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는 대뇌의 명령에 따라 몸을 움직여 원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편지도 쓰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등산을 하고, ‘야호!’ 하고 소리도 친다. 영화도 만들고, 책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핵무기도 제조한다. 뇌세포들을 포함한 10조 개의 세포들이 서로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는 메커니즘의 덕으로 인간은 자연이 마련해 주지 못하는 문화와 문명을 이루어 살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이성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p.22
본능은 자연이 동물의 몸에 설계해 놓은 생존 기제이다. 인간 외의 다른 동물들은, 마치 시계태엽이 풀리면서 톱니바퀴가 돌고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것처럼, 내장된 본능이 명하는 대로 살아간다. 그래서 동물들은 일종의 ‘자동 기계’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동 기계가 아니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인간의 행위를 결정짓는 어떤 종류의 알고리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도 물론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저절로 식욕도 나고 성욕도 일어난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 외에 ‘이성’이라는 생물학적 기능을 하나 더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 이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합리적 행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p.24
인간은 자신의 삶을 창조함으로써 동시에 문화와 역사를 창조한다. 이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부분적으로나마 창조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물질의 진화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더 이상 ‘눈먼’ 우연에 맡기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p.27
인간이 단지 주어진 법칙에 따라 사는 다른 존재와는 달리 스스로 판단하여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된다. 기계도 아니요 꼭두각시도 아니요 노예도 아닌 자율적 주체主體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인간은 존엄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준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인간은 (1) 스스로, (2) 자신의 신념(지식, 세계관)과, (3) 자신의 소망(지향심, 가치관, 꿈)으로부터, (4)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에 따라 합리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인 것이다. 이 네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관연 인간인지 의심해 볼 수 있다. 기계, 식물, 그리고 인간 외의 다른 동물들 어느 것도 위의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인도의 원시림에서 발견된 늑대 소녀도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그녀의 이성은 퇴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한다. 그들은 이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뇌사 상태에 빠진 사람이나 식물인간도 아쉽지만 인간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p.28
내가 어느 순간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더라도 세상은 잘도 굴러갈 것이다. 몇몇 친척들과 지인들이 나의 주검 앞에서 돌연한 이별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살아갈 것이다. 내가 하던 일은 어떤 젊은 녀석이 물려받아 더 잘 처리할 것이고, 그를 채용한 사장은 만족할 것이다. 내가 죽어 주어서 잘 되었다는 듯한 표정을 굳이 감출 것도 없다. 그래서 객관적 시각에서 보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듯싶다. 실제로 길바닥에서 병든 개처럼 허리를 꺾고 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죽어도 울어 줄 사람이 없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러나 주관적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누구나 세계 자체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묘한 기분을 자아낸다. 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한 번 상상해 보자. 그 세계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 세계가 천국이면 어떻고 지옥이면 어떤가? 내가 없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놀랍게도 세계의 존재는 나의 존재에 의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객관적 시각에서 본 내가 별 볼 일 없게 보이는 것도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세상이 대단해 보이는 것도 내가 살고 있는 한에서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나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인 것이다.--- p.49
모든 존재는 신비 그 자체이다. 그런데 자연의 냉엄한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 인간만이 자신의 신념과 소망으로 삶과 역사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창조론이 옳든 진화론이 옳든 나의 삶은 한없이 소중하다. 나는 소우주이며, 유한한 시간을 사는 대체 불가능한 유일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무상으로 받은 빚진 자이다. 인간, 그런 존재이다. 이처럼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 즉 존재 각성은 어떤 형이상학적 가정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창조론이 옳든 진화론이 옳든 관계없이, 또는 어떤 이론이 무어라고 말하든 관계없이, 우리 자신에 관한 사실들을 놓고 철학적 성찰을 한 결과 도달한 깨달음인 것이다.--- p.55
본질주의적 세계관에 따르면, 인간은 비록 자신의 신념과 소망에 따라 행동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보다 거시적인 목적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예비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만일 본질주의적 세계관이 옳다면, 인간은 참다운 의미에서의 자율성을 박탈당하게 된다. 인간은 자기가 선택하지 않는 목적을 실현시키는 꼭두각시이며, 자기가 하는 일들이 자기의 결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p.67
존재 각성을 하게 되면, 존재 각성에 걸맞은 삶을 살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생긴다. 존재 각성에 걸맞지 않은 삶을 승인할 수 없게 된다. 존재 각성에 걸맞지 않은 삶은 자아의 정체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신비롭고 소중한 존재인 내가 먹는 것으로 비료를 만드는 일에 일생을 바칠 수는 없지 않은가!? 삶이 우연한 역사의 격랑에 속절없이 떠내려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그는 자신이 승인할 수 있는 삶을 모색한다. 존재 각성은 삶을 신비로운 광체로 재조명한다. 인간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무엇을 해도 좋다. 자신이 귀한 존재인데, 귀한 뜻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시의 부속품으로 판에 박힌 일에 종사할지라도, 비록 그가 하는 일이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 해도, 그 일은 신비로운 광채를 띤다. 존재 각성을 한 사람은 도둑질을 하더라도 의적이 된다. 어시장에서 생선을 팔지라도, 번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한다. 마치 앞선 실착을 승착이 되게 하는 바둑의 고수처럼, 존재 각성을 한 사람은 신고간난辛苦艱難의 세월마저도 생명으로 넘치게 한다.--- p.93
정신의 진화는 원시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위대한 조상들이 쌓아 올린 지혜의 사다리를 오르는 일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이고,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끊임없이 닥쳐오는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고,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보람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생각하고, 깨닫는 일이다. 이렇게 정신적 진화의 사다리를 오름으로써 원시인은, 위대한 조상들이 평생을 바쳐 거둔 수확을 몇 년 안에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진화의 사다리를 오르지 않으면, 태어난 그대로의 원시인으로 남는다. 오른다 해도 진화가 중세에 머무는 사람도 있다. 불과 십수 년 만에 수천 년 동안 축적된 지혜의 정점에 이른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 정점에서 새로운 지혜를 창출함으로써 인류의 정신적 진화를 선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의 정신 안에는 위대한 조상들의 정신이 살아 숨 쉬게 되고, 그는 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p.109
강렬한 소망이나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를 풀어 가는 과정에서 흔히 역사를 발전시키고 인간의 생존 조건을 개선시키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상가, 문인, 예술가, 과학자, 정치지도자, 사업가 등이 우연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문제의식과 열망을 품고 사소한 즐거움과 이익을 희생하면서 노력한 끝에 마침내 자아실현을 한 인류인들로서, 그들의 업적은 개인의 자랑에 머물지 않고 인류 문화를 살찌우고 향상시키는 ‘보편적 자양분’이 된다. 따라서 사회 발전의 맥락에서 보면 좋은 문제의식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이 나올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인류 문화의 중심에 서서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가치와 감동을 창출하는 사람들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p.117
우리가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개발하고 강화시켜야 할 능력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순수하게 ‘기능적’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자동차 정비를 하고, 비행기를 조종하고, 컴퓨터를 조작하고, 피아노를 치고, 수술을 하고, 홈런을 치고, 도자기를 굽고, 벽돌을 쌓고, 아이스 댄싱을 하는 등의 일들은 반복적인 훈련이 없으면 할 수 없다. 따라서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잘 실시하기만 하면 이러한 기능을 갖춘 인력의 양성에는 원칙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깊이 연구해야 할 부분은 두 번째 능력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 존재로서 살 수 있게 하는 ‘사람 교육’이다.--- p.126
우리는 어떤 종류의 믿음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구미호가 미녀로 둔갑하여 남자를 유혹한다는 것을 믿을 수도 있고, 달나라에 토끼가 산다는 것을 믿을 수도 있으며, 죽은 남편이 부활한다는 것을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지식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더 충족되어야 한다. 먼저 믿음의 내용이 참이어야 한다.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이 사실이어야 한다. 나아가 그 믿음이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참이라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죽은 남편이 부활한다는 것이 왜 참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p.154
‘형이상학계’는 현상계와 법칙계 전체를 뒷받침하는 세계이다. 왜 세계는 법칙적일까? 과연 세계는 법칙의 산물인가, 아니면 인간이 세계를 법칙의 틀로 볼 뿐인가? 도대체 인간은 그리고 세계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은 단지 물질인가, 아니면 정신이기도 한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들은 모두 형이상학계에 속한다. 형이상학계에 속하는 명제들은 현상계에 속하는 모든 사건들과 법칙계에 속하는 모든 법칙들을 총체적·정합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형이상학적 명제들은 우주의 전 역사를 꿰뚫는 거대한 담론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리학은 법칙계에 관한 학문이지만, 공학은 현상계에 속하는 학문이다. 물리적 법칙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법칙을 응용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분야도 법칙을 추구하지 않는 한 현상계에 관한 학문이다. 예술 활동은 현상계에서 일어나지만, 미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형이상학계에 속한다. 종교학도 종교 현상을 다루는 학문이다. 종교 현상에 내재하는 어떤 본질을 탐구하게 되면 형이상학계 속하는 종교 철학이 된다. 유신론, 무신론, 유물론, 본질주의, 이성주의, 낭만주의, 실존주의 등은 모두 형이상학계에 속하는 이론들이다.--- p.161
진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인간의 삶은 방황이요 시행착오에 그치게 된다. 만일 인간사에 질서나 방향을 부여하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우주적 미아에 불과하다. 왜 집을 짓고 다리를 놓고 은행에 예금을 해야 하는가? 물론 구체적인 행위들에 무대 내적 의미는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대 내적 의미만으로 인간은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의 등을 치는 것은 언제나 “그래, 어쨌다는 거냐?(So what?)”라는 자조적인 물음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는 상태에서 이 물음은 모든 무대 내적 의미와 가치에 찬물을 끼얹는다. 그래서 예컨대 종교는 인류를 이러한 ‘붕괴’로부터 구원하기 위한 ‘진리’의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p.167
지식의 체계에 대한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러한 이유들로 우리는 경험의 한계 너머로 지식을 확장해 갈 수 있다. 그래서 세계에 관한 여러 견해들이 등장한다. 법칙계와 형이상학계에 관한 주장들이 이론(가설)의 형식으로 등장한다. 기존의 지식 체계에 모순을 일으키는 경쟁 이론이 등장하면, 학문 공동체 내에는 모순을 해소 또는 해결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진다. 학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공유된 탐구의 방법론에 따라 체계적인 논쟁을 벌인다. 서양의 경우 국제 학술지들이 학문적 논쟁의 장이 된다. 학술지에 한 이론이 발표되면, 다른 학자들이 문자 그대로 ‘벌 떼’처럼 대들어 물고 뜯는다. 그 결과 어떤 이론은 죽고 어떤 이론은 살아남는다. 살아남는 이론은 ‘정론’으로 인정되고, 우리가 그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기인奇人의 사적·주관적 신념이 아니라, ‘그것의 참이 정당화된 공적·객관적 신념’인 것이다.--- p.173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은 왜 유한한 삶을 살다가 죽는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은 왜 고해苦海인가? 왜 인간 사회는 문제가 끊이지 않는가? 정의는 무엇이고, 불의는 무엇인가?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불의에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구원될 수 있는가? 민주주의는 최상의 정치 양식인가? 신자유주의는 최선의 경제 이념인가?--- p.195
우주 삼라만상은 우연히 또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이성 또는 정신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창조된 것이다. 인간이 이성적인 것은 우주적 이성을 분유 받아서이다. 따라서 일찍이 소크라테스가 가르친 바와 같이, 인간이 참되고 덕스럽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이성적이어야 한다. 본능이나 충동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 되고, 이성적 판단에 따라 사리를 분별하여 행동해야 한다. 언제나 진, 선, 미, 정의, 질서, 균형, 논리, 정확성을 추구해야 한다.--- p.208
과연 세계는 이성적인가, 아니면 낭만적인가? 21세기를 사는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는 이 두 경향이 위험스럽게 동거 또는 충돌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과학은 현대인의 우상이 되어 있으며, 합리성을 핵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최선의 삶의 양식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가운데,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우상파괴적 사상들이 이성, 자아, 과학, 논리, 공동체 등을 핵으로 한 이성주의적 세계관을 해체하는 데 골몰하고 있고,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친 전쟁, 테러, 갈등 등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p.219
이성이 주도해 온 인류 역사는 오늘날의 첨단 과학 문명을 낳았으며, 인간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현대는 정서적으로 메마른 시대이다. 인간은 ‘컴퓨터’라는 기계를 고안했고, 그 앞에서 인간은 기계를 닮아 간다. 대지는 감격의 대상이 아니라 투자의 대상으로 바뀌고, 인간의 가치는 그가 수행하는 기능으로 환원되었다. 아름다움, 감동, 경건, 순수성, 천진성, 자연스러움 등의 덕목 대신 경제성, 효용성, 실용성, 능률 등의 잣대가 우리들의 삶을 재단한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이 동거하는 역설적인 장이다. 따라서 이성과 감성 중 어느 것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 상실’이라는 어리석은 결과를 빚을 수밖에 없다. 추동력이 없는 자동차는 움직일 수 없고,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멈춰 설 수 없다. 마찬가지로 ‘뜨거운’ 감성이 없으면 인간은 동면冬眠에 빠질 것이고, ‘차가운’ 이성이 없으면 야만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곳곳에서 이성주의와 낭만주의가 충돌함으로써 살상과 파괴가 끊이지 않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이성과 감성이 공존하면서도 조화 없는 공존이 문제이다. 감성 없는 이성은 대지를 사막화하고, 이성 없는 감성은 대지를 피로 물들인다. 낭만주의는 이성주의의 경직된 삶을 비춰 주는 거울이고, 이성주의는 낭만주의의 도취된 삶을 깨우는 죽비이다. 이성주의와 낭만주의가 단순히 공존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성숙한 세상을 꿈꿔 본다.--- p.222
세계는 왜 존재하고, 인간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왜 인간은 이유도 모르고 태어나서 고된 삶을 살다가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일까? 삶은 그저 헛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진정으로 중요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의 비밀’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물음들은 우주의 역사가 어떤 드라마이고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이 물음들은 우리가 자살하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p.234
우리 삶의 문제는 쾌락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많은 데서 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합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소수의 행운일 뿐이다. 죽도록 사랑한 끝에 결혼해도 순탄한 결혼 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다. 파산하고, 실직하고, 낙방하고, 부도를 맞는다. 뜻하지 않은 사건이나 사고로 불구가 되고 유명을 달리한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송사에 휘말린다. 무시당하고, 따돌림 당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대접받지 못한다. 탈법과 범법을 일삼는 사람이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톨스토이가 죽음을 향한 고통 속에서 “나는 인류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 이 세상에서는 레오 톨스토이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번민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은 그가 죽기 전날인 1910년 11월 6일이었다. 우리들은 고통 속에서 태어나 고통 속에 살다가 고통 속에서 죽는다.--- p.249
고통 감수성의 정도를 보아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만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큰 자아를 가진 사람은 큰일을 한다. 자신의 몸뚱어리 하나의 고통만 아는 외소한 자아의 소유자는 결코 큰일을 할 수 없다. 고통 감수성이 낮은 데도 불구하고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다. 설사 도모하는 일을 이루더라도,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이다. 자아의 확대는 쉽지 않다. 그러나 자아의 확대는 자유나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은 인간됨의 표지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로봇이 인간의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그로 인해 괴로워할 수 있다면, 그 로봇은 더 이상 로봇이 아니라 사람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지각하지 못한다면, 그가 사람인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따라서 가능한 한 외소한 자아의 껍질을 깨고, 타인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p.252
고통은 싫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다. 그러나 고통을 모르면 사람도 아니요 살아 있다고도 할 수도 없다. 나아가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침으로써 인간은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고 잘하면 존재의 신비에 접근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고통의 역설이 말해 주는 것은 분명하다. “고통을 대접하라.” 고통은 기회이다. 고통은 우리를 어딘가로 안내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존재 각성에 걸맞은 삶을 살 기회를 주기 위해 방문하는 것이다. 그러니 고통이 아프게 속삭이는 말을 경청하자. 무엇이 문제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사람은 위대한 고통을 생산적 에너지로 전환할 줄 아는 사람이다. 위대한 고통은 인류인으로서의 삶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는 이정표이다. 따라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위대한 고통에 아파하는 사람은 축복 받았다고.--- p.267
우리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물음들을 묻고 또 묻지 않을 수 없다. 단지 궁금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이 없이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답들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어떠한 답도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가설에 불과하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가설은 물론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형이상학적 가설이 마음에 들어 받아들이더라도, 거짓일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형이상학적 가설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확신하고, 어떤 이유로도 그 확신을 굽히지 않게 되면 독단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독단과 같은 “자기 집착은 광기의 첫 번째 증상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집착하면 거짓을 참으로, 허상을 실재로, 폭력과 추함을 미와 정의로 받아들인다.” 독단은 광기의 사촌이다. 그리고 광기는 참담한 재앙을 부른다. 십자군 전쟁이 그랬고, 히틀러의 나치즘이 그랬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가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는 독단적 신념의 충돌로 테러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사실 누구나 자신이 몸담고 살아온 문화로부터 무심코 주입받은 신념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집집마다 가풍이 다르고, 지방마다 풍습이 다르며, 나라마다 전통과 관습이 고유하고, 시대마다 그 정신이 색다르고, 세대 간의 차이도 크고, 무엇보다도 세계관과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내 신념만 옳고 내 행위만 정당하며, 나의 신념과 다른 신념을 잘못된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음 중의 으뜸이 아닐 수 없다. 나의 신념을 의심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신념만 문제 삼는 것은 불필요한 갈등과 고통으로 안내하는 독단의 이정표인 것이다.--- p.299
역사 발전의 동력은 구도자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진리에 대한 열정은 인류의 위대한 조상들이 쌓아 올린 지혜의 사다리를 오르게 한다. 이 사다리를 오름으로써 그들은 수많은 선각자들이 평생을 바쳐 거둔 수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정신적 진화를 거듭한다. 그래서 그들의 자아는 자신의 한 겹 피부를 넘어서서 세상의 고통에 신음할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된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인생을 살기보다는 인류로서의 삶을 살고자 하고, 이를 위해 인류를 계몽하려고 하고 사랑할 수 있는 데까지 사랑하려 하는 인류인이 된다.--- p.310
존재 각성을 통한 자긍심이 없으면, 삶은 무대 내적 가치에 영혼을 파는 굴욕으로 점철될 수 있다. 삶은 진흙과 모래로 지은 우상의 숭배로 전락할 수 있다. 허무주의의 먹이가 되고, 기껏해야 먹은 것으로 비료를 생산하는 데 그칠 수 있다. 존재 각성을 통하여 자신을 존중하고,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되면, 인간사人間事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사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우선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 방식, 하는 일, 인간관계 등은 물론, 법, 제도, 정책, 도덕, 규범, 관행, 관습 등을 존재 각성의 거울에 비춰 봄으로써 옥석을 가릴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p.314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가능한 최선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물 좋고 공기 좋고, 앞에는 맑은 개울물이 흐르고, 뒤에는 울창한 숲이 우거져 있다. 의식주 걱정이 없고, 편리한 대중교통 수단, 완벽한 의료보험 제도가 있다. 범죄와 폭력으로부터 안전하고, 독단, 불신, 테러, 전쟁 등이 발을 붙일 수 없다. 좋아하고 보람된 일이 있어 유쾌하게 노동하고 성취감을 느끼며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인간선택의 원리가 보편화되어, 장애인, 아동, 여성, 노인, 이민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제도가 정착되어 있고, 잘 나지는 못했어도 소외되거나 인권 침해를 당하지 않고, 보호받고, 존중받고, 다 같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다. 언론은 신속 정확한 보도와 날카롭고 균형 잡힌 논평으로 민심의 향방을 선도한다. 정치인들은 나라 전체의 고통을 앓는 큰 자아를 가지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공직자들은 청렴하고, 신속하고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해 준다. 법조인들도 권력과 돈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진실과 정의가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이해관계와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소 또는 해결해 준다. 소질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교육 기회가 주어지며, 구도자적 정신문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존재 각성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양한 개성들의 조화와 협력, 세계와 삶에 대한 깊은 이해, 차원 높은 문화생활, 다양한 여가 활동과 취미 생활이 가능하다. 종교의 자유는 다양한 종교 생활을 보장하고, 서로 다른 종교들은 독단에서 벗어나 공존한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 향기로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멋진 사람들이 이웃이다.--- p.316
우리의 현실은 이상사회가 되기에는 아직 너무나 많은 문제가 널려 있고 고통이 넘친다. 그러나 이 점은 곧 우리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우리의 상황이 최악인 것은 아니다. 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이미 이상사회로 가는 큰 걸음을 옮겼다고 할 수 있다. 이상사회에의 꿈은 적어도 꿈꾸는 자가 있어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지도가 유토피아라는 땅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지도를 들여다볼 가치란 전혀 없다.”고 오스카 와일드는 말하였다. 그러나 지도를 들여다보기를 주저 말자. ‘완성된 곳으로서의 이상사회’는 지상에 없지만, ‘완성되어 가고 있는 곳으로서의 이상사회’는 지상에 있기 때문이다. 지옥 속에서도 천국의 꿈을 꿀 수 있는 한 지옥은 더 이상 지옥이 아니다. 천국과 지옥의 선택은 우리의 꿈과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p.319
인간은 모두 죽는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죽음으로 인하여 삶은 최초의 기회요 마지막 기회이며 단 한 번의 기회가 된다. 어느 날 죽음의 사자가 찾아올 것이다. 삶을 접어야 할 때이다. 죽음의 사자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그 앞에 어떤 계산서를 내놓을 것인가? 타고르의 그릇은 ‘모든 가을날과 여름날 밤의 향기로운 열매들’과 ‘분주한 삶에서 얻은 모든 수고와 이삭’으로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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