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인류의 조상은 약 20만 년 전에(어쩌면 그보다 약간 이후에) 동아프리카의 어딘가에서 진화했다. 이들이 약 10만 년 전 무렵에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했고, (……) 동아프리카에서 출현해 이후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초기 인류의 집단 중 극히 일부에서 우리 모두가 나왔다는 사실이 바로 세계사의 근본적 통일성을 설명한다.
--- p.1권, 57
아메리카 대륙이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은 곧 이곳에 발달한 문명들이 유라시아에서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특징을 여럿 가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 이곳에는 양, 염소, 돼지는 물론,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로서 소, 말, 당나귀 등 축력(畜力)을 제공해 줄 동물이 전혀 없었다. 안데스 지역에서 라마와 알파카를 길들이기는 했으나, 고작 짐을 운반하는 데에나 쓰였을 뿐이었다. 그 결과 바퀴의 제작 원리를 알아 장난감에 달기까지는 했어도, 그것을 활용해 육상 수송 수단을 발달시키지는 못했으며 농사의 모든 활동도 오로지 인력에 의존해 이루어졌다.
--- p.1권, 197~198
중국의 경우 기원전 1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먼 옛날 고전 문헌도 얼마든 원문 그대로 손쉽게 읽어 낼 수 있다. 문헌이 쓰인 당시의 언어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든 상관없이 말이다. 따라서 지중해와 유럽 세계의 언어가 그리스어, 라틴어, 갖가지의 현대 로망어, 영어, 독일어 등으로 갈라지면서 서로의 말뜻을 못 알아듣게 된 데 반해, 중국은 이런 식의 복잡한 변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언어 변화 때문에 ‘상실’을 경험한 유럽과 달리 중국은 예로부터 쌓인 방대한 양의 지식과 전통을 온전히 지켜 올 수 있었다.
--- p.1권, 326
기원전 90년 이후의 약 한 세기는 한과 로마 제국 모두 내부 위기를 겪은 시기였다. 그러나 두 곳 모두 나라의 영토가 크게 줄지는 않았으며, 위기를 겪고 난 뒤에는 새로운 통치 체제를 출현시켜 기원후 2세기 말까지 오래도록 번영과 안정을 누렸다. 한과 로마처럼 멀리 떨어진 두 나라가 어떻게 이 단계에 들어 대략 비슷한 정치 노정을 걸었는지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유라시아 대륙 각지의 상호 연결성이 깊어진 결과 한 지역에서 빚어진 분란이 다른 지역들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다.
--- p.1권, 437
5세기에 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 3세기 동안 서유럽은 규모도 작고 힘도 매우 약한 일련의 왕국으로 잘게 분열되었다. 이곳의 인구는 낮은 수준에 머물렀으며, 주민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살던 촌락들은 대체로 나무가 우거진 숲 사이에 고립된 채 거의 모든 생활을 자급자족으로 영위해 나갔다. 몇 군데에 성읍도 자리하고는 있었지만, 성읍이라고 해야 그 규모는 촌락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지역 내의 아주 근거리가 아닌 곳으로는 교역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통신 상황은 열악했고 군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도 최소한이었으며, 국력은 대체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했다. 전반적으로 당시 서유럽의 경제 및 정치는 일본만큼이나 발달 수준이 낮았다.
--- p.1권, 577~578
기원전 2000년에 3000만 명가량이던 세계 인구는 1000년 후 5000만 명가량으로 증가했다. (……) 기원전 500년에는 인구가 두 배로 불어났고 기원후 1세기에는 또다시 두 배가 늘어 세계 인구는 약 2억 명을 헤아렸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돌연 상대적인 정체가 시작되어 장기간 그 추세가 이어졌다. 이제는 추가로 경작할 만한 땅이 거의 없었던 데다, 기술 발전도 전반적으로 정체를 보였고, 아울러 유라시아 대륙이 하나로 연결된 결과 질병이 널리 확산되면서 인구 증가에 심각한 제약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원후 1000년 무렵에 세계 인구는 약 2억 5000만 명 수준으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 p.1권, 615~616
역사에서 몽골족은, 어떤 동기나 일관성도 없이 요란하게 정복, 약탈, 분탕질, 파괴를 일삼은 민족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는 실상에서 많이 벗어난 이야기다. 몽골족은 유라시아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제국을 이룩한 민족이었다. (……) 1200년 이후 약 150년 동안의 유라시아 역사는 대부분 몽골족의 영향을 논하지 않고는 그 이해가 불가능하다.
--- p.1권, 752~753
역사상 중대한 의미를 갖는 두 가지 발전이 한반도 내부에서 일어난 것도 조선 왕조 초창기의 일이었다. 그 첫 번째는 가동 활자 인쇄술이 세계 모든 곳을 제치고 한반도에서 제일 먼저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한글 창제다. (……) 하지만 모음 열한 개와 자음 열일곱 개로 이루어진 이 한글도 한자를 완전히 대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 p.1권, 806
유라시아의 서쪽으로 갈수록 화약 무기의 영향은 훨씬 더 위력적이었다. 1420년대부터 오스만 제국이 부활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1480년대 즈음에 발칸 지역의 대다수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대체로 신무기들을 제대로 이용한 덕분이었다. 16세기에 인도에서 무굴 제국이 흥기할 수 있었던 저변에도 역시 화승식 머스킷 총과 (유럽보다 약 30년 앞선) 야전 대포의 도입이 있었다. 일본에서 화약 무기는 16세기 말에 영토를 통일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은 유럽이었다.
--- p.2권, 98
유라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쳤던 네 번째 위기는 ‘17세기’의 위기로, 1560년부터 1660년까지 지속되었다.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은 최악의 문제들을 모면했고 일본은 상대적으로 아직 고립되어 있었지만 별다른 시련을 겪지 않았다. 중국은 극심한 혼란에 시달렸다. 17세기 중엽에 300년간 이어져 온 명 제국이 무너지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국을 통일해 1911년에 중국 제국이 쇠망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유라시아에서 ‘17세기의 위기’로 최악의 영향을 받은 지역은 단연 유럽이었다. 1560년부터 1660년까지 유럽은 전쟁과 내란, 기근, 그리고 숱한 농민반란으로 특징지어진다.
--- p.2권, 170
영국의 경제는 산업 생산 분야에서 점점 더 증가하는 노동력을 부양하기는커녕 인구 성장을 떠받치기에도 부족한 식량 문제의 덫을 어떻게 벗어났을까? 해결책은 가장 가까운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었다. (……) 18세기 말엽에 아일랜드는 영국이 수입하는 곡물과 버터, 고기의 절반가량을 공급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들 물량은 영국의 전체 소비량의 6분의 1에 달해, 증가하는 인구의 수요를 충족하기에 실패한 영국 농업에 매우 중요한 보완책 역할을 했다. 아일랜드로부터 식량을 수입하지 못했다면 19세기 영국은 경이적인 인구 증가도, 실질적인 산업화의 시작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p.2권, 253
18세기 초부터 유럽은 스스로를 특별한 지역으로 여기며, 세계의 다른 지역들보다 우월한 독특한 특질을 체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랜 반(反)이슬람 세계관 및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로 삼은 흑인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강한 신념 외에도 유럽 상류층은 새로운 개념을 발전시켰다. 특히 그들은 ‘진보’를 신봉하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귀족들에게 진보란 인간이 궁극적인 완전함에 도달할 가능성과 자연을 지배하고 사회를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유럽은 천부적으로 진보의 담지자였다. 유럽은 ‘문명’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고, 조금씩 다른 여러 사회를 유럽의 이상에 비추어 서열화했다.
--- p.2권, 302
실상 선진 산업국들이 지닌 혁명에 대한 두려움은 대체로 상상이 만들어 낸 공포였다. 1920년대 초엽에 유럽은 강력한 보수층에 기초해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태였다. 대부분의 경우 과거 19세기에 자유주의 정당들은 (영국의 경우처럼) 분열되거나 지지 기반을 보수당들에 빼앗기고 위축되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이런 정치 환경 안에서 승승장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선거 지지율의 상승세도 20세기 초엽에는 매우 확고해 보였지만 곧 둔해졌고, 유럽 사회에서 노동계급이 비율적으로 최고점에 도달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득표율은 어디서든 절반을 넘기지 못했다.
--- p.2권, 434
중국 경제가 거둔 성과는 여느 신흥 산업국가들의 경제적 성과와 대등했다. 전체 성장률은 1930년대의 소련과 1960년대의 브라질, 1970년대의 한국만큼 높았고 훨씬 더 오래 유지했다. 산업 생산량은 1950년대 초엽 이후에 30년 동안 연간 10퍼센트 이상 증가해 세계의 산업 생산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몫은 두 배로 증가했다. 1980년대 초엽에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철강을 제조했고, 투자 수준 역시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아이들의 교육에 들어가는 평균 연수도 같은 기간에 두 배로 증가했다.
--- p.2권, 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