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가 불완전하게 감각될 뿐,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을 때 비로소 사유가 시작된다.
까닭을 모르고 넘어질 때에만 ‘넘어짐’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고, 까닭 없이 눈물이 흐를 때에만‘슬픔’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며, 까닭 없이 한숨이 나올 때에만 ‘허무’에 대한 사유가 시작된다.
그래서 이 세계는 나에게 ‘앎’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모름’을 요구한다.
이 세계는 나에게 통찰을 요구하지만 끝내 통찰할 수 없는 세계이며, 결국 통찰되어서는 안 되는 모순의 세계다.
모순의 세계는 신이 형벌처럼 던진 대답 불가능의 질문이기도 하고, 스스로 자초한 자학이기도 하다. 형벌이든 자학이든 분명한 것은, 그 모순의 세계 속에 사물의 세계가 있고 그 사물의 세계가 배양하는 상념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물의 세계를 산책하며 상념을 배양하는 일이 나는 무척이나 행복하다.
그래서 이 책은 자학의 기록이자 행복의 기록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사물의 세계에는 오직 직선과 곡선만이 있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어쩌면 나는 이미 직선과 곡선이 아닌 제3의 선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발견된 것이 아니다.
언어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언어가 제3의 선에 어떤 이름을 붙이기 전까지는 아직 발견된 것이 아니다.
언어의 발견 없이는 나는 단 하나의 사물의 세계도 발견할 수 없으며 끝내 사물의 세계와 접촉할 수 없는 불가촉천민이다.
나는 언어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그만큼 언어를 증오한다.
그래서 이 책은 언어에 대한 의존의 기록이자 증오의 기록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투명 문에는 배후가 없다.
안과 밖이 훤히 보이는 문에는 배후가 없다.
배후가 없으면 상상이 없고, 상상이 없으면 환상이 없으며, 환상이 없으면 이야기도 없다.
문에 가려진 얼굴과 얼굴의 배후에 자리 잡은 적대와 환대에 대한 상상이 투명 문에는 없다.
문에 가려진 타자에 대한 상상과 환상, 타자에 대한 철학과 이야기가 투명 문에는 없다.
투명 문은 죽은 문이다.
상상이 죽고, 환상이 죽고, 철학이 죽고, 이야기가 죽은 문이다.
신비가 죽은 문이다.
종일 죽은 문을 드나드는 우리의 정신은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 pp.62-63
피기는 하였으나 아직 향이 어린데, 그래도 꽃이라고 바람 따라 진다.
꽃잎은 어찌나 얇은지 통째로 바람에 질망정 둘로 갈라지지 않고, 거미줄은 어찌나 가는지 허공에 날려도 토막 나지 않는다.
갈라지고 끊어질 면적과 두께가 없는 불가능한 것들이 지천인 봄, 봄은 불가능의 세계가 기르는 한때다.
나는 봄이 기르는 불가능의 꿈에 젖어 골목을 걷는다.
골목 끝에서 끈 풀린 조막만 한 강아지 한 마리가 전력으로 달려오고, 나는 엉겁결에 주저앉아 맞을 채비를 하며 생각한다.
아, 저놈이 코뿔소였으면!
전력으로 달려와 무릎 꿇고 기다리는 내 가슴에 뿔을 박아주면 어찌 좋으랴 생각한다.
뿔을 박고 한참이나 씩씩거리면서, 내 갈빗대를 부수고 심장까지 깊숙이 뿔을 박아주면 어찌 아니 좋으랴 생각한다.
겨우내 얼어버린 심장이 뚫리고 내 가슴이 다시 온통 더운 피에 젖어 상념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한다.
봄이 코뿔소처럼 달려와 내 심장에 뿔을 받으면 더할 나위 없겠노라 생각한다.
아이는 어디를 만져도 그곳이 아이의 전부이듯, 내 어디를 만져도 그곳이 봄의 전부였으면 좋겠노라 생각한다.
아직은 봄바람이 겨울바람 위에 기름 막처럼 흐느적거리며 굳다가 녹고, 녹다가 다시 굳는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가 아침에 짜 주시던 염소젖, 딱 그 기름막이다.
바람에서 염소젖 냄새가 난다.
그 고소하고 비릿한 냄새가 봄의 말초신경을 건드려, 봄의 따뜻한 혀가 난폭하게 내 혀를 휘감아 뽑아내 버렸으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봄이 기르는 불가능의 세계 앞에서 나의 언어가 모든 가능성을 상실했으면 오죽 좋으랴 생각한다.
--- pp.140-141
보고 싶다고 말씀하신 책 몇 권을 보냅니다.
책장을 넘길 때 내 손가락 지문을 긁고 지나가던 종이의 감촉과, 솟았다 가라앉던 손등 근육과 실핏줄의 미세한 움직임도 책과 함께 보냅니다.
사실 내가 읽은 것은 책이 아니라 그것들, 내 몸의 언어입니다.
내 몸의 언어를 읽으며 참고 기다리면 끝내 책이 나를 읽어줍니다.
말씀하신 나의 독후감 대신 내 몸을 읽은 책의 독후감을 동봉합니다.
일생의 책이라 할 만한 것이 제게도 상, 하 두 권 있습니다.
상권은 끝까지 다 읽지 않았으나 이미 다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용이 지루해서 매일 그만두고 싶으나 어쩔 수 없이 계속 읽습니다. 별거 없는 책을 할 수 없이 매일매일 고통스럽게 읽고 있습니다. 상권을 생략하고 하권을 집어 들고픈 충동에 늘 휩싸입니다. 그러나 하권은 상권을 생략하고는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지루한 상권을 죽을힘을 다해 버텨가며 읽고 있습니다.
상권의 제목은 삶, 하권의 제목은 죽음입니다. 삶은 지루하나, 지루한 삶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죽음의 한 페이지도 넘길 수가 없습니다. 참 막막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 pp.178-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