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러 어떤 책을 집어 들었다면, 아마 그 책의 겉표지와 제목에 끌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책을 빌릴지 혹은 구매할지 결정하기 전에 여러분은 그 책이 표지와 제목에 맞는 책인지 확인하고자 책 표지에 적힌 편집자의 안내문을 읽고, 목차를 살피고, 서문과 서론을 확인할 것입니다. 오늘날 책의 제목과 책 표지, 안내문, 목차와 서문에 담긴 정보가 고대에는 글의 첫 단락에 담겨있어야 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책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했습니다. 이것이 각 복음서의 여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p.11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이 책들이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들려주기’ 위해 쓰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활자로 인쇄된 글에 너무 익숙해서 신문이나 잡지가 없던 세상, 컴퓨터의 문서 작성 프로그램이 아니라 손으로 한 자 한 자 글자를 적어야 했던 세상, 단어 하나하나를 베끼는 지난한 과정을 통과해야만 사본 한 권이 완성되던 세상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글을 듣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살던 세상 또한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 세계에서 책은 희귀한 물건이었습니다. 몇몇 사람만이 책을 소유하던 시절에,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복음서 한 권을 베껴 갖게 되었다면 그 책을 보물로 여겼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해 쓰였습니다. 후에 복음서들의 사본은 다른 지역, 다른 도시에 자리한 그리스도교 모임을 위해 만들어졌고 전해졌을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배드리기 위해 모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봅시다. 그들은 낭독되는 복음서를 들으려 애썼을 것입니다. 여기서 ‘듣는 것’과 ‘읽는 것’ 사이에 놓인 커다란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p.15
마르코 복음서가 하나의 드라마로 기능했으리라는 생각은 매력적인 발상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본문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동시대에 쓰인 그리스 드라마와의 흥미로운 유사성을 드러냅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 따르면 전형적인 비극은 다음과 같이 전개됩니다. 먼저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복잡한 갈등’complication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극을 피할 수 없게 하는 다양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후 이야기의 ‘전환점’turning point 혹은 ‘반전’reversal이 뒤따르는데 여기서는 발견 혹은 인식의 순간이 나타나고 인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얼핏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제 드라마는 여태껏 숨겨왔던 이야기의 본질을 열어젖히고 ‘대단원’denouement(해결untying), 즉 비극이 해소되는 결말을 맞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시작하는 첫 장면을 ‘프롤로그’prologue라고 불렀는데, 실제 드라마에서도 이 지점에서 관객들이 극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모든 것은 ‘에필로그’epilogue와 함께 끝맺습니다.---p.18~19
이 강의 내용의 세부 사항들을 다듬고 있을 때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팩스로 몇 가지 서류를 보냈는데 제가 받은 서류들은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제 팩스가 똑같은 내용을 담은 인쇄지를 세 차례나 뱉어내고 한쪽을 빠뜨렸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모든 인쇄물의 품질은 엉망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래 서류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산상 수훈 이야기에서 마태오가 우리에게 준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알고 이를 가르치는 이인 예수의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받아본 것이 모세를 통해 전해 받은 불완전한 팩스 사본이었다면, 이제 그들은 원본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가 모세보다 더 훌륭하기 때문이지요. 예수의 가르침이 모세의 것의 사본이 아니라, 모세의 가르침이 사본이며 예수가 우리에게 원본을 주는 것입니다. ---p.82~83
루가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과거에 하느님께서 하신 일, 그분이 예수 안에서 그를 통해 하시는 일, 그리고 그분이 예수의 제자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 하시는 일을 연결 짓기도 합니다. 처음 두 장 내내 루가는 계속해서 하느님의 거룩한 영, 성령을 언급합니다. 이는 이야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드러내는 중대한 실마리입니다. ...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이 가진 패를 보여주고 이야기의 의미를 풀어낼 열쇠를 주는 곳은 바로 그들의 도입부입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알게 된 것들에 비추어 나머지 이야기를 듣는 자리에 초대된 것입니다. 그러나 루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속편을 통해 교회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 또한 성령의 활동임을 계속해서 알려줍니다.---p.111~112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자신만의 서문을 통해 우리가 이 복음서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를 건네주었습니다. 태초에 등장했던 말씀, 그리고 역사를 통해 울려 퍼졌던 그 말씀이 이제 예수라는 인물 안에서 육신이 되었음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예수의 말과 활동이 곧 하느님 당신의 활동임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창조되던 때 어둠 속을 비추던 빛, 하느님께서 온 역사를 통해 스스로를 당신의 백성에게 계시하실 때 비추던 빛이 예수의 삶과 죽음 가운데 환히 비추었으며, 그렇기에 어둠은 빛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가장 밝게 드러난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에서 이뤄진 마지막 승리에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예수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승리에 찬 외침입니다.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p.155~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