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예능이라 불리는 〈1박2일〉의 예를 들어보자. 원래 〈1박2일〉은 〈준비됐어요〉라는 스튜디오 게임 콘셉트에서 출발했다. 강호동을 캐스팅하고 야심차게 준비했지만 호응도가 낮았다. 그래서 팀 전체가 다시 모여 머리를 쥐어짜기 시작했다. 강호동이 진행자라는 원칙에만 부합한다면 어떠한 생각이라도 가능하였다. 이 과정에서는 타깃이나 공익적 가치는 일단 무시하는 거다. 별의별 생각들이 쏟아졌고 그중에서 이명한 PD와 이우정 작가가 내세운‘야생 버라이어티’콘셉트가 시청자의 니즈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제 생각이 아이디어 과정을 거치고 제작의 단계에 진입할 때는 핵심 타깃을 설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통로를 좁힌다는 의미다. 〈1박2일〉은 야생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니 일단 남성 출연자들로만 채우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다면 일단 남성 시청자가 핵심 타깃이다. 강호동이 30대 후반이었으니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의 남성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정하고 제작을 진행했다. 〈1박2일〉이 방영되는 일요일 저녁은 남성 시청자 층이 월요일 회사 출근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비우는 시간대다. 더욱이 당시 다른 채널에서는 여성 시청자 층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생각의 통로를 좁히자 현장 진행이 수월해졌다.
이제 대중에게 제작물을 선보이기 위해 편집을 하는 단계인데, 이때는 다시 타깃을 넓혀야 한다. 편집 과정과 이후의 진화 과정에서 더 많은 대중이 우리의 콘텐츠를 사랑할 수 있도록 수많은 요소를 삽입해야 한다. 출구 과정에서는 굳이 타깃을 좁힐 필요가 없다. 〈1박2일〉은 그런 이유로 지역 주민들과의 연대 과정을 담아냈다. 50대 이상의 대중들이 보더라도 흐뭇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도록 말이다. 출연자들은 평균 이하의 캐릭터로 만들었다. 대중은 자신보다 영특한 예능인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는 20대 이하의 시청자 층까지 배려한 방향이었다. 그리고 방영 이후 매회 시청자 층을 더 넓게 포섭하기 위한 아이템을 삽입했는데,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감동 코드를 삽입한 ‘백두산 특집’과 ‘이주 노동자 특집’, 여성 시청자와 젊은 남성 시청자들을 위한 ‘여배우 특집’등이 그것이다. 이로써〈1박2일〉의 시청자 층은 더욱 넓어 졌고 국민 예능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생각은 고전적인 SWOT 분석(강점 strength과 약점weakness, 기회opportunity와 위협threat 요인을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기법)과 세그먼트 마케팅(고객층의 성향에 맞게 마케팅하는 방법)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오히려 SWOT 분석을 극복해야 더 넓은 대중이 보인다. 각 과정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생각의 기준, WIDE-FIT-WIDE」 중에서
개그맨 신동엽은 자타공인 최고의 MC였다. 한참 동안 최고의 위치에 서있다가 판단을 잘못해 사업에 참여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빚도 지면서 슬럼프에 빠졌다. 그가 출연했던 방송의 시청률은 하락하고, 출연료도 낮게 책정되면서 왕년의 스타로 추락할 뻔했다. 다행히 신동엽은 현명한 친구다. 머리가 정말 빨리 돌아간다. 한창 방송을 잘 할 때는 그의 진행에 편집을 할 필요가 없었다. 방송 시간까지 머릿속으로 미리 계산해놓고 편집할 포인트까지 다 생각하면서 군더더기 없이 녹화를 진행한다. 그래서 PD들이 굉장히 선호했다. 그리고 정말로 이 똑똑한 친구는 슬럼프도 현명하게 이겨냈다.
보통의 우리는 슬럼프에 빠지게 되면 휴식을 찾아 떠나는 경우가 많다. 조금 쉬면 나아지지 않겠냐는‘막연한’기대감 때문이다. 그러나 막연한 기대는 ‘헛된’ 유혹이다. 물론 휴식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쉬려거든 제대로 쉬어라. 인간은 누구나 본성적으로 게으른데, 자신의 게으름을 만끽하기 위해 쉬려거든 아예 돌아올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휴식 동안에는 더욱 치열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 기간 동안 트렌드가 더 빠르게 변하고, 경쟁자들이 성장한다는 사실을 감내해야 한다. 복귀하면 트렌드 변화에 뒤처져버리고, 경쟁자들에게 밀릴 수 있다. 익숙해진 휴식의 습관은 절실함과 간절함을 앗아간다. 그래서 휴식은 저주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휴식을 하면서도 우리는 철저하게 자신을 검토하고, 정점을 찍었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도록 사유해야 하며, 자기만의 칼날을 갈지 않으면 안 된다. 휴식은 그렇게 사용해야 한다.
신동엽은 ‘휴식의 저주’를 본능적으로 눈치 챘다. 그래서 슬럼프 기간에도 그는 절대 방송 출연을 쉬지 않았다. 사람들은 신동엽이 몇 년 동안 공백기를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인기 프로그램이 아니어서 우리는 그가 출연했는지조차 몰랐을 뿐이다. 또한 인기 하락으로 방송 프로그램이 줄어들고 시간이 남자, 그 빈 시간을 독서로 채웠다고 한다. 그러면서 점점 그의 진행에 깊이가 더해졌다.
내공은 그렇게 형성되는 법이다. 그 후 신동엽은 KBS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SBS 〈강심장〉 등으로 다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2012 KBS 연예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훗날 신동엽은 슬럼프를 겪던 당시를 돌아보며 “실패 그 자체보다 그 속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일본의 경영컨설턴트 야마모토 신지가 제시한 개념으로 ‘일근육’이란 것이 있다. 근육을 처음 만들 때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지만, 한번 제대로 만들어지면 조금만 운동을 해도 양이 늘어나게 된다. 일을 하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고생을 많이 할수록 나중에 더욱 능숙해질 수 있다는 개념이 일근육 이론이다. 나는 이를 발전시킨‘생각근육’이란 개념을 주위에 많이 전파한다. 생각도 근육과 마찬가지로 능숙해질 때까지 고생을 감내하면서 고민의 양을 늘려야 한다. 그래야만 머리가 트이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적당한 휴식과 긴장의 반복이 근육을 더욱 성장시키고 단단해지게 한다. 하지만 너무 오래 휴식을 취하면 그 근육들이 다시 풀어질 수 있음을 기억하자. 생각의 근육이 풀리면 초기에 고생했던 모든 노력들이 수포가 될 수 있다. ---「휴식의 저주를 경계한다」 중에서
후배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다. 모든 일을 쉽게 배우려 해서도, 쉽게 하려고 들어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경험이 쌓이면 모든 일은 숙련되기 마련이다. 위기조차 쉽게 해결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를테면 노하우다. 하지만 노하우를 믿고 일을 하면 관성과 매너리즘에 빠질 수도 있다. 특히 콘텐츠를 창조하고 제작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위험에 더욱 크게 노출되어 있다. 항상 ‘새로움’을 찾아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관성과 매너리즘은 이 새로움의 가장 큰 적이다.
‘플랜 B(Plan B)’라는 용어가 있다. 잘 알다시피 미리 준비한 또 하나의 계획이란 뜻이다. 창조적 활동을 실행하는 사람들은 플랜 B를 가슴속에 하나씩은 가지고 다닌다. 만에 하나 프로젝트가 실패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플랜 B는 절대로 일찍 꺼내들면 안 된다. 두세 번 더 도전해 봐도 되는 상황에서 스스로 기회를 막을 필요는 없다. 플랜 B는 차선이지 최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선책은 말 그대로 최고의 콘텐츠가 될 수도 없거니와, 단지 대중들에게 내밀 수 있을 정도지, 절대로 그들을 매료시킬 수 없다.
토크쇼는 게스트 섭외에서 승패가 판가름 난다. MBC 〈무릎팍도사〉도 섭외를 잘해서 일정 정도 효과를 보았고, 최근에는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와 KBS 〈승승장구〉가 게스트의 덕을 보았다. 그렇다면 섭외를 잘하는 비결은 뭘까?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는 차인표를 섭외할 때까지 1년 동안 그의 모든 행사에 스태프가 찾아갔다고 한다. 가수 이장희가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이유는 울릉도까지 찾아온 PD의 정성 때문이었다. 남현주 PD는〈이야기쇼 두드림〉의 진행자로 소설가 황석영 작가를 캐스팅하기 위해 6개월간 공을 들였다. 주위에서는 절대 황석영 소설가가 진행을 맡는 일은 없을 거라며 말렸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해냈다. 〈불후의 명곡〉의 고민구 PD는 매주 전국을 돌고 있다. 송창식, 신중현 등 베테랑 가수들의 출연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다. 〈승승장구〉의 박지영 PD도 마찬가지다. 2012년에는 SBS 〈K팝스타〉로 화제를 모은 가수 보아가 그의 노력에 감동해서 컴백 무대로 SBS가 아닌 KBS 〈승승장구〉를 선택해 방송가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이는 모두 해당 게스트를 기필코 섭외하고 말겠다는 제작진의 절박함이 만들어낸 성과라 할 수 있다. 원래 진심은 부지런해야 더 잘 통하는 법이다.
일본 무인양품의 CEO인 마쓰이 타다미쓰는 “길이 두 갈래일 때 반드시 더 좁고 어려운 길을 택한다.”고 말한다.17 쉬운 선택과 차선책은 관성과 매너리즘에 가까운 법이다. 때로는 가슴 한편에 플랜 B 따위는 없는 게 우리들을 위해 더 좋다. ---「플랜 B는 일찍 꺼내드는 게 아니다」 중에서
야구계에는“위기는 기회다.”라는 속설이 있다. 수비를 할 때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그 순간을 제대로 이겨 낸다면 다음 공격 때 반드시 점수를 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위기는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하는 건 선수들의 마음이지 감독의 심정은 아닐 것이다. ‘야신’이라 불리는 김성근 감독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위기가 왔을 때 움직이는 건 리더가 아니다. 위기가 오기 전에 준비해놓는 것이 리더다.”
위기를 기회라고 여기는 것은 자기계발서의 해묵은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지녀야 할 긍정적인 마인드로는 적합하지만,비즈니스의 지속적 성장을 꿈꾸는 우리에게 별반 도움이 되지 못하는 생각이다.
2009년 11월까지 〈상상플러스〉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한때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노현정 아나운서와 탁재훈이라는 스타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위기의 징후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방관하고 말았다. 대신 노현정 아나운서에서 백승주, 최송현, 이지애 아나운서로 출연자만 교체하고 포맷이나 콘셉트는 별달리 손대지 않았다. 시청률이 급감한 뒤 뒤늦게 시즌 2를 편성했지만, 이 역시 이효리가 참여한 것 외에는 큰 변화를 주지 못했고, 결국 프로그램은 종영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해피투게더〉는 달랐다. 시즌 1인‘쟁반 노래방’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음에도 재빠르게 시즌 2를 준비하기 위해, ‘반갑다 친구야’라는 콘셉트로 파일롯 프로그램(pilot program, 견본 프로그램)을 미리 시청자들에게 선보였다. 반응이 일정 정도 긍정적으로 나오자 〈해피투게더:프렌즈〉라는 명칭으로 바꾸고 시즌 2로 전환했다. 대중 사이에 ‘쟁반 노래방’콘셉트가 아깝다는 여론이 있었고, 방송국 내에서도 연장 의견이 우세했지만, 우리는 빠르게 움직였다. 대중보다 반 박자 정도 빠르지 않으면 그 콘텐츠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을 거치며 〈해피투게더〉는 시즌 3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UCLA 경영대학원 래리 핑크Larry Fink 교수는 “리스크 관리란 어디까지나 내가 안고 있는 위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누구도 위기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위기가 닥쳐오리라는 사실은 예상할 수 있다. 성과 관리 전문가인 류랑도가 “내일이 오는 것이 싫어서 잠도 안 자며 발버둥쳐도, 내일은 오게 되어 있다.”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지금 안정돼 있다고 다가올 위기를 짐짓 외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위기가 언제 올지, 그 형태와 본질은 무엇일지까지 미리 파악해야 한다. 위기를 준비하지 않으면 커져가는 건 미래에 대한 두려움밖에 없다. 위기가 닥치고 나서 대안을 고민하는 건 부질없는 미련에 불과하다.
---「위기는 기회가 아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