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그 애 책을 들여다봤다. 몸을 앞으로 구부려 벌린 다리에 팔꿈치를 짚고 책을 읽고 있어서 꽤 잘 보인다. 하지만 글자가 너무 작아서 내용은 알 수 없다. 표지에 커버를 뒤집어 씌워 제목도 알 수 없다.
나도 문고본을 가져왔다. 취미가 같다는 건, 좋은 거니까. 뭐,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문고본을 읽는 고등학생 따위, 어디에도 없을 거다. 대박 멋지지 않나? 내 책은 다자이 오사무(일본의 대표적인 근대 소설가 - 옮긴이)의 《인간 실격》. 추천 도서라 샀지만 한 페이지도 못 읽었다. 그게 그러니까 겁나서……. ‘인간 실격’이라니. 인간을 ‘합격’이나 ‘실격’으로 평가한다면 나는 어느 쪽일까 생각해 본다. ‘실격’까지는 아니지만 ‘합격’도 아니겠지 싶다. 어중간하다. 몹시.
미나미고등학교의 그 애는 당연히 ‘합격’이다. 왠지 갑자기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곁눈질해서 흘끗 그 애를 점검했다. 열심히 문고본을 읽는다. 책 제목이 뭘까? 나는 뚫어져라 바라봤다. 삼? 삼국? 삼국지? 그게 뭐임? 《삼국지》라고 쓰인 것 같은데 대체 뭐지? 그런 제목은 처음 본다. 집에 가면 언니한테 물어봐야지. ---pp. 25~26
“엄마 중학생 때 여자애는 모조리 상고머리였어.”
엄마는 이렇게 핀잔을 준다. 거짓말이지? 지금 장난해? 요즘은 그딴 헤어스타일,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고. 30년 전과 지금이 똑같다고 생각하지 마. 그래서 이번엔 기필코! 그렇게 단단히 벼르고, 지겨웠지만 어중간하게 긴 머리도 자르지 않고 꾹 참고 새 미용실에 기대를 걸었던 거다.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런데! 완전 실패작이다. 앞머리를 이렇게 많이 남겨 놓으면 무거워서 어쩌라고.
“가벼운 느낌으로 해 주세요.”
분명히 이렇게 말했는데. 근데 왜 앞머리를 이렇게 많이 남겼냐고! 커트가 끝난 뒤, 거울 속 나를 보고 ‘이게 뭐야!’ 하고 놀랐다. 하지만 세련되고 예쁜 미용사 언니가 “어때?”라고 자신만만하게 묻길래 엉겁결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좋아요! 고맙습니다!”
난 바본가. 거긴 이제 다신 안 가. 이건, 헬멧이 아니라 하트 모양 전엽체라고. ---pp. 30~31
중학생이란 얼마나 골칫덩이고 망가지기 쉬운 생물일까. 시대가 바뀌어도, 이 나약함은 변하지 않는다. 이 아이 저 아이 할 것 없이 언제든 뾰족하게 날이 서서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이쪽까지 다치기 십상이다.
“내가 올해로 쉰둘이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어찌나 안타까운지 견딜 수가 없어요.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요. ‘너희 빨리 어른이 돼서 자유를 만끽해라.’ 그렇게 말하고 싶다니까요. 죽는 아이도 있는데, 정말로 아까워요. ‘아까운 요괴(1980년대 일본 공익 광고에 나온 요괴로 음식을 남긴 사람 앞에 나타나 그를 잡아먹거나 설교를 늘어놓음 - 옮긴이)’ 정도가 아니에요. 기타무라 선생님은 몇 살이죠? 스물여섯? 어머 웬일이야. 딱 내 절반이네. 그럼, 아직 힘들 때네요. 딱하기도 해라. 젊은이는 참 안됐어요. 선생님, 솔직히 말하면 지금 힘들죠? 세상은 아주아주 넓으니까 팔다리를 쭉쭉 펼 수 있어요. 아직 그런 세계, 모르죠? 하지만 상관없어요. 지금부터 앞날이 밝다는 걸 알면, 세상 일이 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선생님도 힘든 일이 있거든 언제든지 보건실로 와요. 재미있는 얘기가 많으니까요.”
오니시 나나미 때문에 연락 받고 보건실에 갔다가 이런 얘기를 장황하게 들었다. 오늘은 두 번이나 나이 질문을 받았다. 야부키 선생님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니 우스웠다. 팔다리를 쭉쭉 펼 수 있는 날이 온다지만, 전 아직 실감이 안 난다니까요. 아직 코흘리개 애송이라서요.
---pp. 208~209
“여자는 남자랑 같이 목욕하는 거 아냐. 몰라?”
“오빤 만날 거짓말만 해.”
한창 사춘기인 중학교 2학년 남자가 다섯 살짜리 여자애랑 함께 목욕하는 게 말이 되냐고. 아빠도 엄마도, 생각 좀 해 달라고요. 하지만 목욕은 되도록 빨리 하는 게 현명하다. 할아버지 다음에 하면, 수상쩍은 것이 욕조에 둥둥 뜰 때가 있다.
“빨리.”
가요가 배 위에서 쿵쿵 뛰었다. 무거웠다.
“알았어.”
나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얼마 전에 함께 욕조에 들어갔을 때, 가요 녀석이 내 고추를 가리키며 “그게 뭐야?”라고 물었다. 그땐 정말 진땀 뺐다. 그 뒤로도 “장난감이지?”라는 둥, “가발이지?”라는 둥 이상한 말을 지껄였지만 목욕이 끝나면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여동생은 나와 함께 목욕하는 게 되게 신 나는지 물총이며 오리 인형 따위를 챙겨 후다닥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가요랑 같이 목욕할게.”
거실에 얼굴을 내밀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일단 말해 둔다.
“빨리, 빨리.”
“알았어, 알았어.”
나는 목욕탕에 들어가기 무섭게 고추에 물총 세례를 받았다. 특별히 거기를 노린 건 아니고 마침 그 위치에 동생 손이 있던 모양인데, 솔직히 그래도 움츠러든다.
---pp. 239~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