런 성령과의 진정한 만남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한 갈망에 불을 붙인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인생의 새로운 목적을 발견함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과업에 동참할 뿐 아니라, 또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그 결과는 일상 속에서의 기도, 말씀 묵상,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소속, 침묵, 축제, 자백, 예배와 같은 새로운 훈련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그리스도인의 훈련은 인격의 성숙이 경험되는 현장이다. 덕을 강조하는 아퀴나스, 하우어워스 및 다른 신학자들은 이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리스도와 그의 생애를 추구하려는 열망을 끓어오르게 하는 성령의 중요한 역할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피조물의 치유와 완성을 위한 하나님의 과업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우리는 순간적인 체험보다 일생에 걸친 내면적 삶의 변화, 동기와 인격의 변화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환언하여, 세상을 향한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 대한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습관이자 일상으로 자리매김을 하기에 이른다.
중략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가져오는 장기간에 걸친 결과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변화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즉 영적 훈련과 성령의 가르침 및 영적 은사의 개발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안정되고 견고하며 규칙적인 삶의 양식으로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안정되며 견실한 생활 습관에서 우러나오는 덕스러운 인격은 친절, 겸손, 용서 및 사랑이다. 이러한 삶은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사랑 속으로 이끄실 때 가능한데, 그게 바로 성령의 특유한 역사이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믿으며, 아울러 세상이나 당신의 까다로운 이웃에게 사랑과 은혜로 대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양식이 될 것이다. 마치 아침의 양치질을 잊지 않는 것처럼 이웃 사랑 또한 당신의 습관으로 굳혀질 것이다.
---[CHAPTER 4 성령과 인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