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벗고 거실을 지나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는 흠칫 멈춰 섰다. 헤드셋을 쓴 그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엎드려 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은서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용하를 깨웠다. 은서가 그의 몸을 흔드는 순간, 풀섶처럼 그가 왼쪽으로 쓰러졌다. 초점 잃은 눈동자, 벌어진 입술, 창백한 얼굴. 숨은 이미 멎어 있었다.
등줄기가 오싹해지고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쳤다. 그 순간 책상이 흔들리면서 컴퓨터 스크린세이버가 사라지고 화면이 나타났다. 그는 게임 중이었다. 은서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면서 마우스를 눌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화려한 게임 공간에서 한 마법사가 온몸이 마비된 채 석고상처럼 서 있었다. ---p.9
청와대는 물론 정부기관, 대기업 시스템은 물론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FBI를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비밀문서를 해킹하기도 했으며, 홈페이지에 hacking for people이라는 글자를 화면 가득 채우고, 마치 날인처럼 화면 오른쪽 구석에 by CHAOS라는 흔적을 남겼다.
일주일 뒤 경찰은 국과수 발표 자료를 인용, 부검 결과 외부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면서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밝혔다. 한편 평소 카오스 멤버를 흠모하는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리트베르 추모 사이트를 개설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BGM으로 흘러나오는 가운데 추모 촛불과 백합, 사진이 내걸린 추모 사이트에는 수많은 네티즌이 댓글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p.24
펄스타인은 집 근처 편의점에서 밤참거리를 집어 바구니에 담았다. 바나나 한 묶음, 캔 맥주 한 박스, 감자 칩, 쥐포. 한 손으로는 맥주 박스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나머지 물건을 담은 봉지들 들고 오피스텔로 향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발을 안으로 내딛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펄스타인은 벽에 기댄 자세로 시선을 문에 고정했다. 사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얼핏 봤을 뿐인데 검은 티와 눌러쓴 모자, 음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3층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길을 재촉했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다가 끊어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도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던 음산한 사내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p.64
9시 28분, 지혁이 탄 택시가 호텔 입구 쪽으로 들어가는데 경찰차 두 대와 빨간 경광등이 요란하게 돌고 있는 응급차 한 대가 입구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100여 미터 앞에서 택시에서 내린 지혁은 무슨 일인가 하고, 서둘러 경찰차 앞으로 다가갔다.
호텔 주위는 경찰차와 출입 엄금이라고 붙은 띠가 정문 부근에 붙어 있었다. 호텔 정문 쪽 아스팔트에는 사람 모양의 하얀 스프레이 페인트 자국과 핏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혁은 인터넷기자협회에서 만든 기자 신분증을 들이밀며 호텔 매니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묵묵히 침묵을 지키던 매니저는 지혁의 집요한 질문에 결국 입을 열었다.
“투숙객이 투신했습니다.”
“혹시, 몇 호실 손님인지 아시나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1416호실 손님입니다.”
“1416호실?”
지혁은 태호가 알려준 숙소를 되뇌었다.
‘이런, 빌어먹을.’ ---p.161
“처음 요한계시록전을 만들기 위해 함께 스페인 세계 모바일 게임 심포지움에 참가했을 때를 기억하나? 그때 우리는 그 유명한 가우디가 설계한 라 샤그라다 파밀리아 성당(la Sagrada Familia)에 들렀었지. 그 위용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성당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자네는 성당 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더군.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자네 곁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네. 성당이 완전하게 건축되려면 100년이 더 남았다고 했던가, 아무튼 성당 정문에 세워진 숫자 동판 기억나나? 문자들이 새겨진 작은 동판 옆에 자리 잡은 숫자 동판, 그걸 가지고 내가 문제를 냈던 거 기억하나? 아마도 자네와 나만 공유하는 추억일 거야, 그게 열쇠가 될 걸세.”
태호는 그 순간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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