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책은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를 원작으로 하는, 마분지처럼 빳빳한 종이 위에 천연색 삽화가 그려진, ‘파랑새’ 아니면 ‘파랑새를 찾아서’란 제목의 그림책이다. (…) 내게는 없는, 어머니의 기억일 뿐이지만, 이날 나는 세상에 나와 어머니에게 첫 번째 실망을 안겨주었다. 어머니의 여동생이 ‘네깐 게 어디 보자’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을 리야 없지만, 내가 어느 순간부터 책장을 넘기기도 전에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문장을 중얼거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머니가 희망한 대로 글을 깨우친 게 아니라 어머니가 읽어준 내용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그대로 기억했다가 책장을 넘기며 단순히 재생한, 좀 희비극적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R1 파랑새, 파랑새를 찾아서」중에서
거의 닥치는 대로, 대략 열서너 가지 일을 해봤다. 몸을 쓰든 머리를 쓰든 별다른 바 없는 비정규 임시직을 전전하며 지낸 12년 넘는 세월을 떠올리면 아직도 먹먹해지는 탓에, 한 번 정규직이 되자 다시는 불안정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동료 북 디자이너들이 더 나은 대우와 보수를 찾아 대형 상업 출판사로 이직하거나 말거나 나는 가능하기만 하면 그대로 남아 첫 직장에서 은퇴하겠다는 다짐을 한 것 같다. 내가 근속하고 있는 대학 출판사에서 일하기로 결정한 실질적 요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설립된 지 242년 된 대학과 연계된, 창립된 지 103년이 된 출판사의 안정성이었다. 다음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출근 시간이었고, 다른 하나는 출판사에서 펴낸 책 중에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초록 눈』이 있다는 점이었다.
---「R2 시 쓰며 일하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중에서
낮은 지붕 바로 아래에 있던 내 다락방은 밤이 되어도 더위가 전혀 식을 줄 몰랐는데, 잠이 들 때까지 이상야릇한 글을 한 편씩 읽고 또 읽었다. 어머니는 난장이가 아니었지만, 우리 가족이 떠나온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머니는 난장이었고, 우리 역시 어쩔 수 없이 난장이 가족이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 만약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세계를 떠나지 못하고 내가 여태껏 그 세계에 남아 있었더라면, 내 삶은, 내 현실은 어땠을지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R8 현실 직시, 어쩌면 비행접시 기다리기」중에서
2011년 4월,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응급실에 갔다 왔다는 소식을 시애틀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며 서울의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안위를 묻는 이 전화 통화 중에, 뜬금없이 동생이 먼저 내게 갖고 싶은 책이 있으면 보내주겠다고 했다. (…)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책 제목을 쭉 읊었더니, 내가 여러 번 주문처럼 외운 그 책에 대해서는 이미 알아보았다 했다. 자신의 아내가 갖고 있는 인터넷 서점 멤버십 포인트로 구입하면 할인가에 살 수 있을 거라며, 다른 책들과 함께 배편으로 보낼 테니 원하는 책 목록을 작성해 메일로 보내라는 거였다.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목록을 보냈다. 운이 나빴으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지 않고 살아나서 한 것이 책 주문이라니, 이 정도면 나도 간서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 거의 2개월 가까이 걸려 도착한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은 예상한 대로 벽돌 여섯 장에서 여덟 장 정도를 늘어놓았음 직한 무게와 부피였다.
---「R10 책장이 무너지거나 바닥이 내려앉거나」중에서
내가 가진 볼테르의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1927년 1월 뉴욕에 설립된 미국의 유수한 출판사 랜덤하우스가 출간한 책이다. 랜덤하우스가 당시 저명한 삽화가이자 화가인 록웰 켄트에게 의뢰해 만든 삽화가 실려 있는 스페셜 에디션은 창립 1주년을 기념해 1928년에 나왔다. 단 1,928권만 만든 책이다. 내 책은 이 스페셜 에디션을 1929년에 재제작한 랜덤하우스의 첫 번째 재판본이다. (…)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재판본도 내 책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 1,928부만이 존재한다. 모두 남아 있다 해도 단 1,928부뿐인, 그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스페셜 에디션 초판본처럼.
---「R12 나의 정원으로」중에서
약속 장소인 고려대학교 캠퍼스로 갔는데, 학교 앞에는 전경이 이미 쫙 깔려 있었다. 모르면 겁이 없다고, 정문으로 들어가려 하던 어리바리한 나는 정문 근처도 못 가고 그만 불심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내 가방 안에는 심이 뾰족하게 깎인 연필이 죽 늘어서 있는 삽화가 그려진, 꽤 멋진 표지를 한 『카프대표소설선 I·II』 두 권이 들어 있었고, 그뿐 아니라 칫솔도 하나 들어 있었다. 앳된 얼굴의 전경은 이 칫솔(어쩌면 책날개에 적힌 ‘월북 문인’이나 ‘민족 해방 운동’ 등의 표현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을 보자마자 보고해야 한다며 워키토키에 대고 암호 같은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내 책을 거머쥔 손으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지시했다. (…) 이 세상에는 직접 땅을 파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나는 그때의 삽질을 통해서 그것들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라고.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내 전공도 아닌 사회과학 책을 사 모으며, 지나버린 시대의 작품들이 실린 카프 소설집을 읽은 시간은 그래도, 그런데도, 내게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주장하는 게 자기합리화일지라도.
---「R15 잃어버린 책의 몽타주」중에서
“죽은 저자야말로 최상의 저자이지.” 이 놀라운 말은 아트 디렉터한테서 처음 들었다. (…) 죽은 저자가 제일이라는 말을 다른 누구에게서도 듣지 못한 걸 보면 출판계에서 그리 널리 쓰이는 말은 아니라고 추정된다. 그런데, 흔치는 않지만, 출판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 말을 뱉고 싶은 상황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누군가가 이 말을 내뱉는다면, 그건 책이 나올 때까지 디자이너가 저자로부터 상식선을 넘어서는 주문에 계속 시달렸다는 의미일 테다.
---「M2 최상의 저자」중에서
나는 왜 읽는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어린 시절 갖게 된 세계관을 버릴 수도 없고,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자신이 살아서 정신이 멀쩡한 한,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을지 모를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찾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 모두가 내가 ‘읽는’ 이유다. 세커 앤드 와버그가 1998년 펴낸 조지 오웰 전집 제11권은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오웰이 문자로 남긴 총 228점의 기록물을 담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다: 1937~1939』Facing Unpleasnt Facts: 1937~1939인데, 나는 2000년 재판 수정본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꺼내 읽는다. 내가 읽고 또 읽는 이유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냉소와 회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다.
---「R22 나는 왜 읽는가」중에서
저자가 아무리 정중하게 말해도, 작업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히면 사반세기 가까이 일한 지금까지도 열부터 받고 김이 끓어오른다. 그때도 끓는 물이 담긴 주전자처럼 잠깐 씩씩거렸던 것 같다. 아트 디렉터는 이 시안을 완전히 뒤집어엎기보다는 저자를 먼저 한번 설득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저자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디자인을 변형해보자고 제안했다. (…) 표지가 골치 아픈 수정 과정을 거치기는 했으나 무사히 통과되고, 책이 출간되고 나서는 뉴욕출판협회 디자인상도 받고, 그러고 나서도 어느새 수년이 훌쩍 더 지났기에 가능해진 일이겠지만, 첫 표지 시안과 최종 결정된 수정 표지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나니 (…) 나 역시 한결 말랑말랑해져서, 나름 진보적이고 점잖은 노학자의 책에 내가 두고두고 후회할 수도 있는 그 무슨 짓궂은 짓을 할 뻔했는지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약간은 쑥스러워지기도 한다.
---「M8 비켜서서 볼 때 보이는 것」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