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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인 서울

로스트 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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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5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420g | 145*205*20mm
ISBN13 9788957077658
ISBN10 8957077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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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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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렛 구슬처럼 그녀도 그녀 앞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그녀는 룰렛 구슬이나 다름없다. 룰렛 구슬은 굴려질 때마다 언제나 새롭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써봐도 핑핑 돌아가는 룰렛 판처럼 한창 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한국이라는 자본주의 시장에 던져진 그녀는 이제 거기서 내려올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그냥 룰렛 구슬의 이야기이다. 수없이 던져진 카지노 룰렛 구슬의. ---「로스트 인 서울」, 13쪽

― 돌아가겠다는 게 아니야. 난 잊었던 나를 찾은 것이지. 잊고 싶다고 해서 호락호락 잊히겠어? 내가 저 거리에 들어섰을 때 저 거리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어. 하지만, 이 강물을 봐. 흘러가버리지 않았다구, 여기서 이렇게 모든 기억을 부풀어 오르게 하잖아.
그토록 행복했고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아무것도 없는 지금보다 나은 게 아닐까? 지금은 그 삶의 잔여로서 흘려보내고 있을 뿐인데, 이 하찮은 삶을 위해 기억을 버려야 하는 걸까?---「세컨드 라이프」, 77쪽

다음 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잔인하게 빛나는 간수 놈의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어. 네가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감옥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넌 영원히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네 내장을 송두리째 다른 곳으로 도망시킨다 해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이제 내 몸의 무엇을 빼돌려야 할까. 그다음은 뇌수일까? 뇌수를 빼돌리면 나는 탈옥에 성공하는 걸까? ---「탈옥」, 114쪽

나는 아버지의 금고를 박살내고, 그러나 시계들은 그대로 두고 미장원으로 가 머리를 깎았다. 머리카락이 듬뿍 잘려 나갈 때마다 차곡차곡 쌓아둔 분노가 뚝뚝 떨어져 나갔다. 폭발하는 분노만이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 쌓인 분노는 스스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래 억누른 사람은 뚝뚝 떨어져 나가는 분노를 보며 가뿐한 마음으로 끔찍한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 ---그 남자의 손목시계」, 148쪽

언제나 고요하게 비어 있는 그 뒤뜰에선 사랑이 저절로 이루어졌으니까. 고요한 뒤뜰의 반듯한 살창 앞에 앉으면 언제나 그의 입술은 내 목덜미를 자근자근 물었고, 그의 숨은 언제나 내 귓속에 가득 들어와 내 숨을 막히게 했고, 도란도란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우리가 서로에게서 관심을 돌리는 찰나, 검은 먼지 정령이 우릴 먼지로 만들어버리지 않도록, 오직 서로만 바라보고 서로에게 열중하던 그때. ---「후쿠오카 스토리」, 158~159쪽

오늘 수고 많았어. 너무 어려워 말고 하나씩 배운다고 생각해.
그 말은, 이제 그만 느슨해지려고 천천히 풀어지는 가슴을 예고도 없이 퍽 때리는 것 같았다. 톰의 뒤를 따라 침실로 가다가 그녀는 순간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주방 조명 아래에서 빛을 발하는 찻잔 조각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찻잔 조각 앞으로 다가갔다. 영국 여왕의 하사품이라. 영국의 전통적인 문양, 영국인들의 영혼이 깃든……. 한 조각을 집어삼켰다. 그녀의 눈빛이 그때 탐욕스러웠는지, 절망스러웠는지 그건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그녀는 발레를 버리고 떠나왔던 그날을 떠올리며, 식도를 찢으면서 내려가는 찻잔의 비릿함을 억지로 삼켰다.---「로라, 네 이름은 미조」, 198쪽

얼마 전까지 나는 하얀색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블랙 아니면 화이트였지. 그런데 지금, 온통 파란색이야. 하얀 피부 위에서 핏줄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더니 누군가가 혈관에 푸른 잉크를 강제로 밀어 넣은 것처럼 점점 푸른 혈관이 길어지고 굵어지더군. 어느새 푸른 핏줄이 굼실굼실 기어 다니듯 커져갔어. 그리고 마침내 온몸을 뒤덮고 말았어. 푸른색은 아마도 색을 전부 날려버리는 특징이 있는 모양이지. 짙푸른 어둠이 걷히는 새벽 무렵 첫 빛에 색이 증발하듯 조금씩 조금씩 피부에서 색이 날아가고 있어. 이제 점점 투명해지는 중이야. 그래서 곧잘 사라지곤 했어.
---「퍼펙트 블루」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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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희는 7편의 소설을 통해 서울에 사는 우리가 꿈을, 기억을, 자유를, 가족을, 사랑을, 자신을, 삶을 상실하고 있음을 섬세하게 적시한다. 사라지는 대상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여 있어 개별적으로 씌어진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연작처럼 긴밀하게 읽힌다. 서울을 차치한 중국·일본·영국의 어느 지방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이 소설집의 일관된 기조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다. 여기서 서울은 한국의 수도라는 특수한 ‘공간(space)’이 아니라 (탈)근대 도시의 보편성을 함의한 ‘장소(topos)’를 대유하기 때문이다. 중립적으로 외재화된 공간과 달리, 감각과 지각이 매개된 장소는 신체와 내밀하게 연동한다. 즉 공간을 지양하고 장소로서의 서울을 천착하는 작업은 현재를 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허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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