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은 트루먼에게 전보를 보내고 나서 그냥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참모들에게 소련에 대한 선제 공격 방안을 수립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계획은 ‘언씽커블 작전(Operation Unthinkable)’이라 불리는데, 처칠이 직접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전의 최종안은 5월 22일 육군 앨런 브룩 원수, 해군 앤드류 커닝햄 제독, 공군 더글러스 에벌 대장의 지휘 아래 영국 합동기획참모부가 수립했고, 처칠의 군사보좌관인 해이스팅스 이스메이(Hastings Ismay)가 처칠에게 보고했다. 보고서의 제목은 〈러시아: 서양 문명에 대한 위협(Russia: Threat to Western Civilization)〉이었다. ---「1장 거의 터질 뻔한 전쟁」
토탤러티 계획은 제2차 세계대전 뒤에 미국이 충동적이고 성급하게 수립한 작전이었다. 시간이 지나 미국의 핵 능력이 커지면서 좀 더 야심찬 작전이 수립되었다. 서유럽과 동아시아로 팽창하려는 소련과 중국의 야심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는 가운데, 1957년이 시작되기 전에는 공산주의 국가의 주요 공격이 예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1949년에 이미 드롭샷 작전(Operation Dropshot)을 수립했다. 이때는 소련과 중국의 관계가 소원해지기 전으로, 미국이 판단하기에 중소 동맹에서 소련이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주요 목표가 되었다. 미국은 최대 300개의 원자폭탄과 약 3만 개의 재래식 폭탄을 소련의 여러 도시와 공군기지에 투하하여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과 사기를 떨어뜨릴 계획이었다. ---「2장 상황이 뜨겁게 달아오른다면」
효과적인 조직 편성, 조정, 목표 설정을 위해 수립된 이‘단일통합작전계획(Single Integrated Operational Plan)은 핵 비상사태 시 정부 부처와 각 군이 취해야 할 세부 지침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 따라야 할 세부 절차를 담았다. 버크 측에서 실행한 다년간의 로비는 헛되지 않았다. SIOP-62에서 해군과 해군 잠수함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버크와 군 내에서 버크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놓친 점은 각 군에 맞을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발전한 세계 상황에 더 적절한, 더 신중하고 단계적인 접근 방법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SIOP-62는 강력한 핵 공격 계획이었다. 3,000개가 넘는 핵탄두가 미리 정한 목표 목록에 지정되었는데, 여기에는 미사일기지와 비행장뿐만 아니라 도시와 산업 중심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2장 상황이 뜨겁게 달아오른다면」
프로펀크 계획의 규모는 엄청났다. 1950년 2월 우드 경찰대장이 스튜어트 카슨(Stuart Carson) 법무장관에게 보고한 내용에는 이러한 야심찬 억류 계획을 추진하는 데 따른 운영상의 어려움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캐나다 경찰은 수천 명의 캐나다시민을 수용소에 잡아넣을 구상을 하는 동안(우드 청장은 공산당원은 약 1만 6,000명이고, 공모자들은 5만 명이 넘는다고 주장했다), 주로 보급 문제에 몰두한 것처럼 보인다. 연방과 지방 정부 사이에 재정과 행정적인 책임을 분담하는 문제와 어떤 기관(군 또는 경찰)이 초기 검거와 이후 수용소를 관리하는 인력을 제공할 것인지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3장 핵 공격에 대비하기」
블루 피콕 핵 지뢰를 생각해낸 영국의 전쟁 기획자들은 이 무렵 중요한 딜레마가 되는 일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전술 핵무기’아이디어가 용어상 모순에 가깝다는 반쯤 철학적인 문제였다. 핵무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핵무기가 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굳이 위력을 축소시킬 이유가 있을까? 그렇지 않고서는 전쟁에 사용할 수가 없다는 이유가 유일했다. 과연 핵무기는 일본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하자마자 사용이 중단된 것일까? 1945년 이후, 그리고 소련의 핵무기 개발로 미국의 우위가 상쇄된 뒤에는 확실하게, 핵무기는 미국이 바라는 비장의 카드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사용할 수 없는 무기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핵폭탄이 평화를 지켰다면 너무 위력적이어서 사실상 사용하기를 꺼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4장 사선에 선 유럽」
니카라과의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 소모사는 1952년 워싱턴을 공식 방문했다)는 과테말라에서 망명한 카를로스 카스티요(Carlos Castillo) 대령과 함께 새로 출범한‘공산주의’ 정권을 뒤엎을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952년 중반 무렵,‘피비포춘 작전(Operation PB Fortune)’이 수립되었다. CIA는 쿠데타를 시도하려 한 카스티요에게 22만 5,000달러와 더불어 다량의 무기와 탄약을 제공했다.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의 우파 정권은 항공기 지원을 약속했다. 쿠데타가 성공하면 UFC는 과테말라에서 자사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었다. ---「5장 미국의 뒷마당」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 또는 ‘쿠바 프로젝트(Cuba Project)’라는 이름 아래, 적어도 32개 계획을 추진했는데, 문제는 카스트로 정부 전복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명백한 미국의‘괴롭힘’이 쿠바 자체와 카리브 해 지역 그리고 전 세계 다른 나라에서도 정치적 역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목적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은밀하게 실행에 옮겨서 공산주의 정권을 약화시키고,‘쿠바 민중의 반란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5장 미국의 뒷마당」
‘덕훅 작전Operation Duck Hook’은 북베트남의 핵심부를 겨냥한 대규모 공습 계획이었다.‘예비 평가’에는 미국의 구상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남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북베트남의 지원 능력과 직접 관련된 목표’로 한정한 이전의 공격 시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된 상황이었다. 이제 미국은‘ 좀 더 총체적이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목표를 공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수도 하노이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단행하여 전쟁의 불씨를 북베트남으로 옮길 작정이었다. 북베트남의 전쟁 활동을 와해시키는 동시에, 하이퐁 항구에 기뢰를 부설하여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동맹국(특히 소련)에 미국의 강경한 입장도 알릴 생각이었다.
---「6장 붉은 아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