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경제이론을 이용해 현실경제를 분석하고 정책을 제시하지만, 실제로 그것들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따라서 경제현실을 이해하고 올바른 정책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적 기반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경제가 야기하는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학과 더불어 인문학과 자연과학도 같이 공부하자! 인문학 중에서도 철학적 기반에 관한 인식은 특히 중요하다.
--- p. 15, 「경제학의 기반」 중에서
케인스경제학과 제도경제학은 인간의 합리성을 불완전하다고 가정한다. 이 때문에 시장은 지속적으로 불안정과 불평등, 불의를 양산해 낸다. 자본주의시장은 불완전하고 맹목적이며 광포하다. 하인으로서 시장은 실로 유익하지만 주인으로서 시장은 위험하다! 따라서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불가피하며 필수적이다. 정부개입을 찬성하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케인스경제학은 정부에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하지만 그것은 국가주의의 위험과 정부의 실패를 낳을 수 있다. 정부의 인지능력 역시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도경제학자들은 이 위험 앞에서 규제완화로 귀환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사악하지만, 이타적이고 도덕적이기도 하다. 제도경제학은 국가의 한계를 이런 시민들의 덕성과 정치적 참여로 보완하고자 한다.
--- p. 90~91, 「다른 인문학, 다른 경제정책」 중에서
진보진영은 시장에 대한 외부 주체의 개입을 포기하면 안 된다. 그것은 불안정, 불평등, 불균형, 불의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의 실패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보수진영처럼 규제완화로 회귀해서도 안 된다. 정부의 실패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시민운동으로 보완될 수 있다. 최근 민주정부의 적지 않은 정책입안자들이 규제완화로 회귀하는 유감스런 현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인문학적 시각이 ‘단일본성론’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다중적이다. 그 때문에 제한적 합리성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정의롭고 평등한 문명적 공동체를 꿈꾼다.
--- p. 91~92, 「다른 인문학, 다른 경제정책」 중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떡은 기본이다. 여기까지는 사탄과 신고전주의경제학자들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은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말씀’으로 산다. 곧 문화적 즐거움, 사회적 관계, 정치적 참여, 이타적 봉사 등 비물질적 요인이 좋은 삶의 구성요소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떡과 말씀이 충족되더라도 대다수 인간은 그것만으로 모든 번민을 물리칠 수 없다. 떡의 상대적 규모, 곧 소득의 불평등이 행복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정부가 소득분배정책을 영원히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다. 인간은 간단하지 않다!
--- p. 209, 「이스털린의 역설과 불평등」 중에서
국가는 경제적 계산과 이윤 동기가 아니라 사회적 연대, 문화적 결속 등 인간집단의 기본 조건을 마련하는 동시에 인권, 정의 등 보편적 가치를 도모하기 위해 존재한다. 공공재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포기될 수 없는 필연적 수단이다. 그러므로 국가는 이윤과 관계없이 존재해야 할 ‘보편적 조직’이다. 국가는 에우다이모니아, 곧 좋은 삶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하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국가는 필연적이다. 이윤에 좌우되는 ‘조건부’ 조직이 아니라는 말이다.
--- p. 286, 「비시장적 국가」 중에서
모든 연구결과로부터 최소한 독재체제가 경제성장에 기여한다는 주장을 끌어낼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저개발국가가 성장하기 위해 민주체제가 필연적이지 않듯이 반드시 독재정치체제가 필요하다고 볼 수도 없다. 박정희가 이룬 ‘한강의 기적’은 독재정치체제와 무관한 다른 여러 요인이 상호작용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경제성장을 연구할 때 정치체제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여전히 빈약하다.
--- p. 337~338, 「정치체제와 경제성장」 중에서
모든 나라에서 임금을 동시에 1% 포인트 줄이면 전 세계의 GDP는 0.36% 감소한다. 세계경제는 이윤주도체제가 아니라 임금주도수요경제다! (…) 모든 임금주도경제체제가 이전에 지급했던 최고임금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동시에 모든 이윤주도경제체제들이 임금을 대략 1~3% 올리면 모든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는 동시에 글로벌 GDP도 3.05% 증가할 것이다.’ 고임금은 성장을 견인하지만, 저임금은 개별국가는 물론 세계경제를 정체로 빠트린다! 모든 나라가 ‘세계사회’로 하나 되어 사회적으로 행동하면 비용의 역설은 사라지고 죄수들의 딜레마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 p. 373, 「저임금성장론의 허구」 중에서
어떤 제도변화의 결과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계산 가능한 ‘경제적 효과’는 물론 계산 불가능한 ‘사회적 효과’를 함께 볼 줄 아는 지혜로운 눈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도 이제 편협하고도 이기적인 외눈박이 상태를 벗어나 두 개의 눈을 가질 때도 되지 않았는가? (…) 앞에서 검토한 최저임금인상효과도 같은 맥락에 서 있다. 최저임금이 인상됨으로써 고용이 증가하지 않고 경제 역시 크게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학생들은 마음의 여유를 얻어 청춘을 노래할 수 있고, 가난한 가장은 조촐한 외식으로 자식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으리라! 진보진영은 분배가 유발하는 이런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효과, 곧 ‘비물질적’ 효과를 망각하면 안 된다. 목적함수에 이런 비물질적 효과가 포함돼 있는 한, 포스트케인지언 임금주도성장론은 그 자체로 제도경제학이다.
--- p. 378~379, 「분배의 사회적 효과」 중에서
제도경제학은 통일된 패러다임이 아니다. 베블런의 기술적 실용주의, 커먼스의 공정경제, 케인스의 수요주도경제학, 슘페터의 혁신경제학이 제도경제학의 우산 아래서 갈등을 겪으며 ‘좋은 삶’을 향해 협력해 나가고 있다. (중략) 의사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을 믿고, 누추하고 불안정하지만 그때그때 각 나라의 맥락에 맞게 각자의 해답을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과제는 민주정부와 깨어 있는 시민들의 몫이다.
--- p. 389, 「제도경제학의 지속가능한 발전」 중에서
모든 경제학파는 과학(Science)으로 인정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경제학모델에서 인문학을 제거하는 대신 그 공간을 자연과학으로 채우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적 모습을 지우고 그 흔적을 제거하려 온 힘을 다한다. 그 결과 행위자가 없어진다. 행위자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계산 잘하는 신고전주의 슈퍼컴퓨터, 역사법칙만 추구하고 일만 잘하는 마르크스 프롤레타리아, 모든 일을 국가에 일임하고 자신은 ‘구성의 오류’만 유발하는 케인지언 호모에코노미쿠스가 전부다. 인문학의 빈곤은 ‘사람 없는’ 경제학, 사람을 혐오하는 경제학을 만든다.
--- p. 448~449, 「깨어 있는 시민들과 제도경제학」 중에서