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이든 창작품이든 높은 완성도가 요구된다. 계획된 모양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표면에 흠이 있다면 상품으로 판매되지 못하고 ‘불량품’이 된다. 또 창작품은 창작자의 눈높이에 들지 않으면 폐기된다. 하지만 제작 문화에서는 완성도가 꼭 높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적정한 수준에서 쓰임새를 충족시키면 된다. 특별한 도구와 기술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 때는 ‘품질관리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또 표면에 흠이 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명품을 만드는 뛰어난 제작자와 창작자는 물론이고 소중한 존재이지만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정기술과 마찬가지로 적정한 수준의 물건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생태적일 것이다. --- p.28
디자이너와 메이커 사이에 하이픈을 긋고 새로운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디자이너-메이커들의 출현은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디자이너가 스스로 돌려놓으려는 일상성의 발현이자, 더 나은 상황을 만들고자 하는 개선 의지가 만들어낸 대안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디자이너이면서 제작자인 디자이너-메이커들은 국가와 산업 주도의 디자인 환경에서 벗어나 주체적 사고와 태도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소비자와 직접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마련하여 지식과 문화를 공유하기도 하고, 유통 행위를 통해 생계를 꾸려가기도 한다. 커다란 변화를 꿈꾸기보다는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을 만들어 사람들의 인식을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디자인과 공예를 비롯한 예술 전 분야 간의 유대 관계를 형성하며 메이커 문화를 확장하고 있다. --- p.71~72
과거에도 맞춤형 제품과 소비자가 직접 만드는 DIY 개념은 존재해 왔지만 ‘메이커’라는 단어를 새삼스럽게 만들어낸 이유는 웹이라는 지식 공유 인프라를 배경으로 탄생한 개방, 공유, 협업의 정신이 DIY 문화와 만났기 때문이다(백동명, 2018: 98~106). 제작 문화는 수공예, 엔지니어링, 제조업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비교적 최근에 보편화된 디지털 제조 측면에서 가장 기본적인 자원은 바로 코딩 소스일 것이다. 웹을 통해 확장되는 코딩 소스는 리눅스나 아두이노 등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나 오픈소스 하드웨어에 활용해 프로그램과 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다. 또한 3D 프린터, 레이저 커팅 등 물리적인 가공을 위한 오픈소스도 이미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픈소스를 사용하는 것에서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개발·편집·수정에 참여해 제작물의 완성도를 높이고 자유로이 공유할 수 있는 소셜 코딩 플랫폼은 이제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 p.80~81
피지컬 컴퓨팅 수업의 이러한 어려움은 교수와 학생에게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교수자 입장에서 피지컬 컴퓨팅 수업은 품이 많이 드는 수업이다. 실습 기자재와 도구를 준비하거나 관리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일일이 점검해야 한다. …… 학생 입장에서는 어려움을 극복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보람도 큰 수업이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안고 가야 하는 수업이다. 일단 허들이 높다. 학생들은 ‘코딩 무서워’, ‘결국 작동이 안 돼, 망했어’, ‘팀 작업 싫어’, ‘이걸 디자이너가 꼭 해야 돼?’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외주를 맡겨서까지 만들었는데 워킹에 실패하면 그 결과는 심각한 좌절감으로 바뀐다. 이런 학생에게 ‘실패를 통해 배우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며, 협업을 통해 성장한다’는 말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생소한 직능을 배워야 해서 다른 수업보다 훨씬 더 힘든데, 학점마저 노력한 만큼 나오지 않고 팀 작업이 불쾌했다면 학생 입장에서는 ROI가 맞지 않는 수업에 불과하다. --- p.147~148
그렇다고 3D 프린팅이 모든 제조를 대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존의 제조 방식들은 소프트웨어 인터페이스에서 저장을 상징하는 디스켓 아이콘처럼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다만 무엇보다도 3D 프린팅 시대의 디자이너는 제작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에는 제작의 어려움 때문에 정교한 스케치와 렌더링에 더 큰 비중을 두었지만 이제는 렌더링을 하듯이 제작(프린팅)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합리적인 사물을 디자인하고 제작하기 위해서는 제조 방식에 따른 모든 경계를 허물고, 처음부터 새롭게 형태를 생각해야 한다. 물론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디지털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물질적인 내용은 출력할 경우에만 생각하면 된다. 이를 위해서는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비물질적인 디지털 직관이 발달해야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3D 프린팅 시대의 디자이너가 갖춰야 할 새로운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 p.177~178
3D 프린터로 인쇄할 입체 형상은 앞서 언급한 3D 프린팅에 적합한 형태의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많은 오류를 발생시키거나 품질의 저하를 겪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 특성을 반영한 형상 제작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3D 프린팅용 입체 형상을 제작하는 교육은 대부분 3D 프린팅용 형태 특성을 반영하지 않은 기존의 대량생산에 적합한 형상 제작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3D 형상 제작용 소프트웨어들은 설계 분야를 제외하고는 3D 프린터로 인쇄할 경우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를 포함하고 있어서, 이 요소를 제거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여 관련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3D 프린팅의 특징이 반영되지 않은 3D 형상 제작 교육을 3D 프린팅 교육에 포함시켜야 되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 p.187
지원 제도에 굉장히 숙달된 사람들은 지원을 받고 사라지고, 시장을 교란시키는 거죠. 하지만 정책 또는 산업 차원에서 이런 것들을 안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중요한 것은 오바마 정부 이전까지는 이런 것들이 자율적인 일이었다는 거죠. 메이커 운동의 현상을, 농사의 예를 들어볼게요. 과거에는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때 자신들의 지혜를 통해서 종자를 키우고 그것들을 마을 사람들과 나눠 썼는데, 기업들이 이것을 독점화하기 시작한 거죠. 농부들이 자기 지식을 다 빼앗기면서 아무런 조건 없이 배웠고, 조건 없이 대물림해 주던 것을 이제는 돈을 주고 사와야 하는 거예요. 이 종자는 다음 해에 싹을 틔우지 못해요. 마지막이에요. 키우려면 또 씨를 사야 해요. 메이커 운동도 그렇게 된 거죠. 공유지가 없어요. 예전에는 (만들기는) 모두가 공유하는 지식이었어요. 사고팔지 않았어요. 스스로 만들고 누구나 공유하던 것들인데 자본의 유입으로 자본에 민감한 사람들이 이것을 독점하고 그에 대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사용료를 받기 시작했어요. 결국, 이러한 방향으로 정부 정책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혜택을 받고 있고, 이전의 조직들은 거기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죠. 메이커에 대한 교육도 해야 하고, 메이커 정책도 펼쳐야 하고, 이를 또 산업이 수용하는 것을 반대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이러한 장치들이 자율적으로 메이커 운동이 가능한 플랫폼을 만들어주지는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 p.207
사실 저는 메이커가 태도라고 하는 게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메이커 커뮤니티의 초기부터 수공예 커뮤니티랑 같이 믹스가 안 되는 게 사실 저희 기획자들에게는 좀 문제였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이 사람들도 메이커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분들은 스스로 ‘나는 그냥 장인이고 이 기술은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라는 입장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메이커라는 거는 우리는 모든 걸 공유한다는 그 콘셉트를 받아들인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분들은 공유를 한다는 걸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닫혀진 커뮤니티 안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수공예는 특히나 그렇지만, 이 기술을 배우면 완성품은 이미 시장 가치가 있는 무엇이잖아요. 메이커가 뭘 만들었는데, ‘아, 이게 뭐야’, (웃음) 남이 봤을 때 이게 무슨 실 나부랭이고 선 나부랭이고. (일동 웃음) 생각을 들어보면 재미있긴 하지만 완성품으로 누구에게 팔릴 것인가, 그 시점에서는 정확하지 않은 거잖아요, 이게. 그래서 저는 수공예는 그냥 다른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집단으로 생각을 하기로 했어요. 어떤 도제 방식을 가진, 자체의 시장 가치를 가진 어떠한 완성된 기술을 전시를 하는 그런 것이더라고요. 그런데 메이커라는 단어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부를 만한 뭐가 필요했으니까, 우리가 그렇게 부른다, 이렇게.
--- p.253~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