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던 항쟁의 이와 같은 재생 과정은 항쟁 못지않게 치열한 저항투쟁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항쟁을 승리로 만들어내는 역사적 과정이었다. 이 저항운동, 즉 광주항쟁의 재생 과정을 우리는 ‘5월운동’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5월운동은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에서 파생된 문제를 해결하고, 그 항쟁이 구현했던 정신과 실천행동을 계승하려는 지속적이고 집단적 행동을 의미한다.--- p.12
광주항쟁은 현대 한국의 사회운동사에서 매우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 항쟁은 사회운동의 폭과 깊이, 규모와 강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이를 몇 가지로 요약하면, 시민의 총체적 참여, 고도로 통일된 절대공동체 실현, 무장 시민군 형성, 중무장 정규군을 퇴각시킨 민중의 거대한 힘, 죽음이 뻔한 최후의 극한상황에서도 결사항전을 선택한 희생정신 등이 그것이다.--- pp.32-33
사제단은 평화적이었던 학생시위가 격렬하게 된 이유를 공수부대의 잔혹한 학살만행 때문이었다고 규정했고, 이것이 시민들의 무장을 초래했다고 발표했다. …… 계엄군에 의해 철저히 고립당한 상태에서 생필품이 공급되지 않았어도 시민들은 이웃과 식량을 나누어 먹었고, 병원에 가득한 환자들에게 줄 헌혈의 피는 남아돌았다. 부녀자들은 시민·학생들에게만이 아니라 배고파하는 계엄군에게도 먹을 것을 제공해주었다고 썼다. 사제들은 그들이 아는 한, 이러한 행위들은 적어도 폭도들의 짓이 아님을 천명했다. 사제들은 ‘거짓은 폭로되고 진실은 밝혀지도록 하는 것’이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임을 실천했던 것이다.--- p.94
1983년에 단행된 학원자율화조치를 계기로 하여 사회일반에서는 통제가 풀리고 억압이 완화된 일종의 유화국면이 도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에 대한 회유와 협박, 감시와 연행 및 원격지 격리, 구속 등 야만적 탄압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광주학살의 죄과는 피해갈 수 없었고, 이에 대한 피해자들의 저항투쟁은 군사정권의 정당성에 치명적인 약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권력의 박해와 그로 인한 수난이 심해질 때에도 분노와 한에 가슴이 멍든 피해자들의 투쟁력은 오히려 점차 증강되었다.--- p.162
민주화를 위한 6월항쟁의 결과 전두환 독재체제는 끝났으나 역설적이게도 신군부 계승자인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새 정권은 비록 광주항쟁을 진압한 신군부세력이 주도하고 있었지만 6월항쟁을 통해서 나타난 민주화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고 ‘폭도의 난동’으로 규정했던 광주항쟁에 대한 은폐와 왜곡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새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 만인 1988년 4월 초에 광주사태치유대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p.178
1980년 5월 27일 이후 광주시민들이 광기에 사로잡힌 공수부대의 총검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살육당한 참극에 대해 지식인들은 대체로 침묵했었다. 그리하여 이 작은 산하에서 바로 이웃이 당하고 있던 그 처절한 비극을 모른 체하고 지나쳤던 마음의 빚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광주는 이들에게 민주화를 향한 마음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영혼의 아픈 멍에로 지워졌다. “우리 모두는 광주시민 앞에 죄인”이라 썼던 연세대 어느 교수의 고백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p.191
열사들의 공통된 정서는 야만적 폭력과 그 악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견디기 어려운 분노였다. 이 야만적 폭력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괴로워했음을 그들의 유서가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이 엄중한 현실에서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결코 비굴한 삶을 용납할 수 없는 극단적 영혼의 소유자로서 최후의 결단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선택을 그들은 패배나 도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도전, 자기에게 가능한 하나의 싸움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승리자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겠지만 그 자결을 통해 승리의 시간을 단축시키리라는 기원과 믿음이 있었지 않을까 생각한다.--- p.203
전직 두 대통령이 피고가 된 재판, 한국 현대사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근래에 유례가 없는 세기적 재판은 끝났다. 이 재판은 1980년 5월 군사쿠데타에 저항했다가 신군부집단에 의해 폭도로 낙인찍힌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은 역사의 현장이었다. 항쟁이 좌절된 이후 지난 17년 동안 계속된 5월운동은 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살아남은 사람들의 길고도 고난에 찬 싸움이었다. 그 싸움의 길은 피해자들이 겪어왔던 수난에서 이미 보았듯이, 그리고 영혼을 바쳐 이 싸움에 임했던 5월열사의 대열에서 보았듯이 피와 눈물에 젖어 오늘 여기에 이르렀다.--- pp.260-262
그는 1970년대 이후 약 20여 년 동안 미국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에 투신해온 경험과 자원을 기반으로 하여 광주항쟁을 국제화시키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홍콩에 소재한 아시아인권위원회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장기간 현지에 체재하면서 타이, 캄보디아, 스리랑카 등 동아시아 지역의 주요 시민사회단체에 광주항쟁을 소개하고, 더 나아가서 그 지역 민주화와 인권 및 환경 개선활동에 투신해왔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광주항쟁과 5월운동이 지향하고 실천해온 가치, 즉 보편적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아시아 국가사회의 발전에 매우 중요하고도 필요한 자산이기 때문에 이를 아시아 지역에 적극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pp.275-276
5월운동은 5·18의 과거청산이나 피해자의 치료와 생존권 문제뿐만 아니라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5·18정신을 재현하고 5·18의 역사를 재구성·실천하는 과제를 중심으로 앞으로도 얼마든지 더 일어날 수 있는 열린 전망을 갖는다고 본다. 1980년 5월의 광주항쟁과 그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5월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의 민주화운동사에서도 매우 인상 깊은 사건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 역사는 민주화를 위한 항쟁에서 비극적으로 패배한 이후 아직도 그 반민주와 반인권의 사슬에서 풀려나지 못한 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사회에게 꺼지지 않는 빛으로 그들의 앞길을 밝혀줄 것이다.
--- p.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