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들은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는 주제를 제시하는 게 가능한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에 논쟁을 거듭했다. 많은 학자들이 이런 주제를 찾는 일은 무익하다고 주장했다. 성경이 숱한 주제를 다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것들을 하나로 묶으려 하지 말고 따로 따로 들여다보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경의 각 부분이 풍부한 다양성 속에서 개별적으로 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성경의 모든 부분을 하나의 틀에 욱여넣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반드시 새겨들어야 하는 중요한 경고다. 성경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서 또 성경이 어떻게 아귀가 맞는지 보도록 하는 데 사용되는 주제는 성경 자체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 주제는 성경 각 부분이 뚜렷하게 기여할 수 있을 만큼 폭넓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 「들어가며」중에서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나라의 패턴을 본다. 하나님의 백성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처소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 그 결과 이들은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 안타깝게도 오래지 않아 사람의 죄가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그 이후로 줄곧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다시 세우고 한 백성을 불러 자신과 다시 교제하게 하려고 일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창조의 목적을 누리고 일곱째 날의 완전함인 그분의 안식에 들어가길 원하신다. 안식일 율법(출 20:8-11)의 부분적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애초에 계획된 삶은 현재 세계에 대한 염려가 아니라 안식을 위한 것임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 「1. 하나님 나라 패턴」중에서
왜 이것이 그토록 끔찍한 행위였는가? 과일을 한 입 베어 먹은 게 무슨 잘못인가? 이것이 잘못인 이유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그것을 먹지 말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노골적인 불순종의 행위였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러나 ‘선악을 안다’는 것은 그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안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죄는 단지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법을 만든 것이다.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나님, 이제부터 우리가 세상의 입법자가 되어 우리가 살아갈 기준을 정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통보였으나, 결코 고상한 의미에서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고 자신의 독립을 확립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후로 내내 죄의 본성으로 작용했다.
--- 「2. 무너진 하나님 나라」중에서
타락 후에 창세기 앞 장들의 모든 사건에서 죄, 심판, 은혜라는 세 가지 요소가 등장한다. 그러나 바벨탑 사건은 예외로 보인다. 바벨탑 사건에는 죄와 심판이 있다. 사람들이 탑을 쌓고 흩어지며 서로 나뉜다. 그러나 창세기 11장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 주는 상징이 없다.
다음 장과 다음 세대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은 브라함에게 나타나 자신이 바벨탑 이후 내린 심판의 결과를 뒤집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으고 이들에게 다시 복을 주겠다는 자신의 뜻을 선포하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인 복음에 대한 최초의 분명한 선언이다.
--- 「3. 약속된 하나님 나라」중에서
성경은 그저 하나님의 구원 사역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의 주인공이다. 때로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성경이 나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음으로써 핵심을 놓친다.
성경의 한 구절을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물어야 할 훌륭한 질문은 “이 구절이 나에게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이다. 그러면 그 구절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분명해질 때가 아주 많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관한 책이다.
--- 「4. 부분적인 하나님 나라」중에서
우리에게는 권위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고 권위란 언제나 억압적이라고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는 것은 전혀 부정적이지 않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과 같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이들은 최고의 삶을 알았다. 이들은 에덴동산에서 자신들의 창조자와의 관계를 그분의 임재 가운데서 누렸다.
하나님의 법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법에 단 한 번 불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저주에 직면했고 그분의 임재에서 추방되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자신에게 반역한 자들 사이에 계속 거하실 수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복을 알려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럴 때에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고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는 것이 죽음과 저주(하나님으로부터 분리)를 가져온다면, 이 법의 회복은 생명과 복(하나님이 다시 가까이 이끄시는 관계)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복에 대한 약속’은 주로 이스라엘 역사의 이 시기에 두 방식으로 성취된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심으로써 그리고 성막에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 「4. 부분적인 하나님 나라」중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은 성실하시기에 약속을 지키시려면 반드시 이렇게 하셔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면, 하나님은 이들을 벌하셔야 한다. 그러면 이들의 계속된 죄악을 고려할 때 어떻게 하나님이 이들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가? 새 언약은 이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새 언약은 깨질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실 테고, 그래서 그분의 모든 백성이 용서받고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내면에서부터 바꾸실 것이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31:33). 에스겔과 요엘은 이것이 성령께서 하나님께 속한 모든 백성의 삶에 거하실 것이라는 약속임을 분명히 한다(겔 36:26-27; 욜 2:28-32).
--- 「5. 예언된 하나님 나라」중에서
예수님은 작곡자이시자 지휘자이시다. 예수님은 질서를 회복하러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추한 불협화음을 그것이 본래 만들어 내도록 계획된 아름다운 음악으로, 창조자를 찬양하는 교향곡으로 바꾸길 원하신다.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에게 완벽하게 복종하며 사심으로써 완벽한 음악을 연주하셨다.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대했던 방식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오케스트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셨다. … 그러나 우리는 아주 겸손하지 않더라도 인정할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많은 불협화음을 내며,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지휘자가 오셨으나 우리는 여전히 그분에게 불순종하고, 많은 사람이 그분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성경의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으나 아직 완전히 도래하지는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고 다시 오기까지 지체가 있으리라고 가르치셨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야 모든 것이 바로잡히고 모든 불협화음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 「6.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중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도 비슷하다.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가졌다. 천국에서 누릴 복의 맛보기다. 우리는 거룩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기에 더 많은 것을 갈망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어느 정도 알기에 이것을 더 느끼고 싶어 한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속으로 탄식한다.’ 속으로 탄식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세상에 만연한 죄로 인한 우리의 좌절과, 오는 세상에 있을 더 많은 경이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러한 좌절감은 현세에서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낀 시대’, 즉 두 세상의 교차점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다. 우리는 절대 삶이 쉬울 거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복음을 원하지 않는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천국 시민이지만, 당분간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야 한다(빌 3:20; 벧전 1:1).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고향을 떠나 살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주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완성된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실 것이다.
--- 「7. 선포된 하나님 나라」중에서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이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 썼을 것이다. 그가 언제 이 책을 썼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 책의 내용은 극심하게 박해를 받던 시기에 썼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주후 81-96년) 썼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묵시’라고 알려진 문학 형식으로 썼는데, 묵시는 상징을 사용해 메시지를 전달한다(성경에서 묵시의 또 다른 예는 단 7-12장과 슥 1-6장에 나온다). ‘묵시’는 ‘계시’ 또는 ‘베일을 벗김’을 뜻한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일련의 환상을 주시고, 이 환상들의 베일을 벗기신 후 인간 역사 이면에서 진행되는 일을 계시하신다. 이 환상들은 신자들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도록 힘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현세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고투에서 시선을 돌려 현재이자 미래인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라는 초대를 받는다.
--- 「8. 완성된 하나님 나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