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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싱 인 더 레인

레이싱 인 더 레인

[ 개정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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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빗속을 질주하는 법』(2008), 『엔조』(2011) 개정판입니다.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44쪽 | 436g | 138*210*22mm
ISBN13 9791165340520
ISBN10 1165340526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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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인간과 비슷하다고 느끼며 살았다. 내겐 다른 개와 다른 뭔가가 있었다. 개의 몸을 입고 있지만 그건 껍데기에 불과하다. 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가 중요하다. 영혼, 내 영혼은 인간인 것을. 난 이제 인간이 될 준비를 마쳤다. 죽음으로 나의 모든 걸 잃으리란 걸 안다. 기억 전부를, 경험 전부를 잃겠지. 그것들을 안고 다음 생으로 가고 싶지만-스위프트 가족과 겪은 일이 워낙 많아서-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내가 억지로 기억하는 것 외에 방법이 있을까? 내가 아는 걸 영혼에 새기려고 애쓸 수밖에.
--- p.8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조금 전에 한 일들을 기억하지 말 것. 기억하면 현재를 놓치게 된다. 데니는 늘 말했다. “아주 살짝, 페달이 달걀 껍데기인 것처럼 살며시 밟아야 해. 달걀을 깨면 안 되니까. 빗속에서는 그렇게 운전해야 하는 거야.”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목이 항상 맘에 든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조금 전에 한 일들을 기억하지 말 것. 기억하면 현재를 놓치게 된다. 레이싱에서 성공하고 싶은 드라이버라면 기억해선 안 된다. 데니는 레이싱을 움직임이라고 말한다. 한순간의 일부이며, 그 순간을 제외한 어떤 것도 인식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은 나중에 해야 한다.
--- p.19

레이스 당일, 출산 예정일이 일주일 이상 남았는데도 진통이 시작되었고, 이브는 급히 산파들을 불러들였다. 괴성을 질러대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이브는 빨간 살덩어리를 낳았다. 아기는 꼼지락대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아기는 입을 오물대며 이브의 젖꼭지를 찾아 빨기 시작했다. “잠깐만 혼자 있어도 될까요?” 이브가 말했다. “그렇게 해요.” 산파 한 사람이 대답하고 문 쪽으로 갔다. “강아지는 우리랑 나가야지.” 다른 산파가 나가면서 내게 말했다.
“아뇨…… 개는 그냥 두세요.” 나는 그냥 있으라고? 이브의 측근에 포함되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산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할 일을 했고, 나는 이브가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황홀하게 지켜보았다.
--- p.30

“엔조, 이리 오렴.” 그녀가 말했다. 나는 꼬리를 흔들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브가 병원에 입원한 후로 본 적이 없어서, 이런 모습으로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병원에 가서 더 병을 얻은 것 같았다.
“내가 아파서 엔조가 화났나 보네.” 내 진심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감정이 너무 복잡해 오늘까지도 확실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침대 옆으로 가서 방석처럼 그녀 앞에 엎드리는 것뿐이었다. “나도 이런 나를 보는 게 싫은걸 뭐.”
--- p.127

“자리에 꼭 붙어 있어. 본격적으로 속도를 올릴 테니까.” 데니는 가속의 정점에서 운전대를 풀었고, 차는 턴을 빠져나가는 지점을 향했다. 그가 가속페달을 힘껏 밟으면 우리는 코너를 날듯이 빠져나와 다음 턴, 그다음 턴을 향해 내달렸다.
“엔조, 괜찮니?” 데니가 백스트레이트를 시속 180킬로미터로 달리며 내게 물었다. 나는 두 번 짖었다. “한 바퀴만 더 돌까?” 그래요, 한 바퀴만 더. 제발 한 바퀴만 더 돌아요! 그 한 바퀴는 보다 극적이었다. 나는 데니가 시키는 대로 눈을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봐.”
--- p.165

아침까지도 데니는 이브가 운명한 걸 몰랐다. 난 안개가 낀 것 같은 꿈에서 깬 즉시 알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데니는 나를 차에 태우고, 머서섬 동쪽 해안에 있는 루터 버뱅크 파크로 데려갔다. 따스한 봄날에 가볼 만한 개 공원이었다. 데니가 공을 던지면서 내게 말했다. “이브를 집으로 데려올 거야. 조위도. 다 같이 살아야겠어. 이브와 조위가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나는 데니의 발치에 공을 떨어뜨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휴대폰을 받고 있었다. 한참 후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이브가 죽었어.” 데니는 그렇게 말하더니 큰소리로 흐느꼈다. 그가 몸을 돌리고 팔에 얼굴을 묻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 p.174

“고소 내용을 철회하시겠습니까?” 판사가 물었다. “그러겠습니다. 모두에게 고통을 안겨줘서 정말 미안해요. 철회합니다!” 애니카가 힘없이 말했다. 판사가 말했다.
“놀라운 일입니다! 개가 말을 해 진실을 밝혔습니다. 본 소송 건은 기각합니다. 스위프트 씨는 가셔도 좋고 딸의 양육권을 얻었습니다.” 나는 증인석에서 뛰어 내려와 데니와 조위를 껴안았다. 마침내 우리는 한 가족이 되었다. 다시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 p.319

나는 준비가 됐다. 그런데… 데니가 너무 슬퍼한다. 그는 나를 몹시 그리워할 것이다. “넌 늘 나와 함께였어. 넌 언제나 내 엔조였지.” 맞다. 그랬다. 그의 말이 옳다. 데니가 내게 말한다. “괜찮아. 이제 가야 한다면 가도 돼.”
나는 고개를 돌린다. 거기, 내 앞에 내 삶이 있다. 내 어린 시절이. 내 세계가. 내 세상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내가 태어난 스팽글 들판 주변, 오르내리는 구릉을 뒤덮은 황금빛 풀이 바람에 흔들려, 그 위를 지나면 배를 간질인다. 하늘은 파랗고 태양은 또 얼마나 동그란지. 그 들판에서 잠시만 더 놀고 싶다. 다른 존재가 되기 전에 조금만 더 나 자신으로 있고 싶다.
--- p.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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