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와 카스텔라의 아내에게 취향은 ‘남과 나를 구별 짓기 위한, 그러니까 내가 남보다 좀더 우월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잣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취향은 자기 자신을 틀 안에 가두고 주위 사람들마저 숨 막히게 할 뿐이다.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진짜 취향은 ‘남보다 나은 것이 아니라 누가 뭐라 하든 나에게 좋은 것’을 의미한다. ---「사랑도 예술도 결국 취향이다」, P.23
물론 굉장히 많은 남자들이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해야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거 안다.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특히나 『위대한 개츠비』를 생각하면 남자들이 돌연 불쌍해진다.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벽장을 값비싼 셔츠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 개츠비의 비극을 보고 있으면 연인들을 끌어당기는 상대의 ‘취향’이라는 게 그 사람의 감수성이라든가 미적 방향성이 아니라 ‘폭넓은 상품의 사슬에서 그 물건이 점하는 위치’ 같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부자보다 가난뱅이를 좋아하는 여자」, P. 49
불평등을 가속화하고 전 세계를 자본을 위한 단 하나의 시장으로 만들려는 그 압도적인 힘에 맞서 아이다와 사비에르는 각자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그렇게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여겨진 연애 이야기가 세계화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잘 들어봐요, 내가 한입 깨물 거예요」, P.62
난리 법석을 떨며 호들갑스럽게 칭송하던 천만 원짜리 발망Balmain 재킷이 ‘6개월이 지나면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일종의 역겨움’으로 뒤바뀌는 것이 유행이라면, 소박함은 성장의 한계에 도달해서 이젠 거대한 쓰레기통 수준에 이른 우리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 항구적으로 추구할 만한 가치라는 점에서 말이다. 이런 결심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난 남들에게 흉잡히지 않기 위해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서커스에 동참하고픈 생각이 없다!” ---「망할 놈의 로고에서 헤어나는 법」, P.69
예전에 영화 〈원 나잇 스탠드One Night Stand〉에서 “걱정 마. 인생은 오렌지니까”라는 대사를 듣고 한참을 고민했던 적이 있다. 왜 오렌지라는 거지? 바나나나 토마토, 혹은 복숭아는 안 되나?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정답이었다. 누군가에게 인생은 오렌지일 수 있고 또 바나나일 수 있고, 혹은 개떡이나 똥파리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저마다 각자의 의미로 인생을 사는 거다. ---「인생은 오렌지다」, P.76
그날 밤 KBS 뉴스에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에게 교복이나 다름없이 소비되고 있는,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아무튼 어깨 부근에 로고가 박혀 있는 한 스포츠브랜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로고는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암묵적인 교칙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 슬프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교활한 장사꾼들이 만드는 값비싼 로고가 앞날이 창창한 우리 아이들의 삶을 이토록 무기력하게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셨나요. ---「물은 물이요, 간지는 간지로다」, P.90
웹툰 〈패션왕〉을 보면 알 거다. 패션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패션은 일종의 부조리한 충동이고 퇴행성 마약이다.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도취나 열락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들은 어떤 ‘룩’ ‘핏’ ‘간지’ ‘에지’에 취한다. 그 취기가 기분을 업시키고 자기 내면의 불안감마저 지워준다. ---「저 오만하게 삐딱한 프라다 드레스를 보라」, P. 95
그런데 ‘선망’도 아닌 것을 ‘선망’하도록 만드는 일이 바로 에디터가 할 일이다. 욕망을 생산 가공하고 호들갑스럽게 부추기는 일.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는 알 수 없는 께름칙함. 그러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거다. 나 또한 그랬다. 매달 마감 때가 되면 거의 신경쇠약 직전의 상태가 되어 애타게 기도한다. “신이시여, 비나오니 이놈의 사무실을 어마어마한 따귀로 세차게 갈기시어 납작 뭉개소서. 제발 바쁘시더라도 몸소 왕림하시어 모든 걸 마감토록 하옵소서.” ---「보그와 공황장애」, P.123
정말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시대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달라진 건 별로 없지 싶다. 다만 아프다 아프다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긴 한다. 경제대국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사회의 병폐를 이제는 많은 사람이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면 뭐하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무력감과 불안감이라니…… 변화와 쇄신이야말로 지배자들 이 늘 써먹는 비장의 ‘한 수’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래서, 다시 시가 읽히나보다. ---「다시 시를 읽는 즐거움」, P.154
행복한 사람은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경쟁심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거다. 누구한테든 복수를 해주고 싶을 만큼 병들게 만든다. 그 쓸데없는 경쟁심이 말이다. 게다가 요즘은 온통 부당한 폭력에 저항하거나 위험 요소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전무한 나약한 아이들뿐이다. 자신의 진짜 느낌과 본능적 욕구가 아닌 다른 사람들(특히 자식의 입신양명을 바라는 부모)의 바람에 따라 자아를 형성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이 세상을 자신의 주관적 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곳으로 보지 못하고, 그저 세상의 질서에 순응해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인생을 대부분 무의미하고 하찮게 느낀다는 거다. ---「혼자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는 법」, P.161
그녀는 알고 있었던 거다. 우린 모두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호기심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그렇게 대하면 상상하지도 못한 엄청나게 큰 에너지를 발견할 수 있는 게 바로 삶이라는 걸. 그게 낯가림과 수줍음이 심한 내성적인 성격의 피나 바우쉬가 무대 위에서는 어떤 창작자보다 파격적이고 혁신적이며 역동적인 작품을 선사할 수 있었던 진짜 비밀이 아니었을까. ---「피나 바우쉬, 나를 울게 한 최초의 무용가」, P.211
과연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움과 학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애리조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천식을 앓던 아이 수전 손택에게 그것은 ‘운명과 불운의 감옥을 탈출하여 더 큰 세계로 가는 여권’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녀는 누구보다 투쟁적으로 읽었고 세상 만 가지 아름답고 흥미로운 것에 대하여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몰두했다. ---「수전 손택, 그 열정의 파편들」, P.219
장 그르니에가 『섬』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그 일생이 동터오는 여명기에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고. 좀 시시한 예일 수 있으나 내 경우는 어린 시절 구영탄이라는 캐릭터에게 흠뻑 빠져 있던 ‘결정적 순간’이 있었던 거다. 그 순간들에 의해 지금의 나라는 인간의 기본 정서라든가 취향 같은 게 만들어진 거고. 결코 억지가 아니다. ---「구영탄과 그의 후예들」, P.250
특히나 이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능력문제로 치환하여 ‘저항’이 필요한 시점에 ‘아부’를 가르치는 스타강사 따위는 필요 없다. (김미경이라는 분이 그랬다. 비굴하면 좀 어떠냐고. 자기 남편처럼 여자들도 상사에게 아부할 필요가 있다고.) 그런 사람들이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멘토라니, 차라리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나, 그리고 당신의 멘토를 찾아서」, P.271
"현재 우리의 문화는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이 가진 물질적인 것들, 가장 최신의 휴대폰, 가장 최신의 맥mac, 가장 최신의 헤어스타일, 그리고 자신의 생김새로 정의하게끔 압박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음모 같은 거죠. 그들은 젊은이들이 이러한 물건을 가지고 있거나, 이렇게 생겨야지만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길 원해요. 하지만 이건 다 헛소리bullshit에 지나지 않아요. 기업의 거짓말이죠." ---「나, 그리고 당신의 멘토를 찾아서」, P.274
일단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일자리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아직 해고되지 않은 사람들도 일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일에 밤낮없이 파묻혀 지내며 회사와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는 건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 됐다는 거다. ---「숨쉬러 나가다, 확실히」, P.281
88만원 세대를 대표하는 기호 88번이 대통령이 되는 세상, 적어도 그런 꿈을 꾸며 젊은이들이 얼마 되지 않은 대기업 취직자리를 놓고 피 터지게 경쟁하기 보다 다 함께 연대하는 세상, 멋지지 아니한가? 국가경제가 쪽박을 차게 된 다음에야 시민과 청년들의 투쟁으로 진정한 의미의 진보정당이 정권을 잡 게 된 아이슬란드의 경우처럼 감히 이룰 수도 없는 꿈은 실은 아닐 터이다. 여하튼 세상은 돈키호테처럼 불온한 꿈을 꾸는 몽상가들에 의해 한 뼘 씩 진보했음을 잊지 말 것.
---「88만원 세대의 뜨거운 가난」,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