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여 년을 돌아보면 환대가, 아니 환대의 부재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세계는 난민이나 이민자 문제로 몸살을 앓았고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다. 많은 나라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나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자기들이 조금만 잘살면 못사는 나라의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차단하는 게 세상이다. (.……) 메르켈 독일 총리가 칭송을 받은 것은 자꾸만 벽을 쌓으려 드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 100만 명 이상의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위대한 결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 메르켈은 타자에 대한 적대가 기승을 부리는 이 지독한 냉소와 무관심의 시대에도 환대가 존재할 수 있음을 감동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아쉽게도 메르켈보다는 트럼프가 더 많다. 현대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환대가 아니라 그것의 부재이다.
--- p.23
인간이 가진 놀라운 능력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기 것처럼 느낄 줄 아는 능력, 즉 공감 능력이다. (.……) 이웃에 대한 사랑도, 타자에 대한 환대도 여기에서 나온다. 문학 역시 그러한 공감 능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예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거나, 존재하더라도 자기 얘기만 반복하는 자기중심적인 몸짓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문학은 타자에 관한 것이고 또 그래야 한다.
--- p.69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는 낮은 자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환대다. 우리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것처럼, 작가는 세상의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 즉 짓밟히고 억눌린 타자들에게 목소리를 ‘준다’. 음식이 물질인 것처럼 언어도, 목소리도, 스토리도 물질이다.
--- p.93
계층의 사다리에서 가장 하단에 있는 존재가 그 타자다. 그 하단은 침묵의 자리이자 상처의 자리이다. 따라서 누군가는 그들의 침묵과 상처를 대변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문학의 몫이요 예술의 몫일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난관에 처한다. 한편에는 낮은 자를 대변해야 하는 윤리적 책무가, 다른 한편에는 낮은 자를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대변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 있어서이다.
--- pp.95-96
타자를 향한 윤리적 책임이나 환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의 문제이고, 생각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며, 레비나스의 말처럼 심지어 언어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문제라서 그렇다.
--- p.139
우리를 환대하는 사람을 환대하는 것은 상식의 영역이요 경제학의 영역에 속한다. 우리의 환대를 받은 사람은 언젠가 우리에게 환대를 돌려줄 것이다. 환대를 돌려주지 못하면 적어도 그 사람의 마음에 짐이라도 남을 것이다. 그게 환대의 경제학이다. 그러나 진정한 환대는 경제학이나 경제원칙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거스르는 것으로,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아니 보상은커녕 때로는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는 모험을 감수하며, 그냥 주는 것이다.
--- pp.174-175
미래는 용서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말은 타자에 대한 따뜻함이 없다면,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용서는 환대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 p.292
타자를 향해 인간의 등을 떠미는 환대의 바람은 곳곳에 불지만, 정작 환대의 고향인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에서는 불지 않는다. 환대의 고향에서 환대가 훼손당하고 모욕당하는 게 현실이다. 아이러니는 그들이 세상의 타자였을 때 나치 독일에게 받은 상처와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타자인 팔레스타인인들을 상처와 고통 속으로 내몰며 그렇지 않아도 ‘벌거벗은’ 그들을 더 ‘벌거벗은’ 타자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즈의 소설이 출간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타자의 환대는 더욱더 요원한 일이 되어가고 (.……) 있다.
--- p.311
‘환대의 문턱’과 ‘환대의 부정’을 동시에 의미하는 ‘파 도스피탈리테’의 양가적인 속성은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사는 집이 개인의 집이라면 국가는 공동체의 집이다.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어떠한 문턱이든 같은 기능을 한다. 개인의 집 문턱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문턱인 출입국관리사무소나 이민국은 타자를 맞아들이는 환대의 문턱이기도 하지만, 타자를 돌려세우는 적대의 문턱이기도 하다.
개인의 집이든 공동체의 집이든 중요한 것은 그 집의 주인이 환대의 주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를 맞아들이거나 돌려세우는 것은 주인의 권리다. 주인이 손님을 아무리 극진하게 대한다 해도 주인은 주인이고 손님은 손님이다. 이것이 환대의 상식이요 원칙이다. 인간이 어디든 갈 수 있어야 하고 환대받을 권리를 갖고 있다는 칸트의 세계주의도 따지고 보면 그 상식과 원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환대의 상식과 원칙은 늘 훼손당하고 침해당했다. 손님이어야 할 사람--- pp.들)이 주인--- pp.들)의 자리를 차지한 예는 수도 없이 있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훼손과 침해의 역사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주인의 의도와 다르게 자기 마음대로 문을 열고 문턱을 넘어 주인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면서 그 집을 독차지한 식민주의 역사는 그러한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 pp.317-318
환대는 마음이면서 물질이다. 따뜻한 말로 어루만질 때는 마음이고, 필요한 음식을 가져다줄 때는 물질이다. 이처럼 환대는 빈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든 물질이든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행위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돌려받을 것을 기대해서도 아니고, 이성적인 판단을 해서도 아니라 가슴이 시켜서 자발적으로 ‘주는’ 실천적 행위다. --- pp.……) 주고받는 경제의 원칙을 초월한 ‘진짜’ 선물이다. 그는 ‘그냥’ 주고 상대는 ‘그냥’ 받는다.
--- pp.395-396
환대는 타자의 “이름이 무엇이든, 언어가 무엇이든, 성별이 무엇이든, 종種이 무엇이든, 인간이든 동물이든 혹은 신적인” 존재이든,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환대할 수 있는 대상을 환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환대할 수 없는 대상을 환대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적인 환대일 것이다. 바로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무조건적 환대”의 개념이다. 어쩌면 그러한 환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윤리적 삶의 나침반이어야 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