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으로 돌아와 좋아하는 뚜레쥬르 피자빵을 먹으며 생각했다. 여기 이 끄트머리에 와사비가 조금 묻어 있어도 과연 이 피자빵을 먹을 것인가? 그렇다. 먹을 것이다. 먹어야만 한다. 그냥 눈을 감고 아흑! 삼킬 것이다. 그렇다면 와사비를 아흑, 삼키는 순간에도 피자빵 먹기를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그 와사비가 너무 많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뚜레쥬르 와사비 피자빵」 중에서
팔십 대 할머님의 치매 검사를 했다. “어르신, 오늘이 몇 월 며칠이에요?”라고 여쭤봤더니 갑자기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가야, 그런 건 몰라도 된다. 80년 동안 몰라도 잘 살았다.” 그냥 같이 웃었다. 그리고 0점이라고 적었다. 코를 훌쩍이며 검사를 하니 “와, 감기 걸렸노?” 하고 걱정해 주셨다.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 「오늘의 정신과 이야기」 중에서
딸아이는 이미 직장에서 녹초가 되어 2차 육아전을 하고 있는 나에게 도끼눈을 뜨고 어제 고양이 카페 갔던 이야기는 지금 왜 하냐며 기어이 지구젤리를 얻고야 만다. 억울하다. 1시간 거리의 직장에서 일을 하고 와 다리가 아프지만, 우는 동생을 업고 밥도 하고 청소도 하는(남편은 서울로 출장을 갔다) 내 사정을 이해해 달라고 자세히 설명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듣는 듯하다가도 “그래서 지구젤리는?” 하고 물어 온다. 크게 될 놈이다.
--- 「박티팔, 제발 어른이 되자」 중에서
강사 선생님은 내담자 역할을 할 사람을 지원받아 부부 치료를 시연했다. 자리가 멀어 얼굴이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담자 역할을 해 주신 분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촉촉한 목소리 때문은 아니고, 생각보다 솔직한 내용 때문에 눈물이 났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학회 와서 울고 앉아 있는 전문가는 나밖에 없었다. 얼른 휴지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적이다가 뭔가 잡혀서 꺼내 보니··· 아이고, 왜 여기서 때 타월이 나오냐···. 갑자기 웃음이 터져서 웃다가 콧물 두 줄기가 폭발해서 이리저리 대충 닦아놓고 또 조용히 강의를 들었다.
--- 「백 점짜리 하루」 중에서
내가 그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건 모든 어른들이 반대해서였다. 어른들에 대한 반감이 많았던 나는 어른들이 반대하는 건 일단 저지르고 봤다.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느냐고 묻는 어른들에게는 순진한 표정으로 “저는 그걸 왜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라는 특유의 멘트를 날려 기절시켰다. ‘그것’은 어릴 때는 공부였다가, 커서는 결혼식이 됐고, 자동차 세차가 되기도 했으며, 안부 전화였다가, 심지어 왜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말로 변해 엄마를 울리기도 했다.
--- 「날라리 오빠의 페로몬」 중에서
저녁 10시가 되면 아이들을 모두 다 재우고, 거실에 있는 기다란 스탠드 아래에 이상한 양탄자를 하나 깔아 내 영역을 확보한 다음, 그 밑에서 두 시간 동안 책도 읽고 웹툰도 보고 이것저것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 들뜬 마음으로 시간을 아껴 가며 노는데, 자칫 너무 밝은 표정으로 놀고 있으면 지나가던 남편이 함께 즐거운 놀이(?)를 하자며 꼬실 수도 있기 때문에 라마단을 보내는 승려처럼 약간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 「디자이너 남편 관찰 일기」 중에서
하루는 초딩인 딸아이가 나에게 재미있는 놀이를 알려주겠다며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 놀이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편 상태에서 “엄 마가욕하지말랬어요(하나 접고), 엄마 가욕하지말랬어요(또 하나 접고), 엄마가 욕하지말랬어요(또 하나 접고)···” 음정을 달리하며 손가락을 접더니 마지막에는 나를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며 치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나는 곧장 이 놀이에 열광했다. 여러 번 따라 하다가 몇 가지 패러디까지 만들어 내며 ‘뻐큐 놀이’를 즐겼다. 남편은 그런 우리를 보며 매우 교육적인 환경이라며 크게 칭찬했다.
--- 「뻐큐 놀이」 중에서
아이들이 배가 고파 스스로 먹지 않으면 나는 굳이 떠먹이려 노력하지 않는다. 야생이라고 생각해 보자. 원래대로라면 아이라는 동물은 스스로 냉장고 문을 열어 음식을 채집하고, 싱크대 위에 있는 밥을 점프 점프해서 따 먹어야 하는 건데 나는 친절하게도 냉장고 문을 열어 요리를 한 다음 굳이 점프하지 않아도 되도록 밥을 식탁까지 옮겨다 주는 친절한 엄마인 것이다. 이후 최소한의 사냥질(수저질)을 하지 않는 아이에게 굳이 밥을 떠먹일 필요는 없다. 타고난 식성이 좋은 아이는 좋은 아이대로, 입맛이 까다로운 아이는 까다로운 대로, 생명을 유지해 나가도록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 있어 삼시 세끼 열심히 사냥감을 던져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애들 쉽게 키우는 법」 중에서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티팔에게는 엄청난 자극이다. 큰 동물이 여기저기 냄새를 풍기며 움직이고, 나를 바라보며 소리도 내고, 눈알도 데굴데굴 굴러가는 게 뭔가 무섭고 바라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임팩트 있는 표정까지 지어 가며 큰 소리로 말하면 이건 정말 엄청난 정서적 자극이다.
--- 「A 계열 사용 설명서」 중에서
난 간헐적으로 UFO를 본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지하철 빈자리에 앉아 있는데 앞에 서 있던 할아버지가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고 “이런 미나리 쌍쌍바, 사발면 같은 것을 보았나!” 욕을 하기 시작하면 같이 싸우거나 대응하지 않고 속으로 ‘UFO를 보았다’라고 말한 뒤 조용히 자리를 옮긴다. UFO는 그냥 UFO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면 된다. 살면서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을 모두 다 이해하고 소화할 필요는 없다.
--- 「UFO를 보았다」 중에서
안방에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나는 남동생을 구경하다가 눈을 찔러보기도 하고, 분유를 먹어 보기도 했다. 분홍 악어에게 “내 동생 귀엽다”라고 말하거나, 악어의 손을 잡고 “엄마는 동생만 좋아하는 것 같지”라고 말하거나, 엄마, 아빠에게 말하기 힘든 뒷담화도 무수히 했다. 그럼 분홍 악어는 늘 내 말에 동조했다. “그래, 정말 귀엽다”라고 대답하거나 “너네 엄마 나빠, 아빠도 나빠”라고 대답해 줬다.
--- 「내 분홍 악어는 어디로 갔을까」 중에서
보더 친구는 자기가 왜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살아갈 가치가 없고 죽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매일매일 든다고 했다.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던 내 슬픈 표정을 보며 보더 친구가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도 결국에는 죽긴 죽을 건데 너랑은 다른 이유라고 말했다. 내가 죽는 것은 슬픈 게 아니고 당연한 거지만, 네가 죽는 건 슬프기 때문에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개소리야.” 우리 중 가장 심성이 여렸던 AD 친구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도 따라갈래.” 그 모습을 본 보더 친구가 말했다. “우리 셋 다 못 죽을 걸….”
--- 「유유상종 세 얼간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