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빵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춥고 겨울이 긴 러시아는 먹을거리가 풍족한 나라가 아니다. 거기에 툭하면 가뭄과 기근, 침략과 내전이 일어났다. 백성들은 때로 빵과 물만으로 수없이 많은 날들을 연명해야 했다. 빵은 그들에게 생명 그 자체였다. 빵은 거의 마술적인 힘을 가졌으며 찬미와 찬양의 대상이었다. (…) 러시아 음식 중에서 빵은 가장 풍요로운 함의를 갖는다. ‘남의 것’과 ‘나의 것’의 대립에서 빵이 러시아적인 것을 함축한다면 ‘영혼의 양식’과 ‘육체의 양식’의 대립에서는 양자를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빵은 20세기 러시아 역사와 문학을 관통하면서 모든 항구한 것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I ‘남의 음식’과 ‘나의 음식’/검은 빵과 흰 빵_ 85~87pp」 중에서
톨스토이의 경우는 음식의 이념이 훨씬 노골적이다. 19세기 작가 중에서, 아니 러시아 문학을 통틀어서 톨스토이만큼 음식에 이념적 색깔을 부여한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에게 음식은 음식이 아니다. 음식은 이념의 물적 증거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톨스토이는 프랑스적인 모든 것을 싫어하다 못해 증오했다. 그의 소설에서 모든 나쁜 인간들은 프랑스어를 지껄이고 프랑스식의 옷을 입고 프랑스 음식을 먹는다. (…) 톨스토이가 프랑스어 및 프랑스적인 모든 것을 증오한다는 것은 곧 러시아 상류층의 도덕적인 타락을 증오한다는 뜻이다. 이전 시대 러시아 문화에 각인되었던 ‘남의 것’과 ‘나의 것’의 대립이 톨스토이에게서는 ‘부도덕한 것’과 ‘도덕적인 것’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톨스토이의 소설 중에서 프랑스 요리와 프랑스어, 그리고 프랑스 여자, 이 모든 요소가 골고루 등장하여 집중적으로 상류층의 부도덕을 암시하는 대목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안나 카레니나』의 레스토랑 장면이 될 것이다.
---「I ‘남의 음식’과 ‘나의 음식’/프랑스어, 프랑스 음식, 프랑스 여자_ 132~134p」 중에서
일 년 중 반이 넘는 기간을 금식의 날로 지켜야 했던 러시아인들은 나머지 기간에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위장을 혹사했고, 또 위장의 혹사가 끝나면 다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 했다. 금식과 폭식이 번갈아가며 그들의 식생활을 지배했다. 이렇게 찢겨진 식생활은 러시아가 낳은 최대의 희극 작가이자 소설가인 고골에게서 무서울 정도로 리얼하게 재현된다. 고골은 문자 그대로 금식과 폭식 사이에서 찢겨 죽었다. (…) 고골은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식욕을 “악마”라고 불렀다. “내 뱃속에는 모종의 악마가 살고 있습니다. 그놈이 모든 걸 망쳐놓습니다.” 진짜 그랬다. 그의 뱃속에 든 악마가 그의 삶도 망치고 그의 작품도 망쳤다. 그리고 그의 목숨도 앗아갔다. (…) 요컨대 러시아가 낳은 최대의
대식가이자 미식가이자 식도락가였던 작가는 문자 그대로 굶어 죽었다. 영혼의 양식을 위해 육체의 양식을 완전히 버린 결과였다.
---「Ⅱ 영혼의 양식과 육체의 양식/“내 뱃속의 악마”_ 147~153p」 중에서
아무리 두 사람의 관계가 관례에 따른 통속적인 불륜이기로서니 하필이면 수박이란 말인가. 하고많은 과일 중에 왜 하필이면 수박인가. 두 남녀가 호텔에 들어 정사를 벌이려는 마당에 남자가 수박을 먹는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발상이다. 남녀의 사랑을 위한 과일, 로맨스를 위한 소도구로서의 과일, 그러니까 일종의 ‘에로틱한’ 과일은 얼마든지 있다. (…) 그 지방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싼 과일이 수박이다. 중년의 중산층 남자가 평균적인 휴양지의 평균적인 호텔 방에서 흔하디흔한 과일을 잘라 먹는 상황에서 무슨 그렇게 대단한 사랑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 안나의 넋두리와 구로
프의 수박은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의 기호들이다. 진부하게 순진한 여자와 진부하게 통속적인 남자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진부한 연애를 한다. 드라마틱한 열정도 없고, 감정의 승화도 없고, 속 깊은 대화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육체적인 무슨 쾌락도 없는, 그야말로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그런 관계가 지속된다.
---「Ⅱ 영혼의 양식과 육체의 양식/체호프의 수박_ 199~201p」 중에서
소비에트 사회에서 공동체적 삶의 이상은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혁명 이후 모스크바에서 ‘집’은 구체적인 거주지가 아닌 향수에 젖은 꿈이다. (…) 이것이 비단 혁명 후 모스크바만의 이야기일까. 현대인에게 집이란 이제는 사라진 것, 아름답고 아늑하고 자유로운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공동 식당에서 먹는 밥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물론 집밥이다. (…) 집밥이란 그러니까 가족이 함께 먹는 밥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가장 근원을 지지해 주는 일종의 ‘생명의 양식’과도 같은 개념이다.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노작가가 쓴 『아주 오래된 농담』은 가족과 함께 먹는 소박한 한 끼 식사의 가치를 찬양하는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껍질 안에 도사리고 있는 빈 공간을 들쑤셔낸다. 현금의 가정도, 영빈의 가정도, 영빈의 동생의 가정도, 영빈과 그의 어머니가 만든 가정도, 모든 가정이 껍질이다. 그런
데도 ‘집밥’의 관념은 꿋꿋하게 남아 있다.
---「Ⅲ 옛 음식과 새 음식/집밥_284~287p」 중에서
‘불타지 않는 원고’는 ‘불타는 레스토랑’의 이미지와 극명하게 대립함으로써 그 의미가 한층 더 강화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그리보예도프의 집’ 레스토랑은 지옥의 복사판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옥의 복사판답게 화염에 휩싸인 채 사라진다. 악마의 수행원들은 지상을 영원히 떠나기 전에 식료품 가게에 들러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 마지막으로 이 레스토랑에 찾아온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작가의 집’에서 문학과 작가에 관한 대화가 ‘처음으로’ 오간다! 그것도 작가가 아닌 악당의 입을 통해서. 불가코프가 삼류 작가와 어설픈 문인들을 조롱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는 작가의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더욱 큰 울림을 남긴다. 이것은 그냥 소설의 메시지가 아니라 세상에 대고 외치는 작가의 절규다. 그가 고독과 빈곤과 박해 속에서 살아가면서 붙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끈은 ‘원고는 불타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이었다. 그는 소비에트 시대를 살았던 문학의 순교자들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이 소설을 썼다.
---「Ⅲ 옛 음식과 새 음식/불타는 레스토랑_336~339p」 중에서
소설 속의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 오로지 개와 교수만이 미각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개는 개일 때도, 사람이 되고 나서도 엄청난 식욕을 보인다. 개 샤릭과 사람 샤리코프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은 식욕이다. 그리고 그 끈은 개와 교수를 이어주는 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프레오브라젠스키 교수의 이름이 내포하는 ‘변모’는 교수가 개를 사람으로 변모시킨다는 의미뿐 아니라 교수 자신의 변모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개를 사람으로 변모시킨 교수는 사람에서 개로 변모한다. 이쯤 되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동물인지 아리송해진다. 불가코프는 1920년대 러시아 사회에서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대단히 신랄한 코드를 선택한 것이다.
---「Ⅲ 옛 음식과 새 음식/개밥과 사람 밥_349~350p」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