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간에서 조건 없이, 기쁘고도 무구하게 주어지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조용히 머무는 친구의 은은한 우정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때 우리의 공간은 추억할 만한 곳으로 기억되며, 그 자체로 생명력을 띠게 될 것이다.--- p.30
같은 집에 살더라도 집 안에서의 권력관계에 따라 집은 각각의 가족구성원에게 다른 장소가 된다. 또한 같은 동네에서도 사람에 따라 다른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완벽한 곳(공간/도시/장소)이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곳(공간/도시/장소)을 지향할 필요도 없다. 다만 누군가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밀려난다면, 누군가가 특정한 곳에서 배제된다면, 누군가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없다면, 이렇게 공간/도시/장소가 자유와 평등을 거스르는 권력에 따라 생산되고 있다면, 그래서 연대를 해친다면 그것은 분명히 공간/도시/장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권의 문제다.--- p.76
공간은 흔히 연상되는 점유나 이용, 생산의 ‘대상’ 이상으로 상상되어야 한다. 공간은 그것에 대한 권리 혹은 관계를 재구성해내는 운동/연대/힘/과정으로서 분석되어야 한다. 인권은 사람이 스스로 존엄을 세워가는 과정에서 움직이는 가치다. 그것은 어떤 공간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인권이 실현되는 공동체에 대한 권리가 곧 인권이며, 이러한 정치공동체는 어떤 형식으로든 공간의 경계를 함축한다.--- p.95
‘정치가 결여된 영역’으로서의 공간 개념, 그러니까 탈정치화된 공간 개념과 작별하고, ‘공간의 정치화’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매시, 1996: 110~112). 공간을 정치나 정치의 가능성을 사상한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공간의 영역을 탈정치화하려는 시도 혹은 젠더 중립적인 것처럼 비치게 만들려는 시도에 문제를 제기하며, 공간에 담긴 젠더관계와 공간을 구성해나가는 구조적인 축으로서의 젠더관계를 ‘가시화’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남성적 몸’의 공간 경험에 기초한 연구의 한계를 비판하며, ‘다양한 몸들’의 공간 경험으로 시선을 확장하는 한편으로, 몸, 가정, 일터, 도시, 지역, 국민국가, 초국적 공간을 비롯한 다양한 스케일을 젠더의 렌즈로 분석해나가야 한다.--- pp.118-119
민주주의가 더는 종래의 ‘역사’ 이데올로기와 이에 기반을 둔 공간적 위계에 기댈 수 없다면, 민주주의의 이상을 아예 포기하거나 아니면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새로운 시공간의 원리 위에 세우거나 양자택일의 문제가 남는다. 만약 후자를 택한다면 민주주의를 전일적인 역사적 과업이 아니라 개인마다, 집단마다 상이하고 가변적인 삶의 요구와 접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과는 다른 ‘재현의 정치(politics of representation)’를 모색해야 한다. 특히 역사에 짓눌리지 않고도 삶의 충실한 보금자리가 되어줄 진정한 ‘기억의 공간’을 재현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p.127-128
‘공간’의 문제와 관련하여, ‘공간’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느냐라는 질문보다 ‘주권공간’은 어떤 것이고, 그와 다른 공간을 창조하는 실험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공간은 저기 바깥에 있는 실체가 아니라 권력(힘)과 욕망, 관계와 시스템, 기호와 표상에 의해 형성되는 감성 형식이다. 따라서 공간의 귀속(소유)을 묻지 말고 공간을 형성하는 역관계와 시스템(체제)을 물어야 한다. 주권 체제는 그에 고유한 공간을 형성한다. 주권공간은 균질공간이고 표상가능한 공간이며 자격과 소유로 영토화된 질서[내지 공안(police)]의 공간이자 다수성(majority)의 공간이다. 나의 관심은 그런 주권공간에 난입하여 주권 체제에 균열을 일으켜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삶의 공간을 창조하는 데 있다.--- p.142
나의 경험에서 주민의 경험과 요구로 확장되면서, 다양한 주민의 욕구와 이에 대한 자발적 참여가 지역 단위에서 해결되고, 여러 이해관계가 폭넓게 조율될 수 있는 다양한 커뮤니티 공간이 만들어진다. 이때 이 공간은 수직적으로 주어진 영역이 아니라, 주민의 자율과 자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으로서 공공성을 확보한다. 이 공간이 지역에서 어떤 대안공간으로 자리 잡느냐의 문제는 주민의 내부에 있는 조건을 어떻게 드러내고 안팎의 갈등 지점을 재구성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지역공동체의 주체, 방향성 등을 논의할 때, 참여나 주체의 문제를 기존 국가의 대항, 대안공간으로서 아래로부터 자발적인 참여공간을 상정한다. 이는 국가에 대한 비판적 거점으로 지역공동체에 주목하는 주요한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지역공동체는 자치적인 새로운 공간의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작용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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