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이전에 공원을 계획했다
서구에서 근대공원은 왕실을 비롯한 귀족의 사냥터와 정원을 노동자 계급과 새로운 중산층에게 개방한 것에서 출발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시민 사회의 성숙과 민주화의 노력이 맺은 결실 또는 근대적인 요구도에 따라서 발명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서구와는 다른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근대공원의 도입, 수용 과정과 전개 과정이 다른 양상을 보인다. 당시 공원은 대중을 위한 공공시설로 전형적인 근대의 산물이거나 근대 산업도시의 문명 시설과 국민의식을 창출하는 데 도움되는 사회 계몽 시설, 식민 기획colonial project에 의한 근대 문명 시설의 이식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우리는 공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공원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공원은 외부로부터의 이식이 아닌 다양한 사회적 스펙트럼과 자발적 태동을 안고 태어났다.
--- p.15~16
민중의 공원 탄생, 독립공원
독립협회가 본 조선은 청일전쟁 결과 일본의 승리로 청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내정간섭을 받아왔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독립을 기념할 만한 사적을 만들어 세계에 광고하고 후세에 독립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이 공존했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 1896년 7월 2일 기사를 통해 모화관 주변을 ‘독립공원지’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을 공표했다. 조성 목적은 ‘조선이 독립한 표식’이었다. 조선의 독립은 경사스러운 일이며, 독립공원은 내외 국민의 차별없이 맑은 기운과 운동을 행할 수 있는 공간이자 인민의 위생에 도움이 되는 공간으로 여겼다.
독립협회는 독립공원의 역할과 필요성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도시 위생 문제와 환경 문제를 비롯한 도시공원과 녹지에 관해 다양한 의견과 활동을 펼쳤다. 「독립신문」 1896년 8월 11일 기사에서는 ‘식목일(종목일)’ 제정을 주장했다. 마을 주변 공지에 나무를 심어 성장 후 판 돈으로 공원 조성, 도로 개수 등에 도움이 되는 장점을 서술했다.
--- p.48~54
경성 최초의 공원 탄생, 파고다공원
탑골공원 조성 기사는 1899년에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독립신문」 1899년 3월 16일 자에 실린 “탑동 등지를 공원으로 만든다더니 일전에 어느 서양 사람이 그 골에 가서 경계 4표를 점량하였다더라”는 글은 공원 전 부지의 측량 활동을 알 수 있다. 「매일신문」 1899년 3월 21일 자는 “중서 탑동에 있는 탑을 위하여 장차 인가를 헐고 공원을 만든다는데, 그 탑은 고려대 원나라 보탑공주가 부처에게 시주한 탑이라더라”로, 3월 하순에는 공원 면적 확보를 위한 민가 철거 계획이 등장한다. 탑골공원의 조성 시기는 1934년 『경성부사』 제1권의 내용을 근거로 해관 총세무사인 브라운이 1897년 조성한 것으로 적고 있다. 탑골공원 조성 건의만 1897년에 등장하며 1902년 개원 이전까지 공원 부지 확보와 간단한 공원 시설 공사가 진행되었다.
--- p.77
일제강점기, 지신과 곡물신에게 제를 올리던 사직단의 공원화 사업
1920년대 초 경성부의 주요 사업인 공원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사직단 공원화 사업이 착수되었다. 경성부는 1921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사직단 부지를 차입하여 사직단을 헐고 운동장을 조성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민심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동아일보」 1922년 10월 21일 기사는 “사직단은 전부 그대로 보관하여 두고, 운동장은 사직 앞 남편에 설치하고 (중략) 우선 삼림을 정리하며, 그 안에 길을 각 처로 새로 내고, 동편에 정구운동장을 설치한 후에 (중략) 연못과 화단과 분수 등도 설치할 터이라더라”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공원 변화를 예시한 후 1922년 10월에 공원으로 개장했다. 1923년에는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대납량대大納凉臺, 휴게 시설인 정자와 벤치, 조경 시설로 화단을 도입했고, 1926년에는 운동 시설인 테니스 코트, 편의 시설인 전등과 공동변소, 휴게 시설인 정자, 수경 요소인 못, 경관 식재로 벚나무와 단풍나무가 함께 정비되었다.
--- p.113~114
의도된 공간에 벚나무를 식재하는 조선총독부
신규 조성된 근대공원과 신사 주변에도 대량 식재하여 벚나무는 경성의 각 공간과 전국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1910년에는 남산공원의 성격을 부각시키고자 벚나무를 식재했고, 1919년에는 장충단, 1926년에는 사직단에 1백여 주를 심었다.169) 「동아일보」 1931년 12월 2일 기사에 “경성식림묘포京城植林苗圃에서 생산하는 조선 산앵山櫻은 정원용170)으로 매우 적당하여 희망하는 사람은 경성부 권업계勸業係에 신청하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보아 벚나무 확산에는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p.224
조선의 진달래와 일제의 벚나무
이는 일본의 무사를 상징하는 벚꽃과 조선의 꽃인 진달래 사이에 정서상 간극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공원에 심어진 벚나무는 기존에 없던 인공 식재된 새로운 경관으로 봄철 일시적 개화는 관앵과 야앵 문화로 이어졌다. 왕벚나무는 일제강점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한시나 민요 중에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 없다. 일제강점기에도 벚꽃을 소재로 한 문학이나 예술작품이 희소했다. 다만 일본 벚꽃의 위상에 버금가는 꽃은 진달래였다. 『별건곤』 1929년 제20호에서는 조선의 명화를 진달래·해당화·복숭아꽃·배꽃·철쭉·살구꽃·벚꽃·할미꽃 순으로 거론했다. 봄을 대표하는 꽃으로 진달래를 거론하면서 “조선 사람의 진달래에 대한 애착심은 결코 일본 사람의 벚꽃에 대한 애착심에 못지 않으며,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 않아도 예로부터 모든 사람의 많은 시와 노래를 가지고도 족히 증명할 수 있다”라고 서술하였다. 기사를 쓴 시기가 전국적으로 벚나무 식재가 보편화되고 벚꽃놀이가 대중화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진달래를 조선 제일의 명화로 보았다. 이는 일본의 무사를 상징하는 벚꽃과 조선의 꽃인 진달래 사이에 정서상 간극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공원에 심어진 벚나무는 기존에 없던 인공 식재된 새로운 경관으로 봄철 일시적 개화는 관앵과 야앵 문화로 이어졌다.
--- p.226
모던보이와 모던걸, 노인과 룸펜이 한 공간에
경성의 모던걸과 모던보이에게 장충단공원은 하이킹 코스와 데이트 장소로 이용되었다. 신작로 개설 전에는 광희문행 전차를 타고 동대문소학교 앞 정류장에서 내려 도보로 접근할 수 있었다. 1922년에는 황금정 6정목(현 을지로 6가)에서 장충단까지 양측에 벚나무를 심은 신작로를 개설했고, 1926년에는 장충단행 전차를 개통했다. 경성 유람 코스에 장충단공원이 포함되었고, 야간 개방까지 이루어져 장충단공원의 이용 계층은 더욱 다양화되었다.
1936년의 『삼천리』 8권 6호를 보면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장충단공원에서 하이킹을 즐기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저녁 무렵 남소문 터를 지나 남쪽의 송림 사이 장충단에 들러 사탕을 사서 먹거나 한강으로 나아가 나룻배 타는 코스를 설명했다. 나이가 지긋한 이용자는 『개벽』 1922년 8월호에 서술한 것처럼 송림 사이의 동선을 따라 산책을 즐기거나 계류에서 탁족濯足을 즐겼다. 「동아일보」 1921년 7월 16일 기사에서 무더운 복날 놀이 중 장충단의 탁족과 악박골의 약수를 거론하며 장충단은 좋은 피서 장소로 다과와 함께 소나무 녹음 사이의 맑은 바람을 쐴 수 있다고 했다. 경성 시내의 아낙들은 계류를 빨래터로 활용하기도 하여 장충단공원은 경성 부민 누구나 이용하는 공간이었다.
--- p.258~259
--- p.258~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