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을 비교적 빨리 배운 편이었다. 손놀림이 좋아서 바늘이나 천의 촉감에도 금방 익숙해졌다. 뿐만 아니라 치수라든지 체적, 옷의 앞면과 가슴 부위, 기장, 진동 둘레, 소맷부리, 바이어스 같은 것들도 쉽게 배웠다. 열여섯 살이 되면서 천을 구별하는 방법을 그리고 다음 해에는 천마다 지니고 있는 고유한 특성과 그것을 앞으로 어디에, 어떻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배웠다. 중국산 크레이프, 비단 모슬린, 조젯 천, 샹티이레이스 등등. 당시에는 일을 배우는 데 정신이 팔려 세월 가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가을에는 고급 모직 외투와 춘추복을 만들고, 봄에는 칸타브리아 지방의 라 콘차나 엘 사르디네로*에 휴가 갈 때 입을 수 있도록 가벼운 옷을 만들곤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열여덟 살 그리고 열아홉 살이 되었다. 이제는 옷 만들 때 가장 까다롭다는 부분까지도 혼자서 재단하고 마름질할 정도로 솜씨가 늘었다. 칼라와 옷깃을 붙이는 방법도 배웠고, 또 어디쯤에서 천을 접고 마무리를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다. 옷 만드는 일에 한창 재미가 붙어서, 천 조각만 잡으면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일하곤 했다. 심지어는 마누엘라 부인과 엄마도 가끔 내 의견을 물어볼 정도로 나를 신뢰했다.
(14p, 《라 코스투라 1권 ‘그림자 여인 시라’》에서)
언젠가는 이그나시오의 따스한 품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삶도 결국엔 무너뜨리고야 말 거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내 결심은 그 무엇보다도 더 확고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던 결혼식과 공무원 시험 준비, 떨리는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쳐나가던 타자 연습 그리고 밤마다 다가올 황홀한 시간, 또 예쁜 아이들을 낳아 기르려던 소박한 꿈도 이젠 모두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나는 그를 떠날 것이다. 아무리 모진 바람을 맞아도 내 결심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25p, 《라 코스투라 1권 ‘그림자 여인 시라’》에서)
칸델라리아는 아직 잠옷 차림이었던 내 몸 여기저기에 열아홉 개의 권총을 시트 천 쪼가리로 세게 묶었다. 혹시라도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띠 하나로 권총 한 자루씩만 묶었다. 먼저 천으로 권총을 두 번 묶은 뒤, 내 몸에 붙이고 다시 몸 둘레로 두어 번 돌려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의 양쪽 끝을 세게 묶었다.
“가엾은 것. 뼈밖에 안 남았구나. 살이 없으니 이젠 더 묶을 데도 없어.” 내 몸의 앞과 뒤를 다 묶은 뒤,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허벅지 쪽에 하면 되죠.” 내가 말했다. 고심 끝에 그녀는 내 의견대로 했다. 마침내 열아홉 자루의 권총이 내 몸 여기저기에 자리를 찾게 되었다. 가슴 아래, 늑골 위쪽, 아랫배와 어깨 그리고 옆구리와 팔, 허리둘레와 허벅지에 권총이 묶여 있었다. 마치 온몸을 흰 붕대로 칭칭 감은 미라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 아래로 무거운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탓에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탓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태로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빨리 연습을 해야만 했다.
(177p~178p, 《라 코스투라 1권 ‘그림자 여인 시라’》에서)
지금 내 곁에 없는 모든 존재들, 즉 라미로와 이그나시오, 엄마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 과거도 때로는 덧없이 자취를 감추어버리지만, 가끔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만큼 격렬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주로 집에 홀로 있을 때나 고즈넉한 오후에 실과 천 조각에 파묻혀 일을 할 때, 아니면 잠자리에 들 때나 펠릭스가 몰래 밤마실 나가 홀로 어둠에 잠긴 거실에 앉아 있을 때마다 그들의 존재는 어김없이 내 마음속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와 통째로 뒤흔들어 놓곤 했다. 하지만 한차례 광풍이 휩쓸고 지나가고 나면 대개의 경우 마음이 진정되기 마련이었다. 내가 미친 듯이 일에 매달린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주문받은 일감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우아한 태도나 말투도 더 완벽하게 익혀야 했다.
(286p~287p, 《라 코스투라 1권 ‘그림자 여인 시라’》에서)
“나중에 사랑하는 연인이 생기면 연락주세요. 예쁜 옷을 만들어드릴 테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당장 당신에게 달려오리다.”
그는 손으로 내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갑작스러운 애무에 놀란 나는 몸을 흠칫하고 말았다. 아! 이런 날이 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건만.
“거짓말쟁이.”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진심이에요.”
내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길은 머리를 지나 목덜미로 옮겨갔다. 그의 얼굴이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토록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열쇠 소리가 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떨어지고 말았다. 자밀라였다.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어설픈 스페인어로 급한 소식이라며 수선을 떨었다.
“폭스 마님이 말해요. 시라 양 어서 라스 팔메라스로 오래요.”
이젠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정말로 이별할 때가 온 듯했다. 마커스가 모자를 쓰는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그와 진한 포옹을 나누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잠시 후, 그토록 소중했던 그의 존재는 이젠 내 머리에 남긴 키스 자국과 그의 뒷모습 그리고 문이 닫히는 가슴 아픈 소리만 남긴 채, 내 곁에서 아스라이 사라지고 있었다.
(478p, 《라 코스투라 1권 ‘그림자 여인 시라’》에서)
“우린 지금 마드리드에서 영국 정보국과 연결된 비밀 첩보망을 구축하는 일을 도와주고 있어. 물론 거기에 가담하는 이들은 정치나 외교, 군대와 하등 상관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야. 사회적으로 알려진 이들도 거의 없고. 그래야 의심을 안 받을 테니까. 하여간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면, 곧바로 SOE에 알리는 것이 이들의 임무야.”
(44p, 《라 코스투라 2권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에서)
“이제 결론을 말씀드릴 때가 된 것 같군요. 짐작하셨겠지만, 시라 양이 수집한 정보는 모두 그런 방식으로 암호화해 우리에게 보내주면 됩니다. 물론 정보를 보낼 때는 가급적 간결하게, 그러니까 단어의 수를 최대한 줄여야 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끝도 없이 길어질 테니까 말이죠. 그러니까 평소에 내용을 종합하고, 적절히 요약하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 할 겁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우리에게 보낼 어떤 정보도 의상 디자인이나 스케치처럼 보이도록 철저하게 위장시켜야 한다는 거죠. 디자이너가 하는 통상적인 작업과 관련된 방식이라면 공연히 의심을 살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너무 드러나게 해서는 안 되겠죠. 겉으로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하면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76p, 《라 코스투라 2권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에서)
그러나 내가 들어오고 2분쯤 지난 무렵, 어떤 이가 제일 끝자리에 앉았다. 남자 혼자였다. 남자인 건 분명했지만, 워낙 어두운 탓에 얼굴을 분간하기는 어려웠다. 왠지 그 남자의 모습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사실 그 옷차림만 아니었다면 특별히 신경 쓸 일도 없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런데 그는 밝은색 레인코트 차림에 깃을 세우고 있었다. 일주일 전부터 나를 미행하고 있던 그 남자와 꼭같은 차림새였다. 나는 곁눈질로 레인코트 남자의 거동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시선의 방향을 보건대 그는 영화 줄거리보다는 내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순간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나를 쫓아 이곳까지 온 것이 틀림없었다. 미장원에서부터 미행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뒤를 따라온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여기까지 수백 미터를 걸어오는 동안 내내 뒤를 따라온 것만큼은 분명했다.
(150p~151p, 《라 코스투라 2권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에서)
거짓말 같은 일이었지만 그 정도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그와 함께했던 많은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후 내내 정처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축제 전야에 등불 아래서 함께 춤을 추던 모습. 그리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언제나 나를 부드럽게 감싸주던 그와 풋내기 재단사에 불과했던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한때나마 막연하게 결혼을 꿈꿨던 남자가 지금은 두려운 존재로 변해 내 앞에 나타났다.
(157p, 《라 코스투라 2권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에서)
“아! 예쁜 여자들이 돈 몇 푼 받고 헤픈 짓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니까 오해하진 말아요. 이번 작전이 워낙 민감하고 많은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임무를 굳이 당신에게 맡긴 것은 그만큼 당신의 능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당신은 수려한 외모와 혈혈단신으로 유럽에 건너온 외국인 여성이라는 조건 덕분에 운신의 폭이 그만큼 넓어질 거라는 점이에요. 하지만 당신의 임무가 단지 한 남자를 유혹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을 각별히 유념하세요. 하여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다 실바의 신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선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그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해야 해요.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때그때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우린 지금까지 당신이 보여준 능력과 경험에 대해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가령 체계적으로 정보를 수집한다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능력 말입니다.”
(236p, 《라 코스투라 2권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에서)
나 자신의 능력을 분명하게 확인한 이상, 다른 이들이 일방적으로 내 운명을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온 듯했다. 예컨대, 힐가스는 일언반구도 없이 자기 멋대로 나를 리스본으로 보냈고, 마누엘 다 실바는 쥐도 새도 모르게 나를 처치하려고 했다. 게다가 마커스 로건은 나를 구하려고 위험 속으로 뛰어들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여태까지 꼭두각시처럼 이들 저들 손에 놀아난 셈이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승리의 영광을 누리는 일이든 벼랑 끝에 내몰리는 일이든, 모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일방적인 결정대로 움직여야 했다. 결국 나는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장기판의 졸보다 못한 신세였다.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생각이나 의향을 내게 속 시원하게 넣어놓은 적이 없었다. 더 이상 그들의 부질없는 꼭두각시 놀음에 같이 놀아날 순 없는 일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참에 그들의 손아귀에서 과감히 벗어나 내 앞길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었다. 물론 그러다 보면 길을 잘못 들거나 발이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또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결코 만만치 않은 시련과 역경이 내 앞길에 가로놓여 있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여기가 어딘지,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닥칠지 두려움에 떨면서,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그들 손에 끌려 다니며 살 수는 없었다. 대신 나 스스로가 삶의, 그리고 운명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371p~372p, 《라 코스투라 2권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에서)
우리의 운명은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될 수 있었다. 어차피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우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없을 테니까. 어쩌면 우린 애당초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거나, 아니면 아무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결국 우린 역사의 이면에, 그리고 바느질로 보낸 숱한 세월 속에 파묻힌 채 눈에 보이지 않게 살아온 셈이다.
---p.411p, 《라 코스투라 2권 ‘가장 아름다운 스파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